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61
12월1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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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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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y8MExTwqgI (이건욱 클레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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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사야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는 크게 전례의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1월 28일~12월 16일까지가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고, 12월 17일~24일까지가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의 전례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깨어 기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반면 후반전의 전례는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전반기 매일 미사 첫 번째 독서는 이사야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 ‘예언자들의 왕’으로 손꼽히는 이사야는 기원전 765년에 태어나, 742년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으며, 700년대 신앙과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동과 우여곡절의 시절, 갈팡질팡하던 백성들에게 희망과 격려의 언어로 위로했던 참 예언자였습니다.
40여 년간 예언자로서 백성들의 영적생활을 동반했던 그의 메시지 핵심주제는 주님을 향한 백성들의 불충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결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듣기 좋은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힘든데, 가슴을 후벼 파는 ‘지적질’과 듣기 싫은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니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를 가장 세밀하고 밝히고 계시한 예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를 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메시지가 얼마나 참되고 강렬했으면 예수님께서도 즐겨 읽으셨고 인용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안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인생 드라마 각본의 원본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각본에 따라 당신의 인생을 장엄하게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은 너무나 신랄하고 강렬해서 청중들의 가슴을 칼로 후벼 파는 느낌을 줄 때가 많았는데, 다른 한편 마냥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백성들을 달래고 격려하며 신속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가 그렇습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야서 25장 6~8절)
보시다시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건드렸고, 삶을 변화시키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사야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름 위의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이 삶의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아파했고 살았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언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언어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동료 인간으로서 건네는 희망과 생명의 언어, 위로와 격려의 언어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말씀에는 허점이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을 실제 삶에서 살고 계시니 그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넘칩니다.
교황님께서 매일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종을 울려 삶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시대 여타 수많은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빈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 대한민국 사회는 어쩌면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시절과 비슷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또 다시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깜’도 안 되는 이, 정말 파렴치한 이, 어쩌면 그렇게 얼굴 두꺼운 이까지 나서서 스스로를 향해 적임자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서슬 퍼랬던 이사야 예언자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우리나라입니다. 사심이나 자신의 안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사람, 그저 이 나라 이 백성이 삶의 전부인 그런 지도자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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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UyDNVgTMX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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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을 멈출 때 사랑도 멈춘다>
오늘 복음은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이 이뤄진 곳은 갈릴래아 부근의 산입니다. 산이기는 하지만 ‘광야’로 표현된 것을 보니 척박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집에 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갈릴래아 부근이라면 사실 조금만 가면 동네가 나오는 곳이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이리 광야에서 머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진리를 깨우쳐주시고 심지어 배고픔까지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본인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야 주님과 오래 머무를 수 있고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해 주시는 기적들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런 축복을 얻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기적 바로 위에 예수님께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무작정 병자들을 데려왔고 예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산으로, 광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은 어쩌면 엄청난 모험입니다. 도전입니다. 이들이 안식의 빵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가 마태오는 바로 이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그 먼 곳까지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영화 ‘코다’(2021)는 루비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한 고등학교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루비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부모님과 오빠의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바로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일이었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아서 인부를 쓸 수 없었고 루비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무전을 받을 한 사람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생선 냄새가 난다고 왕따를 시킵니다. 하지만 루비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따라 합창부에 들어가려 합니다. 합창부 선생님은 매우 엄격하신 분이고 친구들이 쳐다봐서 루비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서 음악부에서 노래합니다.
루비의 음악 실력을 알아본 선생님은 자신의 모교인 버클리 음대에 도전해보자고 합니다. 대학 갈 돈이 없다고 말하니 장학금을 타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비는 집안일과 음악수업을 병행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혼나고 저기서도 혼이 납니다. 하루는 배에 함께 타지 못했는데 해경에게 잡혀 어업을 못 할 지경까지 갑니다. 이에 부모님은 루비 탓만 합니다.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비도 마지막 음악 발표회만 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발표회에서 루비가 행복하게 노래하는 모습을 본 부모님은 마음을 바꿉니다. 자신들이 집은 어떻게든 꾸려가겠다 마음먹고 루비 모르게 버클리 음대 입학원서를 낸 것입니다.
