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
물질의 세계 속에서 사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유는 어떻게 물질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가?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정확히 나의 몸이 아니다.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론으로부터 주체성의 등장을 설명할 수 있을까?
1. 존재론적 문제
EBS에서 <빛의 물리학>이란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까지, 물리학의 역사를 꿰뚫는 대단히 흥미
로운 프로그램이었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다.
특히 코펜하겐학파,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중 슬릿 실험 따위가 나오는 양자 역학은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14장에 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지젝이 이전에는 살짝살짝만 인용하던 양자 물리학을 아예 통째로 한 장에 걸쳐 들고 나온 것이다.
양자 역학이 과학자들에게도 어렵다는데 지젝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살짝 의심을 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가려낼 재주는 없다.
여하튼 그런 의미로 이 장을 요약하지 말고 넘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이제껏 정리해 온 것이 아까워 조금만
해볼까 한다.
오늘날 철학적 재사유를 요구하는 과학적 발견은 양자 물리학이다.
양자 물리학과 우주론은 철학적 함의를 갖고 있으며, 철학에 도전을 재기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양자 공식들에 의해 포괄되고 있는 현상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분명히 우리의 일상현실의 일부는 아니지만 이 현상들은 과학자의 상상력이나 담론적 구성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정신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등등의 이와 유사한 사변에 굴복하는 것을 피하려면 무엇
보다 먼저 양자 물리학의 명제들은 오직 복잡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상식적인 존재론과 이 물리학의 역설적 함의들(공시성, 뒤로 흐르는 시간 등)을 상식적인 존재론을 갖고 직접적으로 대결하면서 그러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를 무시하면 뉴에이지의 신비주의로 나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p1604 」
이 작업에는 피해야 할 지뢰도 만만치 않다.
여하튼 우리의 얄팍한 상식으로 양자 물리학과 철학을 엮으려다간 엉뚱하게 도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일단 새기고 시작하자.
2. 실재 속의 지식
상징적 현실과 양자적 원-현실에는 유사성이 있다.
일종의 누빔점이 그것이다.
누빔점 비유는 슈뢰딩거의고양이를 연상시키는데, 지젝은 보어를 옹호하며 코펜하겐 학파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상자의 문을 열고 확인하기 이전에는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으며, 관찰자의 개입과
동시에 파 기능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하나의 현실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이 누빔점을 통해 양자적 원-현실은 보통의 현실로 이행된다.
「상징적 현실의 기본적인 특징은 존재론적 불완전성, 비전체에 있다.
그것은 아무런 내재적 정합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부유하는 시니피앙들’의 다수성으로, 그것은 오직 주인-
시니피앙의 개입을 통해서만 안정될 수 있다.
- 어떠한 상징적 개입 없이도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적 현실과는 분명히 반대로 -아무튼 그렇게
보인다 -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양자적 원-현실 또한 자신을 안정화시켜 일상적 대상들과 시간적 과정들로 이루어진 보통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동적인 ‘누빔점(여기서는 파 기능의 붕괴라고 불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야말로
양자 물리학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결과가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또한 비정합적 원-현실과 그것을 완전한 현실로 구성하는 그것의 등록의 탈중심화
된 작인 사이의 (시간적) 간극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도 또한 현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신과 관련해 탈중심화되어 있다.
그것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등록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p1615」
「개시 또는 은폐의 구조, 사물들은 항상 배경의 일부가 잘려나간, 결코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공백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사실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유한한 지각만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구조이자 사실이다. 아마 바로 거기에 양자 물리학의 궁극적인 철학적 결론이 있을 것이다.
양자 물리학의 가장 탁월하고 대담한 실험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현실 묘사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하며, 불확정적임을 입증하고 있다.
-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의 결과로 간주되는 결여는 현실 자체의 일부인 셈이다. p1621~2」
지젝이 라캉과 헤겔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주장한 비전체, 빗금친 대타자 같은 것들이 양자 물리학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사유된다는 말이다.
「 다시 한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이데거와 관련해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이행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칸트적 초월론의 역사적으로 발본화된 버전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의 역사는 인간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존재의 의미의 시대적 개시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그 자체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궁극적인 한계이다.
