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제7회 전국시낭송경연대회 (지정시 28편)
1.노래여 노래여 / 이근배
푸른 강변에서 피 묻은 전설의 가슴을 씻는
내 가난한 모국어
꽃은 밤을 밝히는 지등처럼
어두운 산하에 피고 있지만
이카로스의 날개 치는
눈먼 조국의 새여
너의 울고 돌아가는 신화의 길목에
핏금진 벽은 서고
먼 산정의 바람기에 묻어서
늙은 사공의 노을이 흐른다
이름하여 사랑이더라도
결코 나 뉘일 수 없는 가슴에
무어라 피 묻은 전설을 새겨두고
밤이면 문풍지처럼 우는 것일까
차고 슬픈 자유의 저녁에
나는 달빛 목금을 탄다
어느 날인가, 강가에서
연가의 꽃잎을 따서 띄워 보내고
바위처럼 캄캄히 돌아선 시간
그 미학의 물결 위에
영원처럼 오랜 조국을 탄주한다.
노래여
바람 부는 세계의 내 안(內岸)에서
눈물이 마른 나의 노래여
너는 알리라
저 피안의 기슭으로 배를 저 어간
늙은 사공의 안부를
그 사공이 심은 비명의 나무와
거기 매어둔 피 묻은 전설을
그리고 노래여
흘러가는 강물의 어느 유역에서
풀리는 조국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내가 띄우는 배의 의미를
노래여, 슬프도록 알리라
밤을 대안(對岸) 하여
날고 있는 후조
고요가 떠밀리는 야영의 기슭에서
병정의 편애(偏愛)는 잠이 든다.
그때, 풀꽃들의 일화 위에 떨어지는
푸른 별의 사변(思辨)
찢긴 날개로 피 흐르며
귀소하는 후조의 가슴에
향수는 탄흔처럼 박혀 든다.
아, 오늘도 돌아누운 산하의
외로운 초병(哨兵)이여
시방 안개와 어둠의 벌판을 지나
늙은 사공의 등불은
어디쯤 세계의 창을 밝히는가
목마른 나무의 음성처럼
바람에 울고 있는 노래는
강물 풀리는 저 대안(對岸)의 기슭에서
떠나간 시간의 꽃으로 피는구나.
2.독도 만세
이근배
하늘의 일이었다
처음 백두대간을 빚고
해 뜨는 쪽으로 바다를 앉힐 때
날마다 태어나는 빛의 아들
두 손으로 받아 올리라고
여기 국토의 솟을대문 독도를 세운 것은
누 억년 비, 바람 이겨내고
높은 파도 잠재우며
오직 한반도의 억센 뿌리
눈 부릅뜨고 지켜왔거니
이 홀로 우뚝 솟은 봉우리에
내 나라의 혼불이 타고 있구나
독도는 섬이 아니다
단군사직의 제단이다
광개토왕의 성벽이다
바다의 용이 된 문무대왕의 뿔이다
불을 뿜는 충무공의 거북선이다
최익현이다, 안중근이다, 윤봉길이다
아니 오천년 역사이다
칠천만 겨레이다
누가 함부로
이 성스러운 금표禁標를 넘보겠느냐
백두대간이 젖을 물려 키운 일본열도
먹을 것, 입을 것을 일러주고
말도 글도 가르쳤더니
먼 옛날부터 들 고양이처럼 기어와서
우리 것을 빼앗고 훔치다가
끝내는 나라까지 삼키었던
그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어찌 간사한 혀를 널름거리는 것이냐
우리는 듣는다
바다 속 깊이 끓어오르는
용암의 소리를
오래 참아온 노여움이
마침내 불기둥으로 솟아오르려
몸부림치는 아우성을
오냐! 한 발짝만 더 나서라
이제 독도의 활화산이 되어
일본 열도는 침몰시키리라
아예 침략자의 종말을 보여주리라
그렇다
독도는 사랑이고 평화이고 자유이다
오늘 우리 목을 놓아 독도 만세를 부르자
내 국토의 살 한 점 피 한 방울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서로 얼싸 안고 부둥켜안고
영원한 독도선언을 외치라
하늘도 땅도 바다도 목청을 여는
독도 만세를 부르자
3.에밀레종 / 김천우
누가 저 사연을 보고
천년의 세월이라고 했던가
골마다 깊어진 여운
산울림으로 되돌아와서
우리네 마음 한 자락
젖어 베게 하는가
한이 깊다면
차라리 혀 깨물어 피 흘리며
죽기나 할 것이지
살아 살아서 흔들어 놓는 너는
이 세상의 무엇을 말함인가
에밀레 에밀레
그 속 깊은 뜻이 어미 찾는 한이라면
저 심산유곡의 소쩍새나 되어
밤마다 울고 웃기나 할 것이지
산 그림자 드리운 서라벌 땅에
추억에 질린 산이 화석처럼 굳어
깨어나지 못할 마술에 걸린 채
이젠 울어도 성숙한 목소리가
안개로 묻힌다.