실기 시험이 있는 날 가족들도 함께 학교로 갑니다. 그러나 루비는 혼자서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선생님도 올라와서 루비를 도와줍니다. 가족 모두가 위층으로 몰래 올라와서 루비를 응원합니다. 그것을 본 루비는 수화로 가족들에게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러자 제 목소리가 나옵니다. 가족에게 말하듯이 노래할 때 억눌렸던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루비는 유일하게 가족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합격하고 가족은 루비를 떠나보내며 행복의 포옹을 합니다.
루비에게 가족은 짐이 되는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루비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가족을 떠나도 가족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도전해야 더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힘입어 산다는 말은 하느님 없이는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어떤 능력을 발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엄청난 능력이 발휘됨을 느낀다면 그분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빵 일곱 개를 먹고 일곱 바구니, 곧 평안한 안식의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도전해서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실패하면 현명해진다고 합니다. 도전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과 오래 머물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함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도전해서 성공해야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로라 윌킨스와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그녀는 중국인이 휩쓸던 다이빙 종목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했고 7주간 병원에 입원하며 연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이 말은 주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면 그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 안식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을 고쳐달라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서 주님께 대한 찬양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힘으로 매일 도전합시다. 아기는 걷기를 도전하면서 부모를 더 사랑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더 사랑하게 됩니다. 도전 없이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증가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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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5,29-37 :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병든 이들을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 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나약성과 우리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있었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배불리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고 물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차별하시지 않고 골고루 대하셨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우리는 진정 은총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군중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사화는 두 가지 형태로 전해졌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더 오래 된 것으로 마태오는 이 두 가지를 다 전하고 있다. 복음은 이 기적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는 사화(1열왕 17,8-16)를 알고 있으며,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2열왕 4,42-44)를 알고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 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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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메시아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갈릴래아 호숫가로 옮겨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29-31)
이 이야기는 마태오복음 11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의심을 품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의심을 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고 믿으라고 그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신원 증명서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장 난 것들을 고쳐서 온전하게 만드시는 분이고, 잘못된 것들을 올바르게 바로잡으시는 분이고, 죽음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을 생명 쪽으로 돌려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아(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일들’이 메시아의 구원 활동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일들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희망과 의지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들이 나에게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나도 능동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나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내가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세속 일만 생각하면서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오만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구원을 못 받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35-37)
예수님의 신원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놓치면 안 되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주셨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 빵을 잘 받아먹었고, 받아먹은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안 먹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면? 또는 빵을 조금 먹어보고 나서 “이 빵은 맛이 없다.” 라고 말하면서 안 먹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잘 받아먹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기적입니다. 만일에 받아먹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빵의 기적’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0-51)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생명은(생명력은) 이곳에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으로 작용하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이 일에서도 믿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잘 받아먹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먹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까지 갈 힘을 얻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먹기 싫다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억지로 먹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원해서 가는 나라이지, 가기 싫은데도 붙잡혀서 끌려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생활이지 강제노동이 아닙니다. <성탄절은 ‘죽음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마태 4,16) 우리를 살리려고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살고 싶은 사람은 메시아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 좋다면서 그냥 계속 그렇게 앉아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성탄절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뻐하기는커녕 귀찮아할 것입니다. 성탄절을 잘 지내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들, 특히 판공성사를 대하는 모습에서 그렇게 귀찮아하는 모습을 볼 때가 더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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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바둑 용어 중에 ‘미생(未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방심하면 상대방의 공격에 의해서 죽을 수 있는 돌을 의미합니다. 