-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이미 역사적으로 주어진 존재의 개시를 전제하고 그것 내에서 움직이며, 단지 일어날
뿐인 이러한 개시들의 심연 같은 놀이가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적 함의는 우리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 더 앞으로 나아가 현실 자체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에 의해 설정된 한계는 즉자 존재 자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공백으로부터, 즉 '무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다수의 존재자로 그득한 것으로서의 없음(무)이라는 양자적 개념
의 기저에 깔린 함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현실-그-자체는 없음, 공백이며, 이 공백으로부터 부분적인, 즉 아직 완전히 구성되지 않은 현실의 정황들이
출현한다.
이 정황들은 결코 '전체'가 아니며, 마치 특정한 제한된 관점으로부터만 보일 수 있는(존재하고 있는)듯이 항상 존재론적으로 일부가 잘려나가 있다.
오직 일부가 잘려나간 다수의 우주만 존재할 뿐이다.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백만이 있을 뿐이다.
또는 과감하게 단순화해 정식화해보자면,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한정적인 우주는 제한된 관점에서 볼 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p1622 」
지젝이 선호하는 양자 물리의 이론을 한 번 들여다보자.
「양자 혁명은 여기서 파와 입자라는, 본래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원성
내에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공개적으로) 파에 특권을 부여한다.
예를 들면 파를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입자들을 파들의 상호작용에서의 결절점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에서 파는 입자(또는 입자에 일어나는 것)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보어가 양자물리학은 현상들의 ‘배후에서’ 실질적 토대로 ‘숨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상들을 다룬다
(측정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물’의 물로서의, 실체적인 존재자로서의 출현 자체가 지각을 통한 파 기능의 붕괴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상식적인 관계는 뒤집힌다.
즉 ‘객관적’ 사물이라는 개념은 지각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것인 반면
파의 동요가 지각에 앞서며, 그리하여 보다 ‘객관적’인 셈이다. p1628」
3. 행위자적 실재론
‘행위자적 실재론’은 ‘바라드’라는 철학자(?)의 논리이며, 바라드는 보어의 물리학을 체계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세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 절에서 보어는 바라드를 통해, 바라드는 지젝을 통해 내게 읽히는 셈이니,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보
어가 얼마만큼 보어에 부합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보어의 교훈은 현실이 주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주체인 우리가 관찰하는 현실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보어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과 같다.
「보어는 그러한 입장의 관념론적 전제를 폭로한다.
즉 만약 현실이 ‘저기 바깥에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에 무한대로 접근한다면 -최소한 함축적으로는- 관찰자인
우리는 이 현실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의 외부 어딘가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상의 뒤엉킨 통일(성) 내에는 관찰 주체와 관찰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인 명백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은 모두 현상의 통일(성) 내에서의 우연적인 행위자적 절단에, 단지 ‘주관적’인 정신적 결정이 아니라 ‘구성되며’, 행위자에 의해 구현되며, 물질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 절단에 달려 있다. p1634」
「우주를 전체로 측정하기 위해 측정하는 행위자들이 가야 할 우주의 바깥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에 바깥은 없기 때문에 체계 전체를 서술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그러한 서술은 항상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세계의 한 부분만이 따로따로 자신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다.
세계의 다른 부분은 자신과 구별해야 하는 부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1636」
바라드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그녀가 순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만드는 단락의 원-버전을 양자의 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양자적 우주 자체가 내재적으로 파 기능의 붕괴를 요구하는 것일까?
측정 행위에서 파 기능의 붕괴 문제는 양자적 용어가 아니라 고전적 용어로 정식화 되어야 한다.
「파 기능의 붕괴가 양자역학에서 이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관찰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의해 요구되지만 양자 이론에 의해 예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추가적 가정으로, 양자역학이 정합적인 것이 되려면 그렇게 가정되어야 한다. p1644」
양자 물리학이 제안하는 것은 전체적인 불안정성이 국소적 안정의 토대라는 것이다.