4.귀촉도 /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 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님아.
5. 그리움
김용오
꽃이 피면 꽃이 피어서 보고 싶고
꽃이 떨어지면 꽃이 떨어져서 보고 싶은 이여.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고 별이 눈 뜰 때까지
늘 문밖을 서성이며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던 어떤 사람의 뒷모습 같은 거.
따뜻한 밥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바라보는 눈앞에 빈 자리 같은거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만나고 싶고
눈이 그치면 눈이 그쳐서 만나고 싶은 이여.
곁에 없는 또는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는
너무나 귀에 익은 정다운 발자국 소리를
나무 뒤에 멀리 숨어서 기다린 죄로
슬그머니 목이 길어진 늙은 사슴 한 마리가
어느 날 말없이 쳐다보는 그 슬픈 눈빛 같은 거.
어젯밤에는 허공의 밝은 달로 떠서 흐르다가
오늘은 또 집 앞의 높은 나뭇가지만을
음악처럼 가만히 소리내어 흔들다 떠나 갈 뿐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거.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잊고 싶고
바람이 그치면 바람이 그쳐서 잊고 싶은 이여.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냥 힘없이 돌아서는
저 담청 빛 바다 같은 거. 내 살아있어 생기는
마음의 물결 같은 거. 그래 바로 그런 거.
6.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장진성 <탈북시인 >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 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그 돈 쥐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 원으로
밀가루 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7. 비화 (飛花) / 신승희
누가 너의 눈물을 아름답다고 했든가
거문고의 선율 같은 몸짓으로
신화의 선녀 같은 옷깃으로
무리 진 나비의 날갯짓으로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아름다운 작별
천 년이 흐른들 너의 마음 어찌 알랴
바람의 냉 혹, 떨고 있는 숨결들
한가락 음률의 신음들을 누가 그리도 아름답다 했든가
허공에서 허공으로 어디로 가서 머물지 몰라도
싸늘한 흙 위에 싸락눈, 너의 이름은 비화(飛花)
숙명은 너를 내몰아 계절의 역사를 만들고
찬 서리 튼 살, 새의 발톱 자국
혹독한 긴 겨울 망울망울 잉태한 산고의 인내를
어찌 그리도 쉽게 보낼 수 있으랴
달무리 지는 저녁 답 파릇이 적시는 빗소리
분홍빛 연정 사월이 걷는 소리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 노파의 기침 소리
애수의 잠기는 어느 시인의 미학적 선율
창백한 노을 앞에 식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차마, 누가 꽃답다고 했든가
너의 이별의 몸부림까지도.
飛花[비화]
바람에 흩어져 날리는 꽃잎
8.삶 / 신승희
폐지를 실은 리어카 한 대가
끙끙대며 가는 둥 마는 둥
오르막길 도로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빵! 빵빵!
그 빵빵대는 자동차 앞에서도
어눌한 동작은 비켜설 줄 모른다.
그는 굽을 대로 굽어서 상체가 없다
둔한 걸음과 하체만 보일 뿐,
백발은 엉성한 폐지에 기댄 채
도시의 매연과 소음을 담고
리어카에 상반신이 실려서 가고 있다
빌딩 모서리엔
상현 달빛 한 줄기 폐지위에 앉아
굽은 등을 만지며 말없이 실려 간다
한 잎, 낙엽 같은 밤
하얀 입김마저 고독을이고 배고픈 저녁
백발 걸음이 쇠사슬처럼 무겁다
저만치서 심청 깊이 파고드는 성당의 종소리
차고 어두운 도로 위에서 살기 위한 가쁜 숨소리
어쩜, 소리 없는 삶의 전투 현장 일지도
황혼 녘, 그의 마지막 텃밭 일지도
아! 살아있으매.......
당신의 굽은 등에서 모두의 등을 본다.
9.논개 / 여현 신승희
한 조각 세월을 베었든가
빛 바래지지 않는 꽃잎
살아, 살아서 휘도는 너의 혼 불은
어두운 밤, 빛의 향연으로 흐르고 있구나.
푸르디푸른 남강 (南江) 저 홀로 솟은 바위
그대 한 잎 꽃잎으로 가을 강에 피었구나.
