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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공관복음 강론17
주제 14. 산상수훈(7) : 주기도문 강해(3) (마 6:9-13)
1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옵헤일레테스/ 빚진 자의 복수형)를
<호크마주석>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 신약성경에서 혼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은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죄는 빗나감이다.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바람에 하나님처럼 독자적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빗나가게 된 것이고 아담과 하와도 각자 자기가 그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됨으로써 인간관계도 빗나가게 되는 것이다.(소외) 결국 각자도생의 운명을 만든 것이고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가 다 비틀어진 것인데 이 각자도생이라는 비참한 운명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소외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 소외의 결과가 뭔지를 모르는 것이다. 윤리나 도덕적인 삶은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공멸을 피하기 위해서 만든 요령에 불과한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제시하는 성서 요절
(눅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옵헤일로/ 빚지다의 분사형 단수 / 빚을 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압히에미/ 면제하다) 우리 죄(하마르티아/ 빗나감)도 사하여 주시옵고(압히에미).....
* 누가 : 모든 사람의 옵헤일로 / 우리들의 하마르티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할 때 원어를 잘 보면, 마태복음은 둘 다 (옵헤일로) 빚, 즉 채무를 썼고, 누가는 우리 경우에는 (하마르티아) 죄로 바꾼 것이다.)
12. 사하여 준(압히에미) 것 같이 우리 죄(옵헤일레마/ 빚진 것)를 사하여 주시옵고
<호크마주석> 우리가...사하여 준 것 같이 -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시제로 보지 않고 현재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바로 용서를 채무 문제로 설명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1만 달란트 (요즘 돈으로 30조 원 정도)를 먼저 사해 주셨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겨우 수천만 원 밖에 안 되는 그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니까 30조 원이나 되는 빚을 탕감해 준 주인이 내가 탕감해 준 거 취소. 이제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엄청난 용서를 하셨고 우리는 작은 용서를 해야 하는데 작은 용서도 하지 않으면 그 큰 용서가 취소된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순서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기도문만 보게 되면 우리가 먼저 죄를 용서해 주고, 그것에 따라서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 구도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호크마 주석은 인품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엄청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한테 지은 죄는 작게 보인다는 것인데, 이것은 순전히 인간 영역에서 사례가 깊고 사고가 깊은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제시하는 성서 요절
눅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옵헤일로/ 빚진 자)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압히에미/ 면제하다) 우리 죄(하마르티아/ 빗나감)도 사하여 주시옵고(압히에미).....
* 누가 : 모든 사람의 옵헤일로 / 우리들의 하마르티아
<클레로스 신학에서 용서의 세 단계>
너는 너 밖에 모른다는 것이 성서의 인간론이며 각자도생도 결국 거기서 나온 결론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용서는 단계가 있다.
1.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너는 가해자, 나는 피해자) – 원망, 정죄, 보복
이 단계가 세상 사람들의 평범한 인성(싸르크스) 이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는 인간이 선하게 되는 데에 필요한 네 가지 실마리를 이야기했는데 그 중에 智(是非之心, 시비지심)이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줄 알기 때문에 인간은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시비비 백날 가려봐야 싸움판만 점점 더 커지고 억울함만 점점 커지고 복수심만 점점 더 불타오르게 된다. 그게 평범한 인간들의 삶의 현장이다.
2. 너나 나나(이번에는 네가 틀렸으나) – 이해는 하나 용서는 별개의 유불리 문제
1) 세상 사람들의 합리적 인성(싸르크스)
2) 클레로노모스들의 합리적 인성(싸르크스)
두 번째로 “너나 나나” 라는 시각이 있다. “너나 나나” 라는 시각은 세상 사람들에게도 있고 클레로노모스들에게도 있다.
“너나 나나”란 이번에는 네가 잘못했는데 나도 너처럼 남을 해칠 때가 있고 그런 거지 뭐 특별히 너만 나쁜 인간은 아니고 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상대방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는 하는데 용서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용서는 별개의 유불리 문제이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합리적인 인성인 것이다. 약간 고급한 인성인 것이다.
그 다음에 클레로노모스들도 싸르크스에 휘둘릴 때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클레로노모스들은 싸르크스에 휘둘리는 순간에도 세상 사람들의 평범한 인성으로는 잘 안 간다. 너는 가해자 나는 피해자 그러면서 복수심까지 막 일어나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싸르크스에 휘둘려도 두 번째 정도로 간다. “너나 나나” 가 대단히 합리적인 인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리가 양이 되었다가, 양이 이리가 되었다가 하는 것처럼 자기는 항상 피해자는 아니고 자기도 가해자가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 번째 수준이다.
3. 우리도 전에는 – 긍휼, 용서, 친절
클레로노모스들의 합리적 신성
싸르크스에 휘둘리지 않고 클레로노모스들에게 신성이 발동할 때가 “우리도 전에는” 의 단계이다.
우리도 전에는 그대들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 디도서 3장의 말씀이다. 디도에게 하는 말이 우리도 전에는 서로 미워하며 살았으나, 즉 우리도 전에는 1번 아니면 2번이었으나 지금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다. 아직도 저러고 살고 있구나, 나도 전에는 저렇게 살았었는데, 그러면서 그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 것이다. 저 사람도 나처럼 저 지옥 같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그러면서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고 나도 그렇게 살았던 것을 알기 때문에 친절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클레노모스들이 보이는 합리적 신성이다.
성서에서의 용서라는 것은 이 세 번째 용서다. 첫 번째는 물론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다. 우리도 전에는 그랬었지,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게 살까, 저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사는 것이 저 사람도 우리처럼 우물 밖으로 나와야 되는데, 그래서 짠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참고> 내 탓이오 – 위선, 자기 높임
세상 사람들의 비합리적 인성(싸르크스)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기도문 뒤에 이어서 설명을 하시는 부분이다. 여기에도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30조 원이나 되는 돈을 먼저 탕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다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눅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에피티마오/ 책망하다, 주목하다, 경계하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용서에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와서 다시 돌이키겠다고 고백할 때 그때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이 “내가 뭐 잘못했어? 광화문 네 거리를 막고 물어봐 내가 잘못했나” 이러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피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네 형제가” 라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형제 자매인 어떤 형제가 싸르크스에 휘둘려서 너에게 해를 끼치고 클레로스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할 그때는 무한 반복하면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17: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메타노에오/ 돌이키다)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하마르타노/ 빗나가다/ 악의 원인)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압히에미)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기도문과 관련해서는 딱 이 부분(35절)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전제가 있는 것이다. 1만 달란트를 먼저 탕감 받은 게 전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순서가 이렇게 명료한 것이다. 진정한 용서라는 것은 세 번째 단계이다. 먼저 우리가 우물 밖으로 꺼내지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 우리가 우물 속에서 저질렀던 모든 허물을 용서받고 없는 것으로 쳐주시고, 주홍 같은 너희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하리라 하신 이사야의 말씀대로 우물 속에서 우리가 저질렀던 그 엄청난 일들을 다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은혜를 먼저 받았고 구원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우물 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서로 물고 뜯고 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때 우리가 그 사람이 불쌍한 것이다. 우리도 전에는 저랬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큰 은혜를 받고보니 저 사람 불쌍하다, 저 사람도 우물 속에서 나와야 될 텐데, 이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용서는 인간의 용서가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의 용서인 것이다.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많은 오해들이 있는 말씀이다. 16:19 은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해서 로마 교황이 그것을 물려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다음 18:18절에 보면 베드로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너희가 하나가 되면 하늘에서도 너희가 하나가 될 것이고, 너희가 남남이 되면 하늘에서도 남남이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연동흠 형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