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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1장 5절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8-겸손한 삶
여러분은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하십니까? 여러분은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성공하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계십니까? 여러분 성공한 사람의 척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공의 척도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한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한 큰 교회에 부흥회를 가셨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인도하시고 나서 식사를 대접받는데 그날 식사를 대접하시는 분은 그 교회의 권사님이셨습니다. 식사를 하는 가운데 권사님이 부흥강사님에게 말합니다. ”강사님! 저는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예요! 아들이 셋이 있는데 세 아들이 다 성공했어요.”강사가 묻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들들이 어떻게 되었는데요?”권사님이 말합니다. “큰 아들은 서울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해서 법관이 되었고요, 둘째 아들은 경영학과를 나와서 대기업의 사장이 되었고요, 셋째 아들은 의대를 나와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유명한 의사가 되었어요”강사가 말합니다. “권사님 축하합니다. 그런데 세 아들다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도 열심히 잘 다니지요?”그러자 그렇게 큰 소리로 자랑하던 권사님이 밥상 아래로 눈을 떨구며 모기만한 소리로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애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교회를 안다녀요”
여러분 이 권사님의 아들들이 성공한 것일까요? 과연 성공이 세상에서 잘되면 성공하는 것일까요?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성공의 척도를 눈에 볼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되거나, 정치가로 성공을 하거나, 명예나 인기를 얻거나, 사회에서 높임을 받는 저명인사가 되거나 하는 등의 각종 성공척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들이 성공이 맞기는 맞을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화련한 인생을 사면 성공한 것일까요?
여러분 부자는 얼마나 많은 돈과 재산이 있어야 부자일까요? 한 10억은 있어야 부자일까요? 그러면 9억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아닐까요? 분명 9억을 가진 사람은 10억을 가진 사람보다 부자가 아닙니다. 집을 100채를 가진 사람도 101채 가진 사람보다는 부자가 아닙니다. 땅을 10,000평 가진 사람도 11,000평을 가진 사람보다도 부자가 아닙니다. 항상 가진 사람 위에 더 가진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잘 뛰는 사람보다는 더 잘 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잘 달리는 사람보다 더 잘 달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있는 사람보다 많이 가진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이 가진 재산으로 추정되는 액수가 무려 6조 5천억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김정은은 성공한 사람일까요? 김정은은 돈만 많은게 아니라 북한에서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러면 성공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많으면 성공한 것이고, 원하는 권세를 가졌으면 성공한 것이고, 인기와 명예를 얻었으면 성공한 것이고 유명 강사가 되어 방송 출연도 하고 전국과 외국에 강연을 다니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고, 가정을 파탄나게 하면서 여기 저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까요? 권사님의 아들들처럼 성공의 이면에 진짜로 중요한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인생을 실패한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권력과 인기와 명예가 많아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건강에 힘써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순서없이, 예고없이 사람들을 다음 세상으로 데려갑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도 죽고, 실패했다고 하는 사람도 죽습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예쁘고 멋진 아내, 세상에서 어디가나 알아줄 정도로 잘나가는 남편, 사회 곳곳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녀들, 엄청난 부동산,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살던 사람들도 결국은 다 죽습니다.
스위스 은행에 엄청난 재산을 저축해놓았던 김일성도 그 돈을 다 쓰지 못하고 죽었고, 김정일도 마찬가지이고, 김정은 역시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이들은 성공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아무 가진 것도 없이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공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데도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사고를 당해 평생 걷지 못하고 누워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본인이나 가족중에 불치병을 앓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일까요?
큰 목회하는 사람은 성공자고 작은 목회하는 목사는 실패자일까요? 그러면 반대로 작은 교회 목사는 성공자고 큰 교회 목회자는 실패자일까요? 성공과 실패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기에는 숨겨진 어떤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숨겨진 어떤 것을 찾으셔서 칭찬하시면서 상을 주시기도 하시고, 진노하시면서 심판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성공과 실패를 외적인데서 찾지 말고 겸손하신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참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떤 권사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데 무당 예수를 찾아요!” 이 권사는 땅을 사고 집을 사서 부동산 투기를 하여 돈을 벌면서 예수님께 “이 땅을 사야하나요 아니면 사지 말아야 하나요?”하고 묻는다고 합니다. 특히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찾아가서 계속해서 묻는 것입니다. 이 권사에게 돈을 벌어 재산을 모으는데 꼭 필요한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돈벌이를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부자되게 해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믿음입니다.
