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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우리는 차이가 있습니다.(삼상6:19-7:2)
2026, 7/19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삼상6:19-7:2절 말씀으로“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우리는 차이가 있습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이번 주말이 중복입니다. 삼복 중의 가운데 中자의 중복이니 더위의 피크인가요? 그런데 지금 장마인 거 맞죠? 계속 비가 많이 와서 습도는 높지만 더위는 그래도 견딜만합니다. 이런 중에도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라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서 이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래도 이해하겠는데, 만약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국가의 돈 빼먹는데 혈안이 되거나, 나라의 체제를 바꾸려고 한다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휴전선에 보안시설을 강화하고 병력 1/3을 후방으로 빼고, 후방 방어를 민간 회사에 맡긴다거나, 군내 불순세력을 잡는 방첩대를 해체하고, 육해공 사관학교를 통합하는 것, 또 탈영병임을 알면서도 국방장관에 임명하는 게 아직도 휴전 중인 우리나라에 진정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니면 군을 허물기 위한 결정인지 모르겠지만 부디 나라를 위해 내린 결정이길 바랍니다. 나라 위해 기도 많이 해주세요.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2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지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아닙니다.(19절)
둘째로, 하나님과 교제는 우리와의 차이를 인정할 때 이루어집니다.(1절)
그러면 말씀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와 너무 다른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것을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음성으로 듣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지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아닙니다. (19절)
본문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아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로 인한 재앙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스라엘로 다시 돌려보냈는데, 이 법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큰 돌 위에 놓아두고 번제와 각종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스라엘 귀환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밭에 있던 언약궤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매우 궁금해했습니다. 그 법궤 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을 넣어두었다는데 지금까지 그게 들어있을까? 또 어떤 모습일까? 정말 그 안에는 하나님이 계실까? 아마 이런 호기심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법궤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하여 결국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고 맙니다.
민 4:15-20절은 이런 궁금증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법궤를 옮길 때는 성소의 모든 기구를 덮도록 했고, 또 민4:20절에는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이렇게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성막을 옮기거나 설치할 때는 사람 손이 필요한데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아론과 그의 아들만이 이 법궤와 성소에 손댈 수 있었고, 운반할 때는 지정된 레위인만이 옮기도록 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은 성소나 법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할까 봐서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엄위하시고 존귀하시고 거룩하여 죄 덩어리인 인간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죽을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날 때도, 길갈에서 여호수아를 만나줄 때도 발에 신을 벗도록 했습니다. 신발은 일상생활에서 먼지와 더러움을 묻히고 다니는 물건으로, 이 신을 벗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참고할 것은 땅 자체가 원래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셨기 때문에 거룩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벧세메스 사람들은 아무리 법궤가 궁금해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이 법궤를 들여다봐서는 절대 안 되는 성물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또 성물을 들여다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죄 많은 인간이 죄가 많은 것도 치명적인데, 거기에다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우쭐해지고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람들이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이 법궤를 들여다보고 마치 하나님을 만나서 식사하고 커피까지 마신 것처럼, 또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만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과장해서 얼마든지 말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능히 그럴 수 있는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 은혜 중 극히 일부분만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언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에 소위 은사 자들이 무슨 큰 은사를 받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침소봉대하여 우쭐해 하는 경우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습득한 지식을 맘대로 오,남용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응답하신 것을 보고 솔로몬이 최고의 것을 최선을 다해 드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천 번제만 드리면 무조건 응답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니까 말씀과 상관없이 어떻게 살아도 교회 나가서 예배하고 헌금만 하면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이 인간의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엄격히 금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천박한 호기심이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면 안 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게 됩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 유월절을 맞이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는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에게 보내자 헤롯 안티파스는 매우 기뻐합니다. 사실 헤롯은 예수님을 무척 만나고 싶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그가 누구인지, 또 자기 앞에서 기적 행하는 것을 직접 보기 위한 천박한 호기심으로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예수님은 그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눅23:7-12).