낙화한 숨결, 한 폭의 치맛자락
그대 숭고한 넋이여
그대 붉은 눈물이여
죽어서 태어난 이름이여
죽어서 살아있는 논개여
저문 노을 아래 스치는 발자취는
은빛 물비늘로 일렁이는 것을
아 서럽도록 노래하는 바람이여
이 세월 억만년 두고 흐른다 해도
그 한 맺힌 설움 어찌 잊힐리야.
10.곰 메 바위 아리랑! / 신 승 희
어둠 속에 전설은 더욱 선명하다
한줄기 영롱한 빛을 따라
전설은 서투른 날갯짓으로
초저녁 흘리는 달빛 아래 퍼덕이고 있다
눈길 닿는 저곳, 영혼마저 걸린 달빛으로 서서
그리워 저물지 못한 저 - 산마루 시루 봉
오백 년 아리랑이 허공에 가슴을 푼다.
웅산 정상에서 흐느끼는 달빛
침묵은 무거워 흐느끼는 볼에 눕고
비련의 아천자, 전설에 감기운채
희끄무레 스치는 작은 바람들
태어난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뚝 솟은 시루 봉이 소리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밤하늘 곰 메가 부르고 있다
조선이라는 태를 두르고 순종의 무병장수
명성황후 백일기도, 한 맺힌 역사가 전설 속에
흐느끼고 있다
곰 메여
한마디 말도 없는 곰 메여
웅산 정상에 묻힌 전설이여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아리랑이여
단 한 번, 흰 바람이라도 붙잡고
곰 메의 가슴을, 풀어놓고 싶지 않은가
명성 황후도, 비련의 아천 자도, 할 배 할 매도
넋이 감겨 우는 거암 시루 봉 곰 메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강물은 흐르고 있다
강물은 흘러도, 저 시리도록 푸른 별들
억만년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
곰 메여, 눈을 뜨고 말이다.
11. 별까지는 가야 한다 /이기철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
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
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
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가 깃든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
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
숲과 나무에 깃들인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데
나는 반생을 보냈다
나는 너무 오래 햇볕을 만졌다
이제 햇볕을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
성사(聖事)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
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는
나는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한다.
12.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 이기철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 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 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 피는 삶이므로
13. 마흔살의 동화 / 이기철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 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챗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수노루 만나면 등성이에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 노루 되어 나는 살겠네.
14.마법의 새 / 박두진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 속 갈피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 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 흐르는 창녀이다가
한 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를 나는 사랑하고 있다.
15.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 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16. 검정 고무신 /한석산
눈 덮인 초가지붕 아랫목 화롯불이 피어나던
뭔가 아련하고 애잔한 느낌의 시절
인생의 길모퉁이서 만난 사람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지쳐 버린 내 마음 아는 이 없어도
진한 그리움에 가슴 저린 보고픔이 이는데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아리 아릿한
나의 인생에 함께 했던 수많은 얼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사는 게 힘들어 잊고 살았던
사랑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묻어둔
검정 고무신 시절 황소보다 못한 찬밥 덩어리 같은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니 사는 게 눈물입니다.
가고 싶은 그 시절 그리움 속 깊은 사랑
내 어린 날 어머니 아버지 지금 나를 보시면
얼마나 만지고 싶고 말하고 싶으실까
울고 싶은 가슴 짓누르는
아픔으로 그려지는 어머니 엄마 보고 싶어요.
지난 인생길에 함께 했던 잊혀진 얼굴이 보고 싶다.
17.어머니의 반짇고리 / 한석산
자식들 땟거리 걱정에 시작한 어머니의 삯바느질
어머니 눈물에 젖은 등잔불 밑에
늘 줄이고 늘이고
바느질하는 모습은 내게 익숙한 삶이었다.
어릴 땐 엄마 하고 부르기만 하면
먹을 것이 나오는 줄 알았다.
불효 심한 자식 걱정에 긍긍하며 살아온 세월
어찌하여 인생길이 그다지도 고단 한가
어머니의 일생은 여자의 일생 같은 시절을 보내셨다.
밥은 먹고 다니니? 밥 잘 먹고 다녀라
아야! 끼니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라, 알았지?
지금은 어머니보다 더 눈이 어두운 아내 곁에서
세상사 엉킨 실타래를 풀고 바늘귀를 꿰 주며
실과 바늘처럼 삶의 솔기 없는
자투리만 남은 천 조각 같은 생을 한 땀 한 땀 시침질한다.
