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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론
- 성실한 삶의 자세와 견고한 신앙의 힘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A.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은 성실할수록 자신을 얻게 된다. 성실해질수록 태도가 안정되어진다.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정신을 자각하게 된다. 하늘 땅 앞에 자기가 엄연히 존재해 있다는 관념은 성실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자각이다.”라고 말했다. 고수부 수필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성실함이 아닐까. 이번에 그는 수필집 11권에 도전한다. 한두 권도 아닌 10권의 수필집을 내고 다시 11권째 수필집을 내는 데는 무엇보다도 그의 성실함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척추 수술로 입원했을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한국문인협회 수필창작과 강의에 결석을 한 바 없는 성실함은 타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B. 플랭클린은 “백 권의 책보다 단 한 가지의 성실한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서 보다 큰 힘이 될 것이다.”라고 했고, G.초서도 “성실함이란 인간이 갖는 가장 고상한 것이다.”라고 했다. F.W.니체는 “자기 자신에게 대한 성실성과 관계없는 위대함이란 나는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들 유명 인사들의 어록으로부터, 그가 성실함으로부터 인격의 고상함과 인생의 위대함을 챙겼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성실로써 내용을 이루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하루하루를 그저 보내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는 내가 가진 그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라야 한다. 고수부 수필가는 뜨거운 인생의 열기를 부둥켜안고 있는 작가로서 삶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있다. 그는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가면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서를 녹여내고 있고, 저층에 ‘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서를 깔고 있으며,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성실한 마인드를 갖고 있다. 적어도 지도교수로서 내가 수년간 봐 온 바 그렇다는 평가다.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는 힘의 작가, 햇살 내리비치는 볕 좋은 날의 행복한 소년 같은 작가다. 말씨와 행동에 품위를 갖춘 수련의 선비 같은 작가다. 여기에 더하여 그에게는 독실한 신앙의 힘이 내장되어 있다. 신앙이란 의견이지만 그 의견은 진리를 함축한 의견이다. H.W. 롱펠로우는 “마음이 반짝이고 소박한 사람은 신과 자연을 믿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진실, 눈물, 소박이 감동의 삼 요소라면, 고수부는 이를 다 가지고 있다. W. 애덤스는 “신앙은 이성의 연장이다.”라고 했듯이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그의 의도 속에 숨어있다. 선과 악을 가려내는, 신앙은 그에게 있어서 인격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앙은 그의 본성에 튼튼히 자리 잡고 있어 어떤 난관에도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말처럼, 그는 신과 영원을 믿는 것에 의하여 악 중에서도 선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토할 수 있었으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수필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에는 반드시 성실한 자세와 아름다운 믿음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신앙’이란 우주와 세계,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한 형태다. J.밀은 “신앙을 갖는 인간은 집단에 있어서의 권력자보다도 이해타산으로 모이는 오합의 아흔아홉 사람보다도 강하다.”고 했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은 그에게 있어서 삶의 핵심이다. 수필의 주제 지향성은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하여 노력해왔던 기저에는 군인으로서 성장해 온 자신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또한 두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작품을 써왔다는 점에서 그의 수필은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수필은 이런 삶을 향한 노력이 미적 형상화 차원으로 고양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수필이 eye-catching factor를 갖지 못하면 11권의 수필집을 펴내려고 시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작품을 통해 그의 문학이 지닌 힘을 확인해보자.
II. 고수부의 수필세계
1. 윤슬처럼 반짝이는 애정의 숨결
공자는 “그 자식을 알지 못할 때에는 먼저 그 아버지를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을 모를 때에는 그 벗을 보아야 하며, 그 땅을 모를 때에는 그 초목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링그레스는 “아버지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아버지답기는 어려운 일이다.”라고 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은 개체 자체가 그 역할을 다 하도록 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성격을 최대로 나타내는 걸 ‘다움’이라고 한다면, 다 큰 딸아이에게 아버지로서 존경받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고수부는 딸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다. A.F. 프레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연의 걸작이다.” 고수부는 든든한 두 딸의 사랑으로 당당한 아버지의 지위를 자랑스럽게 누리는 분이다. 누군가에 의지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다. 고수부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두 딸에게로의 지향성이다. 후썰의 현상학에 의하면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 사랑함과 사랑받음의 귀착지는 두 딸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딸이 있어서 만족해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딸을 향한 절절한 지향성이다.