즉 우주 안의 존재자들은 안정적인 규칙들에 따라야 하며, 인과관계의 연쇄의 일부이지만 우연적인 것이
이 연쇄의 총체성 자체이다.
연결도 안 되는 문장들을 몇 가지 나열해 봅니다.
말이 되게 이 절을 요약하기에는 바라스, 보어, 파 기능의 붕괴, 힉스장 까지 너무 많은 것들이 어지럽게
얽혀있습니다.
4. 두 진공
2013년에 힉스입자를 발견했다고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힉스 입자는 뭐지? 검색하다가 좋은 글을 발견했다. 물론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힉스 입자 혹은 힉스장이 궁금하면 여기를 먼저 읽어보자. 그리고 지젝이 설명하는 힉스장과 두 진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다고 더 잘 이해된다는 말은 아니다.
「힉스장은 힘과 입자들이 다르게 행동할지 말지를 규정한다. “스위치가 켜지면” 기본 입자들 사이의 균형은 무너지며, 입자들 사이의 차이의 복잡한 패턴이 출현한다. “스위치가 꺼지면” 힘들과 입자들은 서로 구분이 불가능해지며 체계는 진공 상태에 있게 된다. - 입자 과학자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으며, 종종 그것을 ‘신의 입자’라고까지 언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입자는 라캉이 소문자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이라고 부르는 것, 즉 진공의 균형을 깨뜨리는 원인, 균형을 깨뜨리고 차이를 도입하는 X와 등가물이다. - 간단히 말해 다름 아니라 바로 무(진공, 순수한 잠재성들의 공백)로부터 어떤 것(현실적으로 차이가 나는 입자와 힘들)으로의 이행의 원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p1653」
힉스장 스위치의 on과 off에 따라 두 가지 진공을 설정한다. off 상태가 가짜 진공 즉 모든 힘과 입자들이 구분 없이 순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진공이 가짜인 것은 그 균형을 위해 일정한 양의 에너지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on 상태가 진짜 진공이다. 입자와 힘들은 구분되지만 지출되는 에너지는 0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말하자면 힉스장이야말로 거꾸로 무활동, 절대적 휴면 상태이다. 처음에는 가짜 진공이 있다가, 이것이 방해를 받으면 균형이 무너지면서 진짜 진공 상태가 된다. 모든 에너지 체계와 마찬가지로 힉스 장 역시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데모크리토스의 덴이라는 개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 보다 저렴한 어떤 것’, 무보다 못한 기묘한 전존재론적 ‘어떤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두 개의 무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전존재론적 덴, ‘무 보다 못한 것’의 무와 그 자체로, 직접적 부정으로 상정된 무가 그것이다. - 어떤 것이 출현하려면 전존재론적인 무가 부정되어야 하며, 직접적/명백한 텅 빔으로 상정되어야 하며, 어떤 것은 오직 이러한 텅 빔 내에서만 출현할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없는 것 대신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 행위는 공간을 텅 비우는 것, 무를 창조하는 것이다. p1655」
「이것은 이 두 진공은 또한 대칭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양극성이 아니라 쫓겨난 일자를, 말하자면 자신과 관련해 지연되고, 항상 이미 무너진, 항상 이미 균형이 깨진 일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진공은 항상 ‘가짜’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미 최소 행위와 방해를 포함함고 있는 ‘진짜’ 진공의 균형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 이 두 진공 간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즉 가짜 진공은 단순히 오직 진짜 진공만을 남기는 한갓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그리하여 유일하게 진정한 평화는 부단한 활동, 균형 잡힌 원환적 움직임에만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기각될 수는 없다. - 진짜 진공 자체는 영원히 트라우마적 방해로 남아 있을 것이다. p1662」
5. 덴이 존재한다
‘덴’은 1장의 <일자에서 덴으로> 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의 개념이다. 실재로서의 無 또는 'less than nothing' 이며, 힉스 입자다. “유물론의 근본적 공리는 공백/없음이 (유일하게 궁극적) 실재라는 것, 즉 존재와 공백은 구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절에서 지젝은 “사유는 생각하기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브래지어의 질문을 출발점으로 이 책 전체를 요약하려 한다. 그러니 다 했던 말이란 소리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마치 내가 이미 죽은 것처럼 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멸종된 것처럼 나 자신을 사유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코기토, ‘객관적’ 과학을 지탱하고 있는 분리된 시선의 이러한 0-점이다. 자신을 대상의 일부로,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이처럼 분리된 X, 이 ‘안 죽은’ X가 주체로, 따라서 문제는 정신없이 즉자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 자체의 이 0-점의 ‘대상적’ 지위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주체의 대상적 맞짝, 주체‘인’ 화석이 바로 라캉이 대상a라고 부르는 것으로, 유일하게 진정한 즉자 존재는 이 역설적 대상뿐이다. p1670」
