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
글,편집: 묵은지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한 화가 혜원 신윤복(1758년~1814년)은 단원 김홍도(1745년~1806년), 긍재 김득신(1604년~1684년), 오원 장승업(1843년~1897년)과 더불어 조선 후기 크게는 4대 풍속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시기적으로 동 시대를 살며 세월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은 단원 김홍도와는 당대 조선 화단의 쌍벽을 이룬 관계로 후세에 와서도 화풍을 두고 곧잘 비교가 되곤 하였습니다. 작품을 통해 느껴지듯이 주류적 사고에 중심을 두려했던 김홍도에 비해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타고 비판 의식과 사고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신윤복의 또다른 의미의 작품은 이미 한발 앞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김홍도와 함께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로서 그들의 뛰어난 작품 만큼이나 조선 시대 후기의 변혁기를 살았던 생애까지도 후세들에게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신윤복은 자신보다 한발 앞서가고 있는 김홍도와 일종의 라이벌 의식이어서 였는지는 몰라도 보다 도전적이고 반발적인 과감한 화풍에 노골적인 남녀상열지사를 보는 것 같은 야릇한 느낌을 더했고 체면속에 감춰진 양반들의 위선적인 모습도 과감히 그림에 담아내어 김홍도와는 또다른 차별화된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도덕 관념이 강했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 사회를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혜원전신첩이나 건곤일회도첩 등에서 농도짙은 그림을 보여 주었는데 욕정이 넘쳐 조급한 마음에 체면도 내팽개치고 여색을 탐하고 있는 양반의 모습이나 색정에 달뜬 여인과 이를 탐하려 수작을 부리는 허세의 양반을 그려내는 등 여인과 양반의 이런 농짙은 해학적인 풍자는 자칫 양반 모욕죄로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었으나 신윤복은 자신의 작품들에 실명을 당당하게 밝히고 낙관까지 찍는 대담함을 보인 것은 그의 자유 분방한 예술적 성향의 자부심이 대략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하였습니다.
때는 문체반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개혁 군주라 일컫는 정조가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사절을 수행하며 겪은 것을 새로운 여행기록 형식으로 펴낸 열하일기와 같은 학자들 사이에 새로운 유행의 문장들을 패관소품체라 규정, 멀리하게 하고 과거와 같은 기존의 엄격한 성리학에 관련한 고문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며 학문의 연구와 궁중 도서관을 겸비한 규장각을 설치하는 등 이른바 문체반정이라는 문화적 정치 상황을 엮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김홍도는 개혁군주 정조가 추구하고자 하는 엄격한 성리학적인 뜻을 받드는 화가였기에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현감까지 지내는 화려한 경력을 누렸지만 반면에 신윤복은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뒤 양반을 우롱하는 비판과 저속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圖畵署,그림을 그리는 관청)에서 쫒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동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같은 화가였지만 대우면에서는 천양지차의 차별을 받았는데 신윤복은 이에 아랑곳 하지않고 김홍도처럼 유교의 주류적 사고를 대변한 작품 보다는 18세기의 조선 사회에 불어대던 자유 연애의 바람을 솔직하게 표현하려 했으며 그 시대에 봉건 주의적인 사상으로 금기시 되었던 억제된 욕망을 화폭에 솔직하게 표현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호기심과 재미를 더해 주었습니다.
신윤복의 집안은 전적이 화려한 화공 가문으로 워낙 뛰어난 화가들이었기에 증조부인 신세담이나 조부 신일흥, 아버지 신한평까지 모두 도화서 화원 출신이었습니다. 특히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 역시 초상화와 속화(민화)에 실력이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로 궁중의 자비대령 화원(규장각 파견 화원)으로 활동을 했었으나 영조의 어진에 참여를 하면서 그가 그린 부분이 잘못 그려졌다는 이유로 한때 유배를 가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신윤복의 가문은 신숙주(훈민정음 창제자의 한사람)의 방계 후손이었으며 이후 서자 출신으로 이어져 후손들은 중인으로 신분이 낮아지게 되었으며 아무리 높은 학식을 갖춘다해도 주로 역관이나 율관, 운관 혹은 화원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그의 사회적 신분으로 양반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그의 작품에는 양반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태도의 풍자와 부녀자들의 애정에 대한 애환을 주로 묘사하였으며 그의 독특한 화풍의 취향은 그만의 해학으로 화폭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습니다.