전에 어떤 분에게 전도하러 갔더니 그 분이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몸만 낫게 해주시면 교회에 다닐거요?” 그래서 교회부터 오셔서 예수님께 간구하셔야지 어떻게 고쳐주면 교회에 다닌다고 하십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결국 그 분은 나음도 받지 못하고 영생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고쳐주시면 믿을 만한 분이고, 고쳐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교회 밖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지만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과연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번지수가 틀린 믿음도 천국에 들어갈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관을 완전히 뒤집는 행동을 하십니다. 우리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1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과시하는 행동 중 하나가 바로 좋은 차를 타는 것입니다. 국내에서 제일 좋은 차를 타다가 이제는 외제차를 타고, 외제차를 타다가 이제는 외제차 중에서 더 비싸고 좋다는 것을 타려고 합니다. 그게 성공한 사람으로써 과시하고 싶은 사람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사우디나 중동의 부자들 가운데 엄청난 부자들은 세계 최고의 차들을 수십대 사놓고, 그것도 모자라 개인 비행기까지 사놓습니다. 그들의 집에 들어가면 이 세상에서 웬만큼 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쳐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온 세계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나 타고 다니는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타셨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모닝 정도 타셨다고 보면 거의 맞을 것입니다. 모닝타신 예수님이 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시면서 광화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니 온 세계를 다스리실 분이 왜 하필이면 모닝을 타셨데? 적어도 외제차 정도는 타셔야 하는거 아냐?”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가 떵떵거리고 사는 부자들이나 권세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나귀새끼를 타셨습니까? 그 이유는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십니다. 지난 주에도 읽어드렸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이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러분들이 겸손해지려면 먼저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임하셔야 가능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은 노력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 부르심을 받기를 거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 종의 형체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 종의 형체를 가지시기 위해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자기를 낮추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이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을 예수님은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십니까?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또 높임을 받고자 일하는 사람이 낮추면 얼먀나 낮출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낮춘다고는 하지만 마음의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하로는 안 내려 가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 이하로 자신을 낮추려고 하면 금방 화를 내거나 아니면 분을 마음에 삭히거나 마음에 시험을 받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낮추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견딜수 없어 합니다. 이것은 참된 겸손의 마음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을 낮추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고, 자신을 높이시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합니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갖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드리지 못합니다. 모든 선택을 다 자기가 합니다. 물론 자기가 하는 선택이 때로는 좋은 결과가 나올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주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은 진정한 겸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떠나셔서 종의 자리를 찾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아들에게 어떤 일을 해주셨을까요? 빌립보서 2장 9-11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보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선한 일 배후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선한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 이전부터 선한 일을 해오셨습니다. 창조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창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13절을 보면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하고 계십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인간의 창조목적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간이 드러내려 할 때는 겸손함을 통해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잘 드러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을 잘 알고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길을 따릅니다. 그들은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그 상에 참여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그 날 그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찬송하게 됩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억압을 끊고 자유를 얻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9-22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은 창조의 중심성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의 중심성은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일하시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고, 자연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때 하나님이 하신 계획입니다.
그 계획을 흐트러 놓은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그 시험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창조질서의 일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다시 회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며, 여러분은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오시는 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해 이 모든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히 순종하고 복종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어떤 상을 주셨을까요? 다시 빌립보서 2장 9-11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첫 번째 상은 아들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왕이 요셉에게 왕의 보좌 외에 모든 것을 치리할 권한을 준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왕의 보좌 외에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천사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을 예수님은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그들 위에 높이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를 제하고 아들보다 높은 위치에 계신 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권리가 여러분들에게 행해지고, 우리 교회를 통해 행해질 때 그 역사는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는 그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알고 있고, 또 앞으로 알게 될 모든 교회들이나 사람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가 우리 교회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세계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 겸손하고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들을 통해 새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겸손의 무릎을 예수님께 꿇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를 하나님은 높이시고 뛰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마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상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하여 아들을 “주님으로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셔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여러분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구원받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여러분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겸손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능력을 계속적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받아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계속적인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는 한 번 받고 마는 은혜가 아니며 진리 역시 한 번만 주고 마시는 그런 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여러분들에게 계속적으로 임하고 주어지며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6절에서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하시면서 겸손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도 역시 비슷한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러분은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교만한 자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시편 1편 1-2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는 마귀가 있는 교만의 자리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겸손의 자리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취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한 사람이 참된 성공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시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며,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선포하십시오, 그러나 늘 하나님 앞에서의 온유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행하십시오, 미가 6장 8절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고 계심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계 가운데 겸손히 순종하며 복종하신 아들을 높이신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왕권을 허락하셔서 아들의 나라의 왕으로서 왕 중 왕이신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나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받은 우리 제석교회와 온 세계 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