덴은 일자들-보다-못한 것( 무 보다 못한 것)의 전존재론적인 비정합적인 다수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이 즉자 존재를 가리킬 수 있는 유일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후보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물-자체’란 무엇인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답은 이렇다. 즉 오직 이 어떤 것이 무보다 못한 것일 때, 덴의 전존재론적인 원-현실일 때만, 이 원-현실의 내부로부터 일상적인 현실은 ‘객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체의 출현을 통해 나타난다. 일자들의 모든 긍정적 현실은 이미 현상적인 것,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것, 주체와 ‘상호 관련된’ 것이다. p1676」
그렇다면 어떻게 원-현실의 즉자 존재로부터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본래적 의미의 현실로 이행할 것인가?
「주체와 객체라는 쌍에서 즉자 존재는 주체 쪽에 있다. 분열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외적 현실의’)(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대상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에 선행하는) 주체의 이러한 구성적 분열은 주체‘인’($) 공백과 이 주체의 불가능한-실재적인 대상적 맞짝, 즉 순수하게 잠재적인 대상a 사이의 분열이다. 우리가 (실정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의 구성적인 장으로) ‘외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빼기를 통해,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부터 제해질 때 나타난다. - 그리고 이 어떤 것이 대상a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객관적 현실) 사이의 상호관계는 그와 동일한 주체-대상이라는 상관항, 불가능한-실재 대상에 의해 유지되며, 이 두 번째 상관관계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p1677」
이것은 실제로는 실재의 존재론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존재의 실정적 질서의 장은 실재를 빼냄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존재의 질서와 실재는 상호 배제적이다.
또한 실재는 상징적인 것의 효과이다. 상징화 과정은 내속적으로 좌절되며, 실패할 운명인데, 실재란 상징적인 것의 이러한 실패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즉자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닿으려는,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려는 상징적인 것의 실패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는 상징적인 것이 그 자체로서 실패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라캉에게서 주체 자체가 ‘실재의 대답’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즉 주체는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원하지만 실패하며 이 실패가 주체이다. - ‘시니피앙’의 주체는 말 그대로 자신이 되는 것에 실패한 데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상징적 공간 내에서 결과는 원인에 맞선 반응인 반면 원인은 원인의 소급적 결과이다. 즉 주체는 실패하는 시니피앙을 생산하며, 실재로서의 주체는 이러한 실패의 결과이다. p1679」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중에서)
시차, 역동적인 공존 - 지젝의 『시차적 관점』
지젝은 이 책을 스스로 ‘대작’(magnum opus)이라 불렀다.
여기서 ‘마그눔’은 읽기도 전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책의 두께가 아니라, 그가 시도한 철학적 기획의 규모를
가리킨다.
고전예술에서 할리우드 영화까지, 언어철학에서 뇌 과학까지, 칸트나 헤겔에서 들뢰즈와 라캉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지젝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방대한 영역에 걸친 관심은 우리를 당혹케 할 정도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21세기의 모든 지적 성과에 기초하여 새로이 보편적 존재론을 구축하려는 지젝의
야심이다.
‘세계관 철학’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난 것이 아니었던가?
지젝의 목표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구축이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그 이름을 다시 들어보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동안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달고 나타난 지적 유행들은 외려 세계관 철학의 ‘해체’에 전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신의 ‘구축’을 시도하는 지젝의 기획은 무모해 보인다. 그
가 헤겔과 라캉의 이름으로 되살리려는 것이 다름 아닌 ‘변증법적 유물론’이라지 않은가.