여러분!!! 하나님은 지적 호기심의 대상도 아니고, 우리의 얄팍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분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벧세메스 거민들이나 헤롯 안티파스는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들의 천박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법궤를 들여다보고,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했던 것입니다.(눅23:11) 그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천박한 호기심을 채우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호기심이 다 나쁜 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온전한 예배를 위한 호기심은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어겨가면서까지 법궤를 들여다볼 것까지는 없겠지요. 호기심을 갖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범위 안에서만 알고 또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시99:9절에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를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교제는 우리와의 차이를 인정할 때 이루어집니다.(1절)
본문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아멘.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쳐다보다가 (오만)칠십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당시 벧세메스 인구가 5만이 되지 않는 작은 성읍임을 고려할 때 70명이 맞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오만을 표기한 것은 (오만) 칠십 명"으로 기록된 히브리 성경 마소라 본문을 그대로 가져와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대로 성경에 왜 그대로 번역했느냐는 것인데, 마소라는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의 표준으로써 단순히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넘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한 글자도 오차를 허용하지 않았던 유대인 서기관들의 집념과 정밀한 시스템이 집대성된 결정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존중해서 입니다. 그러니까 마소라의 권위가 탁월하여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어쨌든 이 내용은 마소라 본문의 필사 오류로 보면서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마소라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여‘(5만) 70명’으로 그냥 번역한 결과입니다.
어쨌든 7:1절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다가 큰 화를 당하자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법궤를 가져가 줄 것을 부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랏여아림이 자신들도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죽을 수 있는데도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법궤를 가져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여러분!!! 블레셋도 감당 못했고, 벧세메스도 사람들도 감당 못한 이 법궤를 그들은 왜 옮겨갔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6:20절에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말을 하면서도 결국 법궤를 다른 곳으로 보냈지만, 기럇여아림은 같은 상황에서 법궤를 받아들여 정중하게 모셨는데, 이것은 단순한 용기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럇여아림은 블레셋과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만홀히 여기다 죽임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옮겨온 후 법궤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합니다. 다시 말해 법궤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특별히 사람을 구별하여 관리하게 함으로 하나님 경외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여러분!!! 벧세메스는 법궤의 귀환을 기뻐했지만 호기심과 경솔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겼지만, 기럇여아림은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법궤를 모십니다.
이걸 볼 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법궤를 규례에 따라 조심스럽게 모셨는데, 이걸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간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절대적인 간극이 있습니다. 만약 이 간극을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면 그가 누구든 죽게 됩니다.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자 그가 비록 하나님께 출애굽의 사명을 받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임에도 가차 없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 에서가 야곱에게 속은 것 때문에 야곱을 죽이려고 병사들을 대동하고 오자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새 기도합니다. 기도가 끝난 후 천사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자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32:30) 이러면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하나님의 얼굴을 본 곳’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걸 알았기에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너무도 감사해서 그곳 이름을‘브니엘’이라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 신34:10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대면했다는 말씀이 나오지만, 이는 모세가 직접 하나님을 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뒷모습만을 잠깐 보았을 뿐입니다(출33:21-23). 여기서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또 말씀하십니다(출33:20).
그러므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점을 생각해 하나님의 임재의 상정인 언약궤를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 천박한 호기심은 자제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함부로 범접했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했고,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교제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엄성과 거룩함을 범하지 않고 예배와 섬김을 통하여 진정한 사귐과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절대적 간극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만홀히 여기거나 함부로 한다면 그 뒷감당은 우리의 몫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궤가 벧세메스 거민들 중에 있었고, 또한 기럇여아림 사람들 가운데 있었듯이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해 계시는 만큼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까운 친구일수록 예의를 지키고, 세상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이 선을 넘어설 때 아무리 가까운 친구도, 부부도 금이 가고 깨지듯이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해도 이 간극을 넘어서면 깨집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고, 말 한마디에 온 가문이 폐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생사를 결정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잠25:11절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이나 행동 등 모든 면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생각 없이 하는 행동 하나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혹은 그분의 영광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거나, 십자가를 밟거나, 또 하나님을 희화화하거나, 하나님을 망령되이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과 교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수록 말이나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실수하여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거나 그의 영광을 가릴 것을 두려워 하여 때로는 하고 싶은 말도 참고, 언행을 조심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 사회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을 잘하시고, 날마다 나를 돌아보아 복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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