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입구다. 주택가로 통하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큰 야채가게가 좌우로 진을 치고 있다. 사시사철 색다른 과일과 연한 푸성귀들이 즐비하다. 야채가 주종이긴 하나 생선도 종류별로 한 몫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각종 떡까지 한 쪽에 꽃단장으로 얹혀 있다. 노인들이 요깃거리를 고르느라 기웃거린다. 물가가 올라 불경기라지만 북적대는 손님들로 여긴 딴 세상이다. 생존의 기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곳은 아침 아홉시 전에 벌써 손님들이 계산대 앞에 줄줄이 서서 진풍경을 이룬다. 뒤늦게 문을 여는 시장의 중심 통로 보다 오히려 판세가 더 넓다. 질 좋은 물건을 선점하려는 아낙네들이 눈을 반짝이며 부지런히 총총걸음을 놓기 때문이다. 하루에 소비되는 물량이 많다 보니 가격도 다른 곳 보다 조금 싸다. 하여 나는 이곳을 속칭 ‘싸전’이라 부른다. 빈 박스는 박스대로 골목에 층을 이루고 차는 차대로 혼잡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느라 도로는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오늘 역시 이십대 초반도 안돼 보이는 앳된 총각들 칠팔 명이 이리저리 바쁘게 동동거린다. 그 중 서너 명이 빨간 바구니에 청오이를 담아 진열하느라 분주하다. 이 시각이면 잠이 쏟아질 나이가 아닌가. 벌써부터 생활전선에 뛰어 든 걸 볼 때면 마음이 짠하다. 그러니 솜털 보송한 옆얼굴을 다시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잘 익은 조롱박같이 반듯한 이마. 마늘쪽을 얹어놓은 듯 위로 톡 솟은 콧날. 아직 수염자리도 여물지 않은 망고처럼 갸름한 턱. 생김새는 각양각색일지라도 누군가의 귀한 아들임에 틀림없다.
그들 중 네모난 체격에 얼굴이 단단해 뵈는 노총각 하나가 무리를 이끄는 모양이다. 저 만치에서 들어도 골목이 떠들썩하리만치 목청껏 사람을 끌어 모은다. 옆집과 경쟁이 심하니 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이들은 시장 중앙통의 상인들이 개시를 하기 전 한시 바삐 물건을 팔고 점심때가 지나면 슬슬 파장의 기운으로 들어선다. 그러니 싸전은 늘 이른 아침부터 파는 자와 사는 자들의 각축장이다.
평소 웬만한 생필품은 대형마트에서 주문배달을 이용한다. 반듯반듯 질서정연한 마트야 정갈해 뵈지만 어째 사람 사는 속맛은 영 풍기지 않는다. 평생을 도시에 살았어도 좀체 익숙해지지 않으니 나도 참 별난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생동하는 자본주의가 더 살맛나는 세상이고 보면 사람은 자고로 어우러져야 인간답다.
지난밤 늦게까지 잠자리를 궁싯대다 “카톡” 소리에 그만 감았던 눈이 열렸다. 시공간이 캄캄한데 불빛 속에 까맣게 떠있는 글자. “엄마, 오이지!” 보나마나 아들 녀석이다. 순간 날이 더워지고 있구나 싶어 잠이 더 훅 달아났다. 아삭한 오이지 찾는 걸 보니 출출한 모양이다. 아마도 피곤하거나 입맛이 떨어진 게다.
어미 된 자가 이를 보고 눈 감기엔 나도 그리 굼뜬 성격이 아니라 탈이다. 바쁘다 보니 잠시 계절감을 잊었나 싶기도 하다. 이런고로 재바르게 움직여본 것인데 총각들의 청오이가 눈길을 확 잡아끈 것이다. 이미 길 건너 대형마트에서 생필품들과 오이 한 접을 주문해 놓고 지나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전의 총각들은 늘 눈언저리에 맴도는 이슬처럼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만든다. 지금쯤 학교에 있어야 할 나이건만 세상이 녹록치 않음을 비추는 거울 같기만 하다. 소녀처럼 가냘픈 몸을 지닌 끄트머리의 총각은 더욱 안쓰럽게 다가온다. 그는 딸기와 토마토 담당이다.
저 나이 때의 나도 그 못지않게 스산한 마음 밭을 거닐었으니 적잖이 동병상린이다. 세상이 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마주한 시기였으니 말이다. 고교 졸업과 대학입학 사이에서 아버지의 부도는 쓰나미처럼 내게 덮쳐왔다. 그때 홀로 겪어내야 했던 심적 부대낌은 바람받이 언덕을 통째로 안고 구르는 심정이었다.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분할하듯 나의 정신세계와 자존감을 한꺼번에 양분했다. 삶의 회오리바람은 느닷없는 폭풍우처럼 고통과 좌절을 동반한 채 내면을 뒤흔들었다. 송두리째 뿌리 뽑힌 나무 하나가 밀물에 쓸려가듯 허둥댔다.
그때의 울적함을 삭이기란 어찌 그리 힘들기만 했을까. 마치 울음보가 터진 것처럼 구석구석에서 훌쩍거렸다. 아무도 몰래 눈물을 흩뿌리고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휘적휘적 걸음걸음이 휘청거렸다. 영혼을 잃은 빈껍데기같이 종종 멍해져서 빈 하늘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살아야지, 살아가야지.’ 씁쓸하게 되뇌이다가 첫 직장에 출근하면서 마음을 오지게 먹었다. ‘나는 나야. 지금 대체 뭐하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주문을 외듯 이른 아침마다 속다짐을 두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4년제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나의 투쟁도 누구보다 녹록치 않았다. 그만큼 뿌듯함도 컸다.
저 또래들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내 모습이 겹쳐지곤 해서 유심으로 돌아가곤 한다. 힘든 시기를 건너고 있을 마음자리가 왠지 조곤조곤 읽히곤 해서다. 생각 하건데 젊음이 시리게 흘러가는 것을 슬퍼만 할 일은 아니다. 고난을 뚫고 온 자가 고통의 무게를 이기는 법이다. 내 안의 슬픔을 간직해 본 자라야 기쁨의 크기도 안다. 그들이 맞이하는 삶의 농도와 깊이는 무늬를 이루지 않고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들과는 결이 다르다. 굴곡을 지나본 자들의 생활방식은 확실히 좀 더 알차고 어딘가 내밀하다. 우리가 가는 길 위에서 쓸데없는 헛짓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알게 된다. 자신의 심사를 잘 어루만지는 자가 먼 훗날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는 것을.
싸전은 아직도 싱싱한 청오이를 담아내느라 손길이 바쁘다. 어린 총각들 사이에 서서 가만히 입을 연다. “두 바구니 담아 주세요!” 라고. 누군가 양손으로 바구니를 번쩍 들어올린다. 언젠가 날아오를 날갯짓 마냥 두 팔이 사뭇 힘차다. 오늘은 집안에 오이가 풍년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