수필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이란 수필의 마지막 부분,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은 딸 때문에 불행했지만 나는 딸들 덕분에 차디찬 겨울을 견뎌내고 새봄을 맞았다. 말로는 사랑을 속삭였지만 행동으로는 배신당한 리어왕에 비하여 나는 다행히 진심으로 부모를 아끼고 돌보는 딸들을 두었다. 그 점에서 나는 리어왕보다 훨씬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표현이 있다. 이 작품뿐만 아니다. 그의 수필에는 딸에 관한 이야기들이 흥건하다. 이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혜라 하겠다. 상당수 수필들이 딸들의 관심과 효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사랑의 근원,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남다른 가족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이 입증한다. 제목도 멋지지만, 수필도 딸 둘의 효성에 관한 이야기로써 감동을 준다.
이순신에게 남은 배 12척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딸 둘 외에도 그의 곁에는 손자 민석이와 손녀 라희, 그의 수필작품을 읽고 그를 알아주는 찐팬 독자들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책머리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낼 때마다 잊지 않고 정성껏 독후감을 써 주는 몇몇 소중한 독자들이 있어 나는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특히 군 복무 중인 손자 민석이가 보내준 편지는 내 마음을 뜨겁게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필집을 애정 있게 읽어주었고 군에 가서도 열심히 독후감을 써 보냈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명령만 따르는 단순한 군 복무에 사고 또한 마비되어감을 느끼던 중 문학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다시금 할아버지 수필의 열성 팬이 되려 합니다. 수필집을 앞으로 계속 내시길 바랍니다” 손자의 이 진심 어린 글을 보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수필집을 발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니, 손주들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이 대단해 보인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애정’이 필요하다. 고수부의 수필적 정서는 이러한 패밀리즘과 인정투쟁에서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단의 향기라 하겠다. 고수부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모습에는 이런 관계적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성실함과 진솔함이 표현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것이다. 고수부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솔직한 감정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준다고 하겠다.
큰딸이 내 곁에 앉아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이 병원은 면회가 제한되지만, 딸은 특별히 양해를 얻어 내 곁에 남아 병간호를 도왔다. “왜 이렇게 발이 얼음장같이 차요?”라며 내 발을 두 손으로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무려 한 시간을 넘게, 그녀는 묵묵히 내 발을 쥐고 문질렀다. 차가웠던 발에 온기가 서서히 돌기 시작하자, 내 눈시울도 함께 뜨거워졌다. 어린아이 같던 딸이 이제는 장성하여 곧 교감 발령을 앞두고 있음에도, 학교 일정까지 조정해가며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그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주연아, 고맙다.” 그러자 딸이 말했다. “아빠도 저 어릴 때 이렇게 해주셨잖아요.”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정성을 쏟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은혜를 갚으려는 딸의 마음이 나를 더욱 뭉클하게 만들었다. 오후 네 시쯤, 딸은 병원을 떠났다. 면회 시간이 끝났기에 더는 머무를 수 없었다. 나는 혼자 남은 병실에서 수술 후의 고요함을 느꼈다.
- <지옥문> 중에서
수술실을 들어가면서, 단테의 신곡 ‘지옥문’을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가졌던 그는 좁아진 척추 뼈 사이를 벌리고 철심으로 고정한 후, 흘러나온 디스크를 제거하는 수술을 통해 통증의 근원을 제거하고, 두 딸의 케어를 받고난 후, 수술 과정과 그 후의 심정을 토로한 수필 <지옥문>이란 수필을 썼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적막이라도 따뜻하다면, 차라리 괜찮은 것이다. 그는 지옥문 같았던 수술실에 누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 하에서 자신의 곁을 굳건히 지킨 두 딸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불러본다. 이는 두 딸을 무한한 효성의 자식으로 부각시킨다. 이 수필은 수술이라는 상황 제시를 통해 아버지 곁을 지키는 딸 둘의 자세를 반추하는 글이다. 아버지와 두 딸 사이에 담긴 사랑이 긍정과 희망적 인생관과 버무려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수술이라는 일상사의 중대한 실험에서 출발된 사랑이 노정된 이 글에는 아버지를 향한 효의 정서가 풍성하다. 수필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라는 걸 되새겨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순수한 연모와 향기나는 사랑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두 딸이 나를 바라보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중에 작은딸 서연이가 말하길, “언니는 아빠가 휠체어에 실려 들어갈 때 계속 울고 있었어요”라고 했다.’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딸이 함께 서로를 애정하며 아버지를 돌보는 모습이 눈물겹게 읽힌다. 딸 둘의 “아빠, 저 여기 있어요.”라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뜨거운 감동을 안겨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라희가 서너 살 때 우리집에 오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거실에서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무작정 건넛방 서재로 끌고 갔다. 어른들끼리만 놀지 말고 할아버지는 내 친구가 되어달라며 회전의자에 나를 앉히고 마구 뺑뺑이를 돌렸다. 올 때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집 안을 휘젓고 뛰어다니던 아이였는데 중학생이 되어 얌전히 앉아 이모와 이모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라희는 내가 다니는 신일교회의 유치원에 다닌 적이 있다. 내가 본당 예배가 끝난 후 아래층에서 선교회원들과의 친교하는 사이에 누가 뒤에서 살짝 건드린다. 이상하다 싶어 바라보면 귀여운 라희가 아닌가. 나는 반가워 남이 보든 말든 손녀를 번쩍 들어 올려 한 바퀴 휙 돌린 다음 내려놓는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가볍게 들어 올려져 내 품에 안긴 손녀는 병아리처럼 귀여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할아버지 모 하세요’‘뭐 하세요’를 잘못 표현한 그것이 오히려 더 귀여웠다.