잘 관리해서 2집을 확보하면 바둑판에서 살아 있는 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해서 2집을 확보하지 못하면 바둑판에서 죽은 돌이 되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미생’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는 치료가 잘 이루어지면 일반병실을 거쳐서 퇴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되면 생을 마치면서 영안실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중환자실 에 있는 환자들은 더욱 각별히 돌보아야 합니다. 모판에 있는 벼는 모내기를 통해서 논으로 옮겨 심습니다. 논으로 옮겨진 벼는 땅에 뿌리를 내려야 비로소 가을에 곡식을 만들어내는 벼가 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옮겨 심어진 벼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전에 방영되었던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대기업에 입사한 ‘인턴’들의 이야기입니다. 인턴은 일정기간 일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실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능력과 실적을 인정받은 인턴은 정식직원이 되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턴 기간 중에 능력과 실적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식직원이 될 수 없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드라마 미생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총과 칼은 들지 않았지만 전쟁터와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는 치열함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삶’은 아직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현세의 삶은 어쩌면 모판에 심어진 벼와 같습니다. 인턴이 능력과 실적을 통해서 정식직원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때까지 기도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턴은 동료들과 경쟁해야만 정식직원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경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익숙한 사회는 난민들을 경쟁에서 도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을 이익과 발전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경쟁이라는 진화론에 익숙한 사람은 난민을 보듬어 주려하지 않습니다. 진화의 법칙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자연을 다스린다고 하면서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썩어가는 연못 속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을 지출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이들에게 약을 주고, 집이 없는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것에는 인색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힘도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세상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변하는 그만큼은 세상이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꽁꽁 얼은 강에는 어김없이 숨구멍이 있습니다. 그 숨구멍이 있기에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있다고 합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늘 부족합니다.’ 요즘 우리들은 성서 말씀을 통해서 아름다운 미래와 꿈을 듣게 됩니다. 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날에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기준에서는 성공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지니셨고, 그 꿈을 이웃들과 나누셨으며, 가난한 이들과 아픈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 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통해서 희망을 찾고, 위로를 얻으며, 그분과 함께 할 때 참된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을 채울 충분한 것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성공을 바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얻을 수 있는 보람과 기쁨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성공을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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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저 군중이 가엾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불구자들을 걷게 하시고, 눈먼 이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흘이나 굶주린 군중들을 일곱개의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의사와도 같이 보이시고,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처럼도 보입니다. 어떻게 적은 양의 빵으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실 수 있는지, 남은 조각을 모으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할 수 있는지 우리의 머리로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서는 이런 엄청난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까지 합니다. 대단하게 보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를 예수님의 입장에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마주 오는 이들을 대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먼저 다음의 질문을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사람들이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의 심정을 어떠했을까요?
걷지 못하는 불구자, 눈먼 이들을 보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어떠했을까요?
사흘 동안 굶주린 군중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합니다. 아프고 굶주린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은 치유 받고 싶고 배불리 먹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입장에서 다가가셔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신 것입니다.(compassion = com + passion)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 치유받고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 모두가 예수님께서 참된 메시아이시며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것을 제대로 믿고 따랐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못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해방자로만 여겼습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믿음이 약하고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루카 9,41)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진정한 우리 삶에서 마주 오는 많은 것들 안에서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표면적인 것들, 감정적인 것들에만 치우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사람들에 집착하는 경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저희 명상의 집에 오셔서 면담을 하는 분들 가운데에는 사제들이나 수도자, 혹은 같은 교우들에게 상처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하던 대로 행동하지 않은 이들에게 실망하거나 비난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사제나 수도자들은 교우들의 지나친 요구에 힘겨움을 호소합니다. 고요히 침묵 가운데 머물며 기도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켜 주고 기다려 주어야 하는데, 끊임없이 “빵을 달라, 물을 달라, 밥 먹자, 여기 아프다, 저기 쑤신다, 놀러가자,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라…”등등 그들에게 예수님처럼 가엾은 마음으로 한결같이 자신만을 사랑해 주고 돌봐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씹는 껌도 아닌데 여기 저기 다니면서 질겅질겅 원망의 심판을 합니다.
때로는 우리 교우들께서도 사제나 수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의 그 가엾은 마음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그들도 아프고, 마음이 불구자가 되기도 하고, 눈이 가리워져 잘 보지 못하기도 하고, 영적인 굶주림으로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사제가 아프면 교우들도 아프고, 교우들이 아프면 수도자들도 아픕니다. 그리고 교우들이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면 사제들도 힘이 나고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제발 예수님을 머리로 해서 우리는 한 몸인데 같은 편끼리 서로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빵을 먹는 한 집안 식구끼리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사랑할까” 생각하며 서로를 위해 준다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요!!