이 기획은 무덤에서 돌아온 자(revenant)를 보는 으스스함, 프로이트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억압된 것의
회귀를 보는 ‘언캐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랫동안 변증법적 유물론은 실제로 억압되었다.
단적인 예로 이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조차 지성계에서 금기였을 정도다.
물론 지젝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과거의 형태 그대로 복원하려는 것은 아니다.
헤겔과 라캉에 대한 새로운 독해에 기초하여, 한때 보편철학의 역할을 했던 변증법적 유물론을 새롭게 부활
시키려 한다.
이 새로운 존재론적 기획에 단초가 된 것이 바로 ‘시차’ 개념이다
(지젝은 자신이 이 개념을 가라타니 고진에게서 빌려왔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따라서 이 책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차’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별과 달과 해의 시차
‘시차’(parallax)란 천문학 용어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천체의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굳이 천문학까지 들먹이지 않고 일상에서도 시차를 경험할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비행을 하다가 종종 시차를 경험한다.
조종석 위에 달린 방향계의 바늘 위치는 바늘과 눈금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에 바늘이 정확히 90도를 가리
키고 있어도 왼쪽 좌석에서는 마치 89도, 오른쪽 좌석에서는 마치 91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비행기의 방향을 놓고 옆에 앉은 교관과 번번이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
할 일 없는 수학자라면, 그 각도의 차이를 가지고 바늘과 눈금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낼 것이다.
똑같은 원리가 천문학에서는 멀리 떨어진 천체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사용된다.
천문학에서 시차는 크게 별의 시차(stellar parallax), 해의 시차(solar parallax), 달의 시차(lunar paralax)
세 종류가 있다.
이 시차들은 지구의 공전(연주시차) 혹은 자전(일주시차)에 따른 관찰위치의 차이를 이용해 각각 별과 해와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지젝은 이 세 가지 시차를 자신의 대작을 구성하는 3부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그저 은유에 불과하다.
‘별의 시차’란 존재론적 시차(ontological parallax), 즉 우리가 현실에 접근할 때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차이를 가리킨다.
가령 빛은 파동이자 입자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해의 시차’란 과학적 시차(scientific parallax)로,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현상학적 현실과 과학의 객관적 설명
사이의 차이를 가리킨다.
우리는 뇌 속에 ‘자아’가 있다고 믿으나, 과학의 관점에서 뇌는 그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달의 시차’는 정치적 시차(political parallax)로, 우리는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를 통해
이를 지겹게 경험하고 있다.
안티노미 앞에서
‘시차’란 명칭은 새로울지 몰라도, 지젝이 ‘시차’라 부르는 것들은 예로부터 존재했던 것들이다.
당장 칸트의 ‘안티노미’를 생각해보라.
상반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옳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철학에서 일상적이다.
이 모순을 처리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제안되었다.
하나는 이를 극복하는 것으로, 흔히 ‘변증법적 종합’이라 불린다.
여기에서 서로 대립하는 A와 B가 더 높은 차원에서 C로 합류하면서, 현상의 차원에서 모순으로만 보였던
A와 B의 대립이 본질의 차원에서는 그저 가상(假象)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다.
다른 하나는 아예 종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른바 ‘통약불가능성’ 명제에 따르면, 현실은 원래 다원적이어서
그 안의 다양한 입장들 사이에는 공통 지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억지로 공통 지반을 마련하고 그 위에서 둘을 통합, 화해시키려 드는 것은 ‘동일성의
폭력’이다.
‘포스트 담론’의 다원주의는 대개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이 입장은 사실상 ‘진리’의 추구를 포기한 것으로, 상대주의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지젝의 길은 이 둘 사이, 혹은 이 둘의 모순적 결합에 있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보는 관점의 다원성을 인간의 조건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여기서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로 비약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시차를 가진, 그리하여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시각들을 가지고 하나의
통일적 세계관을 구성하려 한다.
이는 세잔의 화법을 연상시킨다.
세잔은 화폭에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시점들을 도입한다.
