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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일시적 회개
삼상 24:16-22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삼상 24:16-22 / 이제 저는 우리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옳은 편에 서 있는가를 여호와께서 판결해 주시기만 바랄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억울한 이 사람을 위해 직접 싸워 주시고, 제가 옳다는 것을 판결해 주시기 바랄뿐입니다.' 17) [자신의 죄악을 인정한 사울] 다윗이 말을 끝마치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말 네 목소리냐?' 하고 묻더니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18) 그러고나서 그는 다윗에게 이와 같이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였다. `네 말을 듣고 나니 정말 부끄럽구나. 나는 네게 그토록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너는 언제나 내게 잘 대해 주었다. 19) 너는 내게 언제나 좋은 일을 하였고, 특히 오늘은 그것을 내게 직접 보여주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 주셨으나 네가 나를 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20) 도대체 어느 누가 자기 원수를 손아귀에 넣고서 다시 살려 보내겠느냐? 세상에 그러한 일을 어느 곳에서 다시 볼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너는 오늘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 상을 여호와께서 네게 내려 주실 것이다. 21) 나는 이제야 네가 왕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를 하여라. 네가 왕이 되면 나의 후손들을 죽이지 않겠거니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리지도 않겠다고 맹세하여라!' 22) 다윗이 그대로 맹세하자 사울은 조용히 왕궁으로 돌아갔고 다윗은 자기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엔게디 산성의 도피처로 다시 올라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과 형편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뜻을 생각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사울 왕이 망가지고 있는 원인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6-19) 다윗의 말과 선처에 사울 왕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목놓아 울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여”라고 말하던 다윗에게 답하듯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실제 사울 왕과 다윗의 관계이어야 했습니다. 사울 왕은 미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이새의 아들”이라고 다윗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잠시나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윗은 자신의 아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있는 골리앗과 막힌 죄악으로 훼손되지 않았다면 다윗과 사울은 이스라엘을 위해 참 좋은 동역자요, 선임과 후임이 되었을 것입니다.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기도 했고, 사울이 악한 영에 시달릴 때에도 다윗에게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친아들 요나단과도 애절한 형제애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경쟁심과 주변의 못된 모략꾼들에 의해서 관계가 망가졌습니다. 마음의 작은 틈이 관계 전체를 망가뜨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이 자신보다 의롭다고 인정합니다. 시기와 증오로 가득 찼던 자신과 의와 믿음의 기백을 보이는 다윗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울에게 승리하고 있습니다. 무력이나 폭력, 모략을 쓰지 않고 의와 예, 사랑과 인내로 승리한 것입니다. 사울은 비록 자신은 여호와께 버림을 받았지만 이 순간 만큼은 진심으로 다윗에게 여호와의 축복을 빌어줍니다.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20-22) 사울 왕은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놓았던 진실을 토해놓습니다. 이미 요나단이 고백했던 내용입니다(삼상 23:17). 그것은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윗에게 자비를 구합니다. 사울의 이러한 호소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져가는 극적인 전환이 됩니다.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은 육적인 직책을 떠나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지만 은혜와 인내와 의로움으로 일어서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워 가십니다. 사울은 군사들을 돌려 철군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가지는 은혜는 잠시의 것이었습니다. 끝끝내 그는 돌이켜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합니다. 그 암시가 본 단락에서도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감동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감동이 안개처럼 사라지자 다시 다윗을 추격합니다(26장). 한 순간의 감정으로 고백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는 낮은 마음에서 회개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후회나 반성과 회개는 일어나는 과정이나 열매가 완전히 다릅니다.
적 용 : 다른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좋은 관계를 망가뜨린 경험이 있습니까? 이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극심한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것이 진리처럼 보이지만 우리 모두가 다 잘 살기 위한 길은 서로 남을 잘 살게끔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신 예수님 같은 분도 있지 않습니까!!!
< 설 교 >
양심의 소리가 부를 때
삼상 24:16-22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윗의 입장에서 사울을 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의로운 다윗을 핍박하는 악인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딸의 남편이고 아들의 친구이며,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인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전국에서 무예가 출중한 용사들 삼천 명을 뽑아서 광야로 도망친 다윗을 추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늘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런 판국에 다윗 한 사람 잡는다고 주력부대를 출동시키는 것이 제 정신 있는 왕의 할 일입니까?
이것이 다윗의 입장에서 본 사울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뭐라고 항변을 할까요?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행동이 이해될 수 있을까요? 재판을 하면서 원고의 말만 듣고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피고의 말도 들어봐야 합니다. 두 사람이 다투었을 때 한 사람이 말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백 번 옳고 상대방이 나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백 번 옳고 이 사람이 나쁘지요. 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옳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싸움이 성립되겠어요? 자, 어쨌든 사울의 입장을 들어봅시다.