물론 공동체 안에는 아직 미숙한 철부지도 있고, 마음이 아픈 이들도 있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께서 가엾이 여기는 이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의 그 마음으로 더 많이, 제대로 사랑의 빵을 나누는 날이 되시길 빕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의 빵의 기적이 아닐까요?
우리의 작은 사랑의 빵을 나누어 예수님의 마음을 기쁨으로 빵빵하게 해 드려요^^ 자, 이제 사랑하러 갑시다! 빵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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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시다>
오늘 복음[마태 15,29-37]에서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시는 사건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찾아볼 수 있고, 또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어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자비심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차별 없는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알아볼 수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
1) 예수님은 당신에게로 오는 절름발이, 불구자, 맹인들과 벙어리들을 고쳐주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신체적인 장애와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동정을 베풀고 계심을 알 수 있으며,
2) 먼 길에서 온 사람들이 지쳐있음을 알아주시면서, 험한 길을 되돌아 걸어 갈 수 있게끔 힘을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씨는 인생에서 나그네 된자, 세상일로 고되게 시달리는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의 그 고됨을 알아주시면서, 삶의 용기를 주시는 모습이다.
3)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무엇보다도 주린 자를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 구령의 관심을 크게 가지신 만큼, 인간 육신에 대한 관심도 가지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생활을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 각각의 단계를 끝마칠 때마다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1) 5,000명을 먹이신 사건으로서, 그것은 갈릴레아 지방의 전교생활을 끝마칠 때 일이었다. 그 후 예수님은 다시는 갈릴레아 지방에서 가르치시거나, 설교하고 병 고쳐주시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2) 4,000명을 먹이신 사건으로서, 이것은 팔레스티나의 국경을 넘어, 티로와 시돈 지방, 테카폴리스 지방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끝맺으실 때 일이었다.
3)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베푸신 일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삶을 마치실 때 일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을 따르며 당신과 함께 길을 걷는 자에게는 힘이 되어 주셨고, 또한 생명의 빵을 주셨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대한 예수님의 애정을 생각할 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떠한 환경에서나, 예수님을 찾아갈 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그분께서 주시는 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생활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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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변성수 필립보 신부님]
형제자매 여러분! 어느덧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12월 대림시기가 이미 다가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다림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그 사랑을 만끽하길 기대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따라가는 것처럼, 오늘 복음에도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 말 못하는 사람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이 사람들은 사흘 동안 굶주리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따라다녔을까?
단순히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쳐서 그럴까…? 물론 요즘도 ‘어디 병원 잘 고치더라…, 아니~ 기어들어갔던 사람이 걸어서 나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그 병원은 이제 새벽부터 줄서서 기다리는 병원이 됩니다. 더군다나 관절염 있고 허리 아픈 할머니들이 두세 시간씩 기다리고 치료를 받는, 소위 잘~ 나가는 병원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사흘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쳐서 사람들이 따라다니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느끼고 발견했을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군중을 가엾게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아~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 가득한 이 마음에 지금도 녹아버릴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마음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도 잘 들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도 연민 가득한 사랑의 마음으로 니가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여라.’
신앙인이란 내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인자하고 사랑 가득한 나의 눈빛을 통해서, 주님의 축복과 위로가 가득한 나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복된 신앙인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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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고>
오늘 복음은 서로 다른, 그러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치유이적사화를 집약하여 상황설명으로 보도하는 내용(30-31절)이며,
다른 하나는 7개의 빵과 물고기 몇 마리로 사흘 동안 굶은 사천 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사화를 사건으로 보도하는 내용(32-37절)이다.