18.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 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19. 자화상 / 유안진
한 생애를 살다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비와 이슬이 눈과 서리가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엉이 우는 이 겨울도 한밤중
뒤꼍 언 텃밭을 말 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행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 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 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 젓갈 맛 나듯이
때 얼룩에 절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착하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살만한 곳이며
떠돌고 흐르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돌아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라.
20.망향가 / 황송문
어매여, 시골 울 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시래기 국 잘도 끓여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낸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길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동지 날 팥죽을 먹다가
문득, 걸리던 어매여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그리버 그리버, 울 엄매 그리버서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속울음 꺼익꺼익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가로 시집오던 울 엄매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 와서는
정화수 축수, 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뜬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었지러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송편을 쪄 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구만리장천에 월매나 시장허꼬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점드락 갈라믄 월매나 시장허꼬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돌아서며 눈물을 감추시던 울 엄매
어매 뜨거운 심정이 살아
모성의 피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 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지나는 기러기도 부르던 어매처럼
나도 워리워리 목청껏 불러들여
인정이 넘치게 살아 볼라요
자운영 환장할 노을진 들녘을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밟아 볼라요!.
21.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 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22.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 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은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언제나 펼치시는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숟가락 높이들고
골고루 나누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앉고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베베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싶다.
23.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이 근 배
새들은 저희들끼리 하늘에 길을 만들고
물고기는 너른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데
사람들은 길을 두고 길 아닌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산도 길이고 물도 길인데 산과 산 물과 물이
서로 돌아누워 내 나라의 금강산을 가는데
반세기 넘게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앞 다투어 길을 나서는 구나
참 이름도 개골산, 봉래산, 풍악산 철따라 다른 우리 금강산
보라, 저 비로봉이 거느린 일만 이천 멧부리
우주만물의 형상이 여기서 빚고 여기서 태어났구나.
깎아지른 바위는 살아서 뛰며 놀고 흐르는 물은 은구슬 옥구슬이구나.
소나무, 잣나무는 왜 이리 늦었느냐 반기고 구룡폭포 천둥소리 닫힌 세월을 깨운다.
그렇구나 금강산이 일러주는 길은 하나 한 핏줄 칭칭 동여매는 이 길 두고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분단도 가고 철조망도 가고
형과 아우 겨누던 총부리도 가고 손에 손에 삽과 괭이 들고
평화의 씨앗, 자유의 씨앗 뿌리고 가꾸며 오순도순 잘 사는 길을 찾아왔구나.
한 식구 한솥밥 끓이며 살자는데 우리가 사는 길 여기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이제 금강산은 길을 묻지 않는다.
24. 石 門 /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여기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우는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렵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지 못 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모 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서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25독백 (獨白) / 이육사
운모(雲母)처럼 희고 찬 얼굴
그냥 주검에 물든 줄 아나
내 지금 달 아래 서서 있네.
높대보다 높다란 어깨
얕은 구름 쪽 거미줄 가려
파도나 바람을 귀밑에 듣네
갈매긴 양 떠도는 심사
어데 하난들 끝간 델 아리
오롯한 사념(思念)을 기폭(旗幅)에 흘리네.
선창(船窓)마다 푸른막 치고
촛불 향수(鄕愁)에 찌르르 타면
운하(運河)는 밤마다 무지개 지네
박쥐같은 날개나 펴면
아주 흐린 날 그림자 속에
떠서는 날잖는 사복이 됨세.
닭소리나 들리면 가랴
안개 뽀얗게 나리는 새벽
그곳을 가만히 나려서 감세
(26)직녀에게 /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나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 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마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은하수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27)철조망에 걸린 편지
이길원
어머니
거친 봉분을 만들어 준 전우들이
제 무덤에 철모를 얹고 떠나던 날
피를 먹은 바람만 흐느끼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총성은 멎었으나
숱한 전우들과 버려지듯 묻힌 무덤가엔
가시면류관
총소리에 놀라 멎은 기차가 녹이 슬고
스러질 때까지 걷힐 줄 모르는 길고 긴 철조망
겹겹이 둘러싸인 덕분에
자유로워진 노루며 사슴들이
내 빈약한 무덤가에 한가로이 몰려 오지만
어머니
이 땅의 허리를 그렇게 묶어버리자
혈맥이라도 막힌 듯 온몸이 싸늘해진 조국은
굳어버린 제 심장을 녹일 수 없답니다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그렇게 마시고도
더워질 줄 모르는 이 땅의 막힌 혈관을
이제는 풀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식어버린 제 뼈 위에 뜨거운 흙 한줌 덮어줄
손길을 기다리겠습니다
무덤가에 다투어 피는 들꽃보다
더 따뜻한 손길을.
(28) 낙 화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결별
셈 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에 슬픈 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