하지만 세계가 시점들의 다원성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고, 그것들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
세계를 구축하려 했다.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
지젝이 헤겔의 변증법을 다시 읽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통상적인 독해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든 모순은―‘부정’과 ‘부정의 부정’을 거친 후―결국 가상으로
드러난다.
변증법적 운동의 결과로 모든 모순은 지양되고, 더 높은 차원의 종합 아래 그것을 이루는 계기들로 체계적으로
포섭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시차를 이루는 대상이나 시각의 고유성, 그것들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이 행사하는 동일성의 폭력이다. ‘계급모순을 극복했다’고 선언했던 공산주의 사회의
기만적 화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이 때문에 변증법에서 아예 종합의 계기를 제외시키려 했다.
이른바 ‘부정의 변증법’은 종합을 거부하고 부정만 긍정한다. 물론 오직 ‘부정’만으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 영원한 운동의 과정에서 관점의 다원성을 생성할 수 있을 뿐이다.
아도르노와 같은 모더니스트에게 다원성은 아직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불과했으나, 포스트모더니스트에
이르면 그것은 아예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된다.
다원주의는 결국 철학적 상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지젝이 변증법에 대한 아도르노식 수정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다시 헤겔로 돌아가려 한다. 잘못은 헤겔 변증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통상적
해석에 있었다.
그가 보기에 “스스로를 그 자체로부터 외화시키고 그 타자성 안에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내용을
재(再)전유한다는, 헤겔의 정신에 대한 전형적인 담론은 심각한 오독”이다.
그는 우리에게 헤겔 변증법에 대한 이 통상적 인식을 버리라고 권한다.
“우리가 헤겔의 삼자관계에 대해 논할 때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외화에 대한 이야기와 본래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의 사실과 고차적으로 매개된 통일성으로의 복귀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이다.”
변증법의 재구성
통상적 해석에 따르면, 정신이 자연이 되고 그 자연이 결국 정신으로 드러남으로써 정신/자연, 주체/객체의
모순이 극복된다.
여기서 A-B-A라는 변증법의 여정은 (논리적, 역사적으로) 선형적인 과정으로 설명된다. 이 도식에서 B는
결국 본질이 아닌 현상, 진리가 아닌 가상으로 폭로된다.
지젝은 이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헤겔의 변형은 칸트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 자체로서’ 주장하고 (…) 극복의
필요성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헤겔은 시차를 극복할 필요를 부정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했다는 얘기다.
지젝에 따르면, A-B-A의 운동은 통시적이 아니라 공시적 과정이다.
즉 A였던 것이 B가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A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에서 A와 B는 공존한다.
즉 변증법적 운동이란 ‘본질-현상-본질’(혹은 ‘진실-가상-진실’)의 선형적 운동이 아니라, 본질과 현상(혹은
진실과 가상)의 역동적인 공존을 가리킨다는 얘기다.
현상은 그저 현상이 아니며, 가상은 그저 허구가 아니다.
현상과 가상 역시 본질과 진실만큼이나 본질적이고 현실적이다.
현상과 가상은 극복되어야 할 허구가 아니라, 본질이나 진실과 나란히 존재하며 ‘시차’를 이룬다.
지젝은 이를 “사물은 제 자신의 최상의 가면”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200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람들이 전 경제부장관 카발로에게 항의하기 위해 그가 있는 건물 안으로
난입하려 할 때, 카발로는 가게에서 파는 자신의 가면을 쓰고 성난 군중들 틈을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가짜 얼굴을 벗기자 진짜 얼굴이 드러났으나, 그 얼굴은 가짜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현상과 본질, 가상과 진실은 동일한 현실의 두 얼굴일지도 모른다. 즉 그것은 시차의 문제일 수 있다.
지젝은 잊지 않고 여기에 라캉의 말을 덧붙인다.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갖는다.”
유물론적 신학
변증법에 이어서 지젝은 유물론의 재구성에 나선다.
“주체성에 대한 적절한 유물론적 이론”의 토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워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성했다면,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를 물구나무세워 ‘유물론적 신학’을 구축하려 한다.