이 두 가지 내용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이유는 사천 명의 군중 속에 방금 치유 받은 곰배팔이, 절름발이, 소경, 벙어리, 병자들이 대다수 들어있기 때문이다. 병도 고치고 음식도 배불리 먹고,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는 일석이조의 행복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또 다른 빵의 기적을 알고 있다. 그것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는 바, 예수께서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다.(마태 14,13-21; 마르 6,30-44; 루카 9,10-17; 요한 6,1-14)
그런데 마태오와 마르코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사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따로 전하고 있다.(마태 15,32-37; 마르 8,1-10)
제일 먼저 씌어진 마르코복음을 고려한다면 빵의 기적은 두 번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빵의 기적이 있었던 시점을 살펴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기 전까지의 갈릴래아 활동기는 사실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활동장소를 따른 구분이다.
① 처음에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다. 이 활동의 마무리 시점에서 많은 병자들을 한꺼번에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②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북쪽 시리아 페니키아 지방의 티로와 시돈(마태 15,21; 마르 7,24)에서 활동하셨다.
③ 오늘 복음이 첫 구절이 말하듯이 예수께서는 티로와 시돈에서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빵의 기적으로 사천 명을 배불려 주신 것이다.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속계하신 예수께서는 필립보의 카이사리아(갈릴래아 북쪽 40Km)에서 베드로의 메시아고백을 받으시고, 근처 산에서 거룩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두 번이나 수난과 죽음을 예고 하셨다.
그 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마태 19,1) 빵의 기적이 또 한번 있다면, 그것은 바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당신 스스로를 빵으로 내어주시는 기적이다.(마태 26,26)
곰배팔이, 절름발이, 소경, 벙어리, 그리고 병자들이 치유되어 신체의 자유를 되찾고, 자유를 되찾은 그들이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는 사건은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외치듯이 ‘메시아 출현의 기본 패턴’이다.
그 날이 오면 산 위에서 만군의 주님이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살지고 연한 고기에 맑은 술을 곁들인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만군의 주님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 주실 것이며, 죽음까지도 영원히 없애버릴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가 예고하는 만군의 주님은 마태오복음이 선포하는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갖은 육체적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 사흘이나 굶은 그들이 집으로 가는 중에 길바닥에서 행여 쓰러질세라 손수 걷어 먹이시는 인자하신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까지 우리는 “여기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 뿐”인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것으로 사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게 될 그런 일을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쓰러져 가는 영혼을 세워주실 “♬ 구세주 빨리 오사 ♪” 하며 목청을 돋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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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시기”는 자신의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 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이들은 갈망을 품고, 타인들의 손에 이끌려 산 위에 올라와 있는 이들입니다.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발치에 놓여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슴 속에 당신의 음성을 불어넣으십니다. 또 다가와 면전에 나와 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이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 가운데’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니 그것을 우리는 우리에게서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빵과 물고기가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것들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재로, 복음사가는 그것으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3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순례하면서, 자꾸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인 양 여깁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찾는 사람’이 순례자입니다. “참된 빵”인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그가 진정한 순례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베네딕도의 수도규칙 58,7)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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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제 안에 가엾이 보는 마음을 주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이 되게 하소서.
하여,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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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15,31)
<몸과 마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셔서 산에 오르시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음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조금을 가지고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화를 전합니다.
이는 모두 너를 향해 있는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영과 육의 건강, 영과 육을 함께 살리시는 너를 향해 있는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을 마음에 담아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폐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있고, 어떤 자매는 유방암, 췌장암, 그밖에 다른 암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지니고 있는 이런저런 아픔들은 왜 나를 찾아왔을까?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올 만 했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내게 올 만 했기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그 주범은 마음 안에 쌓인 스트레스,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스트레스,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내가 살려면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스트레스를 줄여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치유하시는 분, 내 안에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하시는 분, 그래서 나의 영과 육을 함께 살리시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이런 주님께로 나의 몸과 마음이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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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씀과 밥>
마태오 15,29-37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말씀과 밥>
사람이
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니
밥에 게걸들린
사람 아닌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말씀을 먹이신다
사람이
말씀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니
말씀으로 배불러도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사람을 살리시고자
밥을 먹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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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독서의 중요성을 거의 모든 사람이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쓰기 위해 엄청난 양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담긴 책을 출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책이든 저자의 엄청난 내공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공이 담겨있는 책을 읽고 따르면서 자신의 내공도 높일 수 있기에 독서는 정말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집 센 사람입니다. 고집이 너무 세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기에 책을 읽어도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자기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 발전도 있고 행동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 같은 내용만 읽으면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됩니다.
