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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구 박사 ⓒ | 얼마 전 이해찬 총리와 뉴라이트 진영 사이에서 가시 돋친 설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이해찬 총리가 11월 8일 서울대 강연에서 했던 발언이었다. 이 총리는 “사회의 발전에 의식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 지체’ 현상이 나타나는데 뉴라이트도 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에 뉴라이트 진영의 대표 논객인 신지호 자유주의 연대 대표는 인터넷에 올린 글을 통해 “다수 국민은 지금 이 총리의 정신지체 현상을 걱정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문화지체와 정신지체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지만, 어쨌든 사회가 발전하면 도처에서 지체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황우석 교수팀 연구의 초반 윤리논쟁도 일종의 지체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지만 생명과학발전에 부응하는 윤리적 규범이나 가치관은 더디게 바뀌므로 과학과 윤리 간에 간격이 벌어져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W.F 오그번(Ogburn, William Fielding: 1886~1959)은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술과 그에 부응하는 문화 간의 격차를 일컬어 ‘문화지체(Cultural lag)'현상이라고 지칭했다. 기술과 같은 물질적인 문화와 정신적인 문화 간에는 변화속도의 차이가 발생하는데, 속도의 차이에 의한 과도기적 혼란이 바로 문화지체현상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차량의 수는 갈수록 늘어나지만 교통질서의식이나 건전한 교통문화가 정착되지 않는다거나 에너지 소비량은 증가하지만 에너지소비문화나 환경에 대한 인식은 뒤처진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문화지체현상이다. 서양의학이 보급되어 일상화되어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민간치료요법 등이 공존하는 것, 인터넷 환경은 발전하는데 익명성을 무기로 하는 저급한 욕설이나 사이버테러가 만연하는 등의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이 사회변화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고 있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기술발전에 따른 문화적 변화는 그야말로 전면적이며 일상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과학연구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과학기술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사회문화적 환경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문화지체현상은 사회병리현상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 기술문화가 정착되야 하고, 과학이 발전하면 과학문화가 과학발전을 뒷받침해줘야 한다. 과학윤리도 과학문화 중 중요한 부분이다. 연구가 발전하면 연구윤리가 동시에 마련돼야 하고 법적, 제도적인 변화도 뒤따라야 한다. 과학연구도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며 과학발전은 궁극적으로 사회문화발전과 같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연구윤리는 이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엄청난 속도의 생명과학기술발전을 뒷받침해줄 과학윤리에 대한 합의의 부재가 연구윤리논란을 야기했던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속도와 기술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대중들에게 문화로서 자리잡는 속도 간에는 시간적 격차가 생기므로 기술발전에 따른 문화지체현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과학자와 대중 간의 의식의 간격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과학과 사회 간의 문화지체현상은 과학발전에서 피할 수 없는 부산물이다. 그 간격을 줄이고 문화지체현상을 더 빨리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바로 과학문화에 있다. 과학기술친화적 사회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르더라도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건실한 문화를 갖고 있다. 성숙한 과학문화는 기술에 따른 문화지체현상을 최소화하는 열쇠다.
문화의 역할은 즉각적이지는 않지만 근본적이다. 과학문화가 과학기술발전의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문화가 필요하다. 과학문화는 때로는 급속한 과학발전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완충기 역할을 하고, 때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속도를 제어하는 역할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