여기서 ‘신학’은 물론 반어적 의미를 갖는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지젝이 키르케고르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현실의 장 전체의 급진적인 개방성과 우연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신은 인격화된한 신이 아니다.
“신성은 모든 것의 불확실성이 무한히 사유될 때 현존한다.”
“신은 존재 질서의 너머에 있으며, 그는 우리가 그에 관계되는 양식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신이란 “우리가 (그것을) 근거로 현실의 전적인 우연성을 측정할 수 있는 절대적 타자의 다른 이름”
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신을 비(非)실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의 유물론적 전도를 위해 남은 일은 거기서 ‘신’이라는 말을 떼어내는 것뿐이리라.
“우리는 어떻게 정신적인 초월성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이를 주장할 수 있는가?
답은 정확히 그 외설적 불멸성 속에 지속되는 불사의 (거세되지 않은) 잔여인 대상 a다.”
유물론적 전도를 통해 키르케고르가 ‘신’으로 지칭한 것은 이제 라캉의 ‘실재계’로 해석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라캉에게 ‘실재계’란 상상적 재현과 상징적 표상으로 짜인 체계 속에 온전히 기입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잔여를 말한다.
상상하거나 표상할 수 없는 그곳을, 지젝은 모든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끝없이 정치적 저항을 생성해낼 수
있는 원천으로 간주한다.
희생과 거절
라캉이 인용하는 폴 클로덱의 희곡 「인질」에서 여주인공 시뉴는 자신이 혐오하는 남편 대신에 스스로 총을
맞는다.
죽어가는 그녀에게 남편이 그것이 사랑의 표식이었냐고 묻자, 시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온화한 얼굴을 반복적으로 일그러뜨리는 심한 경련으로 남편과의 화해를 거절한다는 암시를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희생의 전적인 무의미함이다 “남성이 사물(국가, 자유, 명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오직 여성만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또는 남성은 도덕적인 반면 오직
여성만이 진정 윤리적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두 영화 <노스탤지어>와 <희생> 역시 키르케고르적 희생을 다룬다.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이 작동할 수 있으며 효율적이려면, 어떤 측면에서 무의미해야 하며 불합리하고 쓸모없는 지출 또는 의식과 같은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점은 오직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그런 행동만이 어떤 이성적 숙고가 없는 행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현대의 정신적 피폐함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 무의미한 희생의 논리를 하이데거적 전도로 설명하려고 한다.
희생의 궁극적 의미는 의미의 희생이다.”
주인공들의 희생은 그 무의미함을 통해 그 어떤 상징적 질서의 헤게모니 아래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바로 그 때문에 그 희생이 그 어떤 비판보다 더 전복적이고 급진적일 수 있다.
의미를 포기함으로써 그 희생은―‘죽음의 충동’을 마주보는 충격효과를 수반하며―온전히 상징계로 편입될 수
없는 세계, 즉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조건이 되는 실재계의 존재를 불현듯이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포기라는 근본적 행위에 배어 있는 유물론적 전회”다.
여기서 지젝은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저항의 원천을 본다.
(진중권)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 실체 ― 입자와 장, 혹은 전혀 다른 어떤 것?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Scientific American》 2013년 08월호에 실린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Universität
Bielefeld; 2000년에서 2010년까지는 브레멘 대학교 Universität Bremen에서 재직했음) 철학과 마이나
르트 쿨만(Meinard Kuhlmann, 물리철학, 과학철학, 경제물리학, 1967-) 교수의 글 초반부입니다.
이 글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matter)의 근본 속성에 대해 양자장 이론(Quantum Field Theory, QFT)의
견지에서 고찰하는 글인 듯합니다.
물리학자들의 논쟁 ― 세계는 과연 입자와 장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물리학자들은 세계가 입자와 역장(힘마당, force field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지만, 양자 영역에서의
입자와 역장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세계는 그 대신에 색깔과 형태와 같은 속성들의 묶음들로 구성돼 있을지도 모른다.
