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5년 8월 3일 포스팅하였습니다.
한여름 도심의 폭염을 탈출하여 찾아간 곳은
가창의 수승대였습니다.
처음 계획은 가창에서 지리산의 한신계곡을 찾아 갈려고 하였는데
조금 늦게 출발하여 가창에서 버스로 30여분 거리의 수승대를 찾았습니다.
승용차 없이 대중 교총으로 가창의 수승대를 찾는 일은
여름 휴가철이라는 특수에도 불구하고 교통편이 아주 불편하였습니다.
거창의 수승대를 처음 찾았을 때는
오래 전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당시에 다녔던 교회 학생회에서
여름철 물놀이 행사로 가창의 수승대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인공적인 시설을 많이 해 놓았지만
그 때는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그 때 인솔하였던 학생회 담당 교역자였던 오충기 강도사님은 수영을 하고 젖은 옷을 말리는데
훤히 보이는 바위 위에서 벌거벗고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그후 오충기 강도사님은 몇 년 뒤에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하늘 나라로 갔는데
아마도 집안의 극심한 종교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의 종교적 갈등은
핍박과 박해로 인한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핍박과 박해로 순교하지 않으면.....
영혼의 불구가 되는 처참한 몰골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고난의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뿐입니다.
오충기 강도사님은 설교 가운데
집안의 종교적 갈등을 인내의 믿음으로 많이 교훈하였습니다.
거창의 수승대를 찾을 때마다 오충기 강도사님이 기억나는 것은
고난의 연단이라는 믿음의 소통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창의 수승대를 찾은 것은
그 후 10여년이 지나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 시무하였던 교회서 전교인 여름행사로 수승대를 찾았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거창의 수승대는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수영장으로 쓰기 위해 물을 인위적으로 막지도 않았고
거북 바위 아래 대리석으로 만든 건널목 다리도 없었습니다.
원래 보신탕을 먹지 않았는데
점심 매뉴로 보신탕을 끊여 와서 굶을 수도 없고 특히 담임 목사님의 권유로 처음 먹은 것이 기억납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다양한 사람들과 수승대를 찾았는데
특별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단순한 여름 피서로 물놀이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한여름의 폭염을 피하여 지리산 계곡을 가려다가
거창의 수승대를 찾아 출사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수 많은 피서 인파와 만차로 주차된 차량,
그리고 국제 연극제를 알리는 홍보물로 즐비하였습니다.
오래 전과는 너무나 다른 거창의 수승대는
한여름 피서철에 국제 연극제로 유명한 명소가 되었습니다.
고택을 개조한 연극장은
창조예술의 혼을 불태웠습니다.
오고가는 수 많은 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극 배우였고
인도와 키르키즈스탄과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찾아왔습니다.
거리의 플렌카드는 수 많은 탈랜트와 유명인들이
국제연극제의 홍보대사로 화려한 얼굴 마담을 하였습니다.
거창의 한여름 밤은
수승대의 국제연극제로 지역의 축제장이 되었습니다.
마치 독립 운동의 고장인듯
거리마다 태극기의 물결이 휘날렸습니다.
옛날에 신라와 백제의 경계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거창은
수승대의 탁월한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승대의 이름도 퇴계 이황이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천혜의 비경인 수승대는
거북 모양의 화강암 거북 바위와 요수정과 구연서원, 관수루 등 문화재가 남아있습니다.
또한 거북 바위 둘레에는 이황의 개명시를 비롯하여, 갈천 임훈의 화답시 등
수많은 풍류가들의 시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어
풍류 낭만을 시선의 서체로 즐기는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거북 바위 둘레에 빼곡히 새겨진 퓽류낭만객의 서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거창의 수승대는
천혜의 비경과 옛 고을 문화재의 정취, 그리고 국제 연극제의 창작 예술로
살아있는 지역 축제의 명소로 거듭났습니다.
거창의 수승대는 단순한 한여름의 폭염으로 인한 도심탈출의 피서가 아니라
천혜의 비경으로 느끼는 옛 고을의 전경과 국제 문화 예술의 감흥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거창을 대표화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거창의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창 고등학교입니다.
총신을 다닐 때 심창섭 교수는
거창 고등학교 출신인 것을 아주 자랑하였습니다.
거창 고등학교는 유서 깊은 명문고로
중학교 전교 1등만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로 유명하며 차원이 다른 커리큘럼으로
우수한 학생은 모두 외국의 유명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고
나머지 꼴찌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명문고로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