- <귀여운 라희> 중에서
이 수필에는 눈물보다 끈적한 손녀 라희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끔찍하게 아끼는 손녀의 애정이 펼쳐져 있다. 사랑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인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손녀의 ‘할아버지 모 하세요’는 관심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아장스망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건조한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라희가 서너 살 때 우리집에 오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거실에서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무작정 건넛방 서재로 끌고 갔다. 어른들끼리만 놀지 말고 할아버지는 내 친구가 되어달라며 회전의자에 나를 앉히고 마구 뺑뺑이를 돌렸다.”던 손녀가 중학생이 되어 이모와 이모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에서 대견함을 느끼는 작가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가족들이 손녀의 진로문제를 격의없이 토론하는 모습이 문학가 집안의 멋을 풍겨낸다.
여기에는 필시 사랑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문학적 체험과 같은 정서적 호응은 문학작품의 서정성을 구성하는 요체다. A. 반 다이크의 말대로 “대리석의 방바닥과 금을 박은 담벽이 가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느 집이든지 사랑이 깃들이고, 우정이 손님이 되는 그런 집이 행복된 가정이다.” J.H.페스탈로치도 “가정의 단란이 지상에 있어서의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 그리고 자녀를 보는 즐거움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라고 했다. 이 작품은 행복한 가정과 민주적 열린 가정생활이 문명의 근본적인 목표이며 모든 노력의 최종적인 목적이라는 걸 말해주고, 독자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 가정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각인시킨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고수부는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내 책상 앞 벽에는 중구청에서 발행하는 신문 표지그림 한 장이 붙어있다. 라희가 어렸을 때 자기 엄마와 같이 중구 독서마당이라고 하는 이벤트 모임에서 책 읽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표지 그림으로 내보냈다. 그 신문의 표지를 오려서 벽에 붙여놓고 손녀가 보고 싶을 땐 수시로 그 사진을 보곤 한다.’는 진술은 둘 사이의 사랑이 최고로 극대화된 부분이다. 오고 가는 사랑의 화음이 감동을 준다. 손녀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손녀의 대견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아이들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큰딸은 학교 일에 늘 바빴지만 주말이나 잠깐의 틈만 나면 병원에 달려와 내 곁을 지켰다. 수술 후 허리를 구부릴 수 없어 일상적인 몸 가누기도 힘든 나를 위해 말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내가 불편해 하는 작은 몸짓도 놓치지 않고 살펴주었으며 한겨울 병실이 춥다고 하자 두툼한 겉옷을 챙겨다 주었다. 또 단백질이 필요하다면서 직접 반찬을 만들어 꾸준히 가져다 주는 정성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큰딸은 책임감이 남달라 아침저녁으로 내 안부를 확인했고 동생에게는 고생한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혼자 집에 있는 아내까지 챙기며 말 그대로 집안의 큰 어른 역할을 해냈다.
-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 중에서
고수부 작가에게는 딸 둘이 있다. 큰딸은 학교 일에 바빴지만 잠깐이라도 틈만 나면 병원으로 와서 그의 곁을 지켰고, 둘째 딸 서연이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입원할 때와 퇴원할 때 운전을 도맡아 해주었다. 수술 당일에도 병원에 왔고 입원하는 기간에도 수시로 드나들며 잔심부름을 해주었다. 퇴원하는 날에도 병원에 일찍 도착하여 퇴원 수속을 밟고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다시 강남 재활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런 딸 둘의 효성을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쓴 것이다. 작가는 딸을 주연으로 등장시켜 딸들의 극진한 애정을 더욱 크게 부각시킨다. 두 딸의 케어 덕분으로 “나는 다행히 진심으로 부모를 아끼고 돌보는 딸들을 두었다. 그 점에서 나는 리어왕보다 훨씬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 라고 고백하는 작가는 스토리 위주의 일상적 이야기에서 에세이로 승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수필의 제목을 멋지게 간접화하였다.