사실 신윤복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었으며 출생연도 역시 추측하여 1758년으로 짐작하는 정도였고 신한평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적 이름은 신가권이었으며 도화서 화원이 되어 40대에 와서야 벼슬이 첨절제사에 이르렀고 세도 정치의 여파로 순조 초기에 그나마 속화나 춘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쫒겨 났다는 정도로만 전해질 뿐 작품에 관련한 생애나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무합니다. 아무튼 그의 전통 화풍을 거부한 자유로운 구도의 시도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교 사회로부터 벗어나 말년에는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구가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신윤복은 작품에 있어 남녀간의 애정 표현을 자신의 예술 세계로 끌어들여 대담하게 색정을 표출하였습니다. 자신의 작품속에 진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함과 동시에 성리학 이념에 의한 폐쇄적 굴레안에서 양반들이 향락 풍조에 젖어있는 이중적인 면을 꼬집어 내었고 이러한 현실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을 통해 사대부와 양반들의 윤리관이나 체면치레의 허상을 여실히 보여 주었으며 여러 부류의 여인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은 당시의 조선 사회가 갖추고 있는 엄격한 내외법의 존재를 무시한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작품의 치밀한 구도상의 논리나 섬세한 필치, 색상 또한 다양하고 화려한 채색화로 멋을 더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인간주의 표방과 유교적 사고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바랬던 신윤복의 작품은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그동안 양반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회화 분야를 서민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신윤복 이전의 화가들이 표현한 조선 여인들의 모습은 주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인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면 신윤복은 자유로운 관능미를 강조한 작품이 많아 그의 풍속 화첩에 있는 '춘색만원', '월하정인', '월하밀회', 등과 같이 남녀의 밀애를 소재로한 작품은 이런점에서 그의 화려한 여성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는 단원 김홍도와도 비교가 되는데 인물을 강조하며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한 것이나 채색도 최대한 절제하여 먹의 농담을 활용하며 주로 서민을 대상으로한 생활상을 위주로 그려낸 김홍도에 비해 혜원 신윤복은 화려한 원색을 사용하여 가늘고 섬세한 선을 살리고 자세한 배경 묘사로 양반의 풍류 생활과 부녀자의 본능적인 솔직한 모습, 남녀 간의 애정을 풍자적으로 그려 내었습니다. 이런 그림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윤복은 여인을 만나는 것을 즐겨 하였으며 자유 분방한 그의 성격으로 보아 당시의 수많은 여인들과의 스캔들도 상당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자신의 그림에 수려한 글귀를 넣은 것 역시 미루어 짐작컨데 아무리 남녀가 유별했던 유교 사회였을지라도 여인들의 감성을 파고들며 시적 감각에서 나오는 그의 유창한 언변은 여인들의 마음을 엄청 흔들어 놓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배경을 중요시한 신윤복의 풍속화는 작품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살이와 의상의 종류 등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어 조선 후기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거나 연구하는데 참고가 되기도 하지만 정작 그의 작품에는 찬문(撰文 그림에 곁들이는 글)이나 낙관(落款 그림에 찍는 도장)까지 곁들여 있음에도 작품의 연도와 시기를 정확히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에 대한 변천 과정을 알아보기 어렵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보니 오해의 소지까지 불러와 오래전 상영되었던 전윤수 감독의 영화 미인도나 바람의 화원이라는 이정명의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지만 극중에서도 그랬듯이 신윤복이 남장 여자였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한 것은 다름아닌 정보의 부재에서 상상력이 빚은 오해라 생각됩니다. 정조가 죽고 나이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외척들에 의한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신윤복의 작품 활동에 쇠퇴기를 맞게 되는데 1813년에 즈음하여 작품 활동이 중단되고 다음해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 아직까지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