마이나르트 쿨만(Meinard Kuhlmann)
It stands to reason that particle physics is about particles, and most people have a mental image of little billiard balls caroming around space. Yet the concept of “particle” falls apart on closer inspection. Many physicists think that particles are not things at all but excitations in a quantum field, the modern successor of classical fields such as the magnetic field. But fields, too, are paradoxical. If neither particles nor fields are fundamental, then what is? Some researchers think that the world, at root, does not consist of material things but of relations or of properties, such as mass, charge and spin.
당연한 얘기지만, 입자물리학은 입자에 관한 과학이고, 사람들 대부분은 입자들은 작은 당구공처럼 공간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주 자세히 파고들면 “입자”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입자는 물체(things)가 전혀 아니고 자기장(자기마당)과 같은 고전적 장의 현대적 계승
개념인 양자장(양자마당) 속에서의 들뜬 상태(excitations, 여기勵起 상태, 흥분 상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마당) 개념 또한 역설적이다.
만약 입자도 장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근본적인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우주는 근본적으로 물리적 실체들(material things)로 구성돼 있지 않고 질량, 전하, 스핀과
같은 관계들(relations)이나 속성들(properties)로 구성돼 있다고 생각한다.
Physicists routinely describe the universe as being made of tiny subatomic particles that push and pull on one another by means of force fields. They call their subject “particle physics” and their instruments “particle accelerators.” They hew to a Lego-like model of the world. But this view sweeps a little-known fact under the rug: the particle interpretation of quantum physics, as well as the field interpretation, stretches our conventional notions of “particle” and “field” to such an extent that ever more people think the world might be made of something else entirely.
물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우주가 역장(힘마당)을 통해 서로 밀고 당기는 아주 작은 아원자 입자들로 만들어졌다고 기술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입자물리학”, 그 연구 장치를 “입자 가속기”라 부른다.
그들은 레고 블록 같은 우주 모형을 믿는다.
그러나 이 우주관은 덜 알려진 미지의 사실들은 덮어버린다.
즉 양자물리학의 장 해석뿐만 아니라 입자 해석에 따르면 “입자“와 “장”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 개념은 우주가
입자나 장과는 완전히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한층 더 유력한 생각으로 확대되는데,
이에 대해선 말이 없다는 것이다.
The problem is not that physicists lack a valid theory of the subatomic realm. They do have one: it is called quantum field theory. Theorists developed it between the late 1920s and early 1950s by merging the earlier theory of quantum mechanics with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Quantum field theory provides the conceptual underpinnings of the Standard Model of particle physics, which describes the fundamental building blocks of matter and their interactions in one common framework. In terms of empirical precision, it is the most successful theory in the history of science. Physicists use it every day to calculate the aftermath of particle collisions, the synthesis of matter in the big bang, the extreme conditions inside atomic nuclei, and much besides.
문제는 물리학자들에게 유효한 아원자 영역 이론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 그들에겐 양자장(양자마당) 이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이 있다.
이론가들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 사이에 양자역학의 초기 이론에 아인쉬타인(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통합해 양자장 이론을 개발했다.
양자장 이론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에 개념적 기반을 제공하는데, 그 표준 모형은 물질의 근본 구성 요소들과 그 상호작용을 하나의 동일한 틀 속에서 기술한다.
실험적 정확성에서 볼 때, 그것은 과학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론이다.
물리학자들은 그 모형을 이용해 입자 충돌의 결과(여파), 대폭발(big bang) 이론에서의 물질의 합성, 원자핵
내부의 극한 조건들,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손쉽게 계산해낸다.
So it may come as a surprise that physicists are not even sure what the theory says—what its “ontology,” or basic physical picture, is. This confusion is separate from the much discussed mysteries of quantum mechanics, such as whether a cat in a sealed box can be both alive and dead at the same time.
This article was originally published with the title What Is Real?.
그럼에도 놀랄 만한 사실은 물리학자들이 그 표준 모형 이론이 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즉 그것의 “존재론”이나, 그것이 그리는 근본적 물리 세계의 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상태는 밀봉된 상자 속의 고양이가 삶과 죽음의 상태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논란이 무성한 양자역학의 신비들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은 원래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Scientific American August 2013 Issue
Source: Pdfmagazin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