사울은 첫 번째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으로 한다는 것은 몇 배나 더 어려운 법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늘 짓밟히곤 했습니다. 또 민족도 열두 지파로 나뉘어져 있어서 지파간의 경쟁이나 갈등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이 된 사울은 나라의 제도도 새로 만들어야 했고, 모든 지파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이스라엘로 만들어야 했고, 또한 무엇보다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했습니다. 사울이 출중하고 뛰어난 사람이기는 했지만, 처음 해 보는 왕의 역할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 번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왕이 된 사울로서 가장 큰 어려움은 선지자 사무엘과의 관계였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는 사무엘이 나라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가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사울로서는 사무엘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왕권을 확립하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엄연히 왕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달려가는 것은 왕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사울이 사무엘과 처음으로 부딪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여호와께 제사 드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군사들이 전쟁에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투가 임박했는데 제사를 드려야 할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동요하고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시작도 못하고 패배로 끝날 판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오지 않아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패한다면, 왕이 왜 있습니까? 왕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그래서 사울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선지자가 없으면 왕인 자기가 대신해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도착해서는 망령된 짓을 했다고 책망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시간 맞춰 일찍 오든지, 늦게 왔으면 아무 말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에요?
사울이 사무엘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은 아말렉과 전쟁을 해서 대승을 거둔 후였습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챙기는 것이 승리의 보상이었습니다. 왕까지 사로잡을 만큼 큰 승리였으니까 전리품도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아말렉의 모든 사람과 심지어는 모든 짐승까지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전리품을 보니 다 없앤다는 것이 너무 아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들을 조금 남겼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와서 보고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고 노발대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이 사건 이후로 사울과 사무엘은 다시 만날 일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갈라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와 갈라섰다는 것은 사울로서 큰 부담이었습니다. 사무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왕권을 확립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장 큰 후원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비록 왕은 사울이지만, 사무엘은 왕을 세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킹메이커란 말이에요. 이 킹메이커가 왕에게서 돌아서면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사무엘에 대한 백성의 신뢰가 높기 때문에, 그만큼 백성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참 왕도 못해 먹을 노릇이네요.
사울이 다윗을 만난 것은 여러 모로 곤경에 처했을 때였습니다. 사울과 결별하면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왕을 버리시고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후로 사울은 그 생각만 하면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하프 연주자를 찾아오라고 했는데, 다윗이라는 젊은이를 데려온 것입니다.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면 사울을 괴롭히던 악령이 물러가고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하고 있을 때, 다윗은 사울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적군에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나와서 싸움을 거는데, 아군에서는 그를 맞설 상대가 없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지면 나라도 망하고 사울도 죽거나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울의 운명이 걸린 전투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적장과 싸우겠다고 나가서는 단번에 그 거인을 쓰러뜨려버린 것입니다. 한 순간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재가 절실했던 사울로서는 다윗을 얻은 것이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 후로 다윗이 앞장서기만 하면 무슨 전쟁이든지 이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초고속 승진을 해서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사울도 다윗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모든 백성의 관심과 사랑이 다윗에게 집중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에게 집중되던 백성들의 마음을 뺏어오기 위해 그렇게 싸워야 했는데, 죽 쒀서 개 준다고, 고스란히 다윗에게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더욱이 다윗이 사무엘보다 더 위협적인 이유는, 사무엘은 과거의 권력이지만 다윗은 미래의 권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음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이크와 권력은 한 번 잡으면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노래하라고 시키면 못한다고 빼던 사람이 일단 마이크를 잡으면 한 곡으로 안 끝냅니다. 처음에 왕이 되라고 했을 때 사울은 두려워서 숨었어요. 꼭 내가 왕이 되어야 합니까? 이런 것 안 하고 내 인생 조용히 살면 안 될까요?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 사람들 시키시죠.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 세계에 들어가서 조금 익숙해지면 그것을 잃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인기가 많은 연예인들은 날마다 행복할 것 같지요? 천만에요. 날마다 피가 마릅니다. 사람들의 환호, 모든 사람들의 사랑, 최고의 인기, 이런 게 너무 좋다 보니, 언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도 공존하는 거예요. 권력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일은 그 권력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권력을 지키는 일에 그 권력을 사용합니다. 국가에서 가장 큰 죄는 반역죄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요.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백성들로부터 인기도 많은 다윗을 보고 사울은 당연히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윗을 죽여 없애는 것뿐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헤롯이 어떻게 했습니까?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사울로서는 다윗이 결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죽든가 아니면 사울의 왕조가 끝나든가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악한 사울이 의로운 다윗을 핍박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사울과 다윗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이 없잖아요. 근대 이전의 절대군주에게는 왕이 곧 국가입니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국가의 모든 자원이 왕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니 사울이 최정예 부대를 동원해서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을 잡으려고 왔다가 오히려 사울이 다윗에게 잡힌 꼴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더라면 사울의 목숨은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뒤따라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화장실이 급해서 동굴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사실은 그 동굴에서 자기 목숨이 오락가락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사울은 아마도 간담이 녹아 내렸을 것입니다. 