고수부 수필을 이루는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사랑에 대한 지향성이다. 그 귀착지는 두 딸의 효성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아버지를 깍듯하게 아끼고 존경하는 딸로서의 자세가 돋보인다. 한마디로 서로간의 애정이 위 수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괴테는 “왕이건 농부이건 가정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J. 메이시의 말처럼, 인간애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인간의 감화는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손수 실천하고 보여준 것이다. 이 수필의 감상 포인트는 ‘주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만이 행복한 가정이다’라는 것을 살펴보는 데 있다. 눈물보다 끈적한 사랑의 향기와 지혜의 미학이 이 대목에서 투영되어 나온다.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아버지의 병수발을 도와주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자식으로서 최선의 효도가 아닐 수 없다. 일종의 아름다운 복종이요, 순종이다. 여기에는 필시 가정이란 ‘애정집단이다’라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이 작품이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자신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딸 둘에 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다. 이 수필은 화목한 가정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애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후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보면, 세계 속에 가정이 있는 게 아니다. 실은 가정 속에 전 세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고수부의 가정은 두 딸과 아버지의 사랑이 합쳐진 곳이다. 그들이 함께 있는 곳이 아니라 합쳐서 있는 곳이다. 그들이 함께 합쳐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영육이 합쳐서 두 개체가 아닌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그것이 이들의 양심이며, 고수부 가정의 정체다. 한마디로 고수부의 수필적 정서는 두 딸에게서 받은 사랑의 힘에 기반한다고 하겠다.
Ⅲ.
― 성실과 신앙, 사랑의 결로 빚어진 삶의 문학
고수부의 수필을 읽으면, 그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는 형이하학적 제재의 속성을 잘 파악하여 형이상적인 인간의 본질로 나아가는 데 참으로 익숙하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것은 논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안다. 인과율에 의해 삶은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삶의 변증적 법칙을 ‘인생은 뱃길이다’라는 말로 의미화하였다. ‘사랑’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라 하였으니, 그가 중요시하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쩔 수 없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며 사는 길은 주체적 행보라 할 수 있다. ‘외모를 젊게 하려고 흰머리를 염색하듯 마음을 젊게 하기 위해서는 문학이라고 하는 염색약으로 퇴색한 마음을 푸르게 염색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우리 사회의 튼튼한 도덕적 모럴을 구축하게 할 것 같다.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삶의 법칙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의 운명은 신앙생활에 달려 있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난 이래 이것을 위반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믿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고, 구도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작가는 ‘문학이라는 염색약’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
고수부 수필가는 한결같은 성실의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길어 올렸다. 그의 수필은 하루하루를 정성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신앙의 기도문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기록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의 관계는 점점 느슨해지지만, 그는 묵묵히 삶의 본질을 지켜낸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닦는 일이다. 그에게 글은 영혼의 호흡이자 삶을 지탱하는 신앙의 또 다른 형식이다. 성실은 그를 지탱해온 뿌리였고, 신앙은 그 뿌리에 생기를 불어넣는 바람이었다. 글 한 줄, 문장 하나에 스민 정성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걸어온 길의 단단한 흔적을 느끼게 한다. 그의 수필을 읽다 보면 인간관계의 본질이 결국 ‘돌봄과 사랑의 순환’임을 깨닫게 된다. 두 딸과 손주의 손길,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작가의 감사는 단순한 가족 이야기를 넘어 ‘삶의 윤리’로 승화된다. 고수부의 수필은 인생의 소소한 장면 속에서도 절로 고개 숙이게 만드는 따스한 미덕을 담고 있다. 그것은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진심으로 쌓은 문장의 힘이며, 신앙이 일상의 결로 스며든 문학이다. 고수부의 문학은 ‘성실한 하루의 누적이 한 생의 찬미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쓴 모든 문장은 신앙의 숨결로, 그리고 사랑의 체온으로 이어진다.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감사로 마무리하는 그의 태도 속에는 종교적 평온과 인간적 성숙이 함께 있다. 고수부의 수필은 이 시대의 혼탁한 마음을 정화시키는 하나의 영적 언어이며, 진실한 삶의 윤리를 복원하는 작은 등불이다. 그의 글이 오래도록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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