다윗을 잡겠다고 추격할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그러면서 통곡을 합니다. 다윗에게로 향하던 시기와 증오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사울이 소리 높여 울었다는 것은 그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권력이란 게 뭔지 왜 그것 때문에 다윗과 이런 험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문제만 아니면 다윗과 함께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사울이 악령에 시달릴 때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면 사울의 마음이 다시 상쾌해집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라서 뭐든지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윗은 사위 아닙니까? 똑똑하고 잘난 남의 집 자식을 내 아들 삼는 방법이 사위 삼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다윗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놈의 권력이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죽여야 하는 험한 관계가 되었으니, 그렇게 잃어버린 행복을 어디 가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도 그럴 때가 많아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잘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 어떤 것이 문제가 되어가지고 서로 등을 돌리고 불편하게 살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자리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요. 대표적인 케이스가 서로 마음이 맞아서 무슨 일을 함께 하다가 깨지는 경우지요. 덜 중요한 것 때문에 더 중요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살려준 것을 안 사울은 다윗의 정직하고 의로운 모습에 감동과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과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울은 뒤틀려버린 그들의 관계를 한없이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에 대한 시기와 증오, 의심 같은 것은 다 사라지고, 다윗의 신실함과 의로움에 대해 고마운 생각만 듭니다. 그러니 그를 축복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다윗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완전히 투명하고 정직하게, 아무것도 감추거나 속이지 않고 말합니다.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사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그것 아닙니까?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바로 다윗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진심을 털어놓는 것을 보니까,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면서 왜 사울은 기어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게 우리가 많이 하는 실수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인정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그게 옳은 줄은 알지만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분명히 사울에게 선언하기를,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사실이 비밀로 남아 있었는지, 아니면 소문이 퍼졌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다윗에게 나타나는 객관적인 증거들로 볼 때 누구나 그가 왕이 될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도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았단 말이에요. 요나단도 다윗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삼상 23:17).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정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울이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는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다니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순간에 하늘로부터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가시채라는 것은 소가 쟁기를 끌 때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뾰족한 쇠로 만든 가시를 채찍에 박아 소 뒤에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소가 말을 잘 듣고 앞으로 가면 괜찮은데, 말을 안 듣고 뒷걸음을 치면 가시에 찔립니다. 그런데 성질이 고약한 소는 자꾸 찌르는 가시를 뒷발로 찹니다. 그럴수록 가시에 더 찔리는 것이지요. 헬라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이 속담의 의미는 신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며,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이야말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하나님의 뜻에 맞서서 끝까지 가시채를 뒷발질했던 어리석은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향하여 소리를 높여 우는 사울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듭니까? 아하, 사울이 회개하고 마음을 고쳐먹을 모양이구나. 이제 사울과 다윗이 화해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가고, 다윗도 자기 요새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사울과 다윗 사이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만일 사울이 정말로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윗을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갔어야 할 것 아닙니까?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나 사울은 끝까지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을 고마워하고 그의 의로움을 칭찬하지만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아요. 사울이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사울은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너는 의롭고 나는 악하구나.’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다윗이 더 의롭기는 하지만 사울 자신도 잘못한 것은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그 꼴을 눈 뜨고는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다윗이 왕 되는 것을 끝까지 저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딱 사울에게 적합한 말 아닙니까?
다윗은 자기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울에 대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다윗의 자비 앞에서 사울의 걍팍한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축복하고 다윗이 왕이 되거든 자기의 후손을 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합니다. 그 정도까지 갔으면 좀 더 나가서 회개하고 마음까지 고쳐먹었어야지요. 그런데 마지막 한 걸음 더 가는 것은 기어이 거부함으로써 그는 회개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습니다. 조폭들도 자기들이 한 나쁜 짓에 진저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때뿐이지 또 나쁜 짓을 하는 세계로 돌아갑니다. 영화 트로이에서 그리스 최고의 용사 아킬레우스는 밤마다 자기가 죽인 사람들이 나타나는 악몽을 꿉니다. 그러나 낮이 되면 여전히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심의 가책이 회개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를 거부하면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회개해서 다윗과 화해하고, 자기가 아는 대로 다윗이 왕이 되도록 왕위를 물려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의 결말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가 왕으로서 버림을 받았을망정 그의 인생까지 버림받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다가 인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됩니다.
우리가 다윗을 보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을 배운다면, 사울을 보고 그와 같이 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고집이 우리를 망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고집부리며 버티다가 쓸데없이 고생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서 양심이 소리칠 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