저 역시 다양한 책을 읽으려 합니다. 다양한 책을 통해 다양하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고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은총이 얼마나 컸는지 사흘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도움을 가리키는 말로, 성경을 보면(창세 40,13; 여호 1,11 참조) 하느님의 도움은 사흘 후에 내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즉, 이제 사흘이 지났으니 하느님의 도움이 드러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있었던 군중이 가다가 지쳐버릴지 모른다는 현실 생활을 지적하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남자만도 사천 명(마태 15,32 참조)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전에 빵 5개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4천 명이면 빵 3~4개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있는 것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을 먹이신다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봉헌할 것이 3~4개의 빵만 있었다면 이것으로도 충분히 배불리 먹이실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봉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봉헌의 마음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봉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는’(이사 25,8 참조)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이기에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겸손한 마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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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죽지 않는 약을 찾아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던 중국의 진시황제는 생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따라서 몸에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 챙겨 먹었을까요? 실제로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신하들을 동쪽 나라로 파견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나이 쉰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사인은 오래 살기 위해 장기간 복용했던 단약 때문이었습니다. 이 단약에는 수은이 들어 있었고, 이로 인해 이른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지 않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는 삶이 행복할까요? 어느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죽지 않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의 날이라며 너무 좋아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축복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일 30만 명이 사망했는데, 죽는 사람이 없어 인구증가가 계속 이루어졌고, 식량부족으로 이어져 4개월 뒤에는 사회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죽음이 없어야 할까요? 죽음은 살아있는 이에게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살아있는 이에게 큰 역할을 하는 것이고, 이로써 또 다른 세계인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은 절대로 부정의 단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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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어 ‘코로나19’의 종식을 이루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베풀어 주셔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며 지니셨던 마음은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공명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질 때 예수님의 기적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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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여정>
-우리는 모두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작, 희망의 시작,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오늘은 12월 첫날, 대림 제1주간 수요일입니다. 희망의 여정이요, 우리는 모두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희망의 다른 이름은 꿈이요 비전입니다. 희망이, 꿈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우리의 희망은, 꿈은, 비전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성장 성숙되어야 합니다.
희망보다 더 좋은 영적 식食은, 약藥은, 힘은 없습니다. 정말 세고 강한 것이 희망의 힘입니다. 제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수 있는 것도 희망의 힘입니다. 날마다 한밤중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나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희망의 힘 덕분입니다. 희망의 힘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희망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영육의 최고의 명약名藥이 희망이자 꿈이자 비전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희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의 희망으로 날로 변모되어야 합니다. 강론 시작부터 희망 예찬이 되었습니다.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 저어 가요/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 저어 가요”
여전히 아침 산책때 마다 부르는 ‘바다’라는 옛 동요입니다. 더불어 대림 첫주 아침기도 첫째, 둘째 후렴입니다. ‘그날’은 하늘 나라의 꿈이 앞당겨진 바로 ‘오늘’입니다. 가사도 아름다운 시요 곡도 참 흥겹습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알렐루야”
“들이여 주님 앞에서 흥겹게 우쭐거려라/숲을 이룬 나무들도 손뼉을 쳐라
주께서 오시어 다스리시리라/알렐루야”
어제는 마침 잠시 제주도에서 머물고 있는 수녀님으로부터 ‘한라산’과 ‘바다 파도 소리’가 있는 동영상을 받고 화답했습니다.
“한라산과 하느님의 멋진 생음악! 파도소리 감사합니다.”
아무리 봐도 싫증 나지 않는 파도소리 들리는 아득한 수평선水平線의 바다입니다. 바다를 보듯 높이 넓게 펼쳐져 있는 불암산 배경의 하늘을 바라 보는 것도 큰 기쁨이요, 하늘과 땅이 닿아있는 지평선地平線을 바라보는 것도 큰 기쁨인데 이제는 지평선도 난립한 건물들로 사라져가는 추세라 참 아쉽습니다. 몇 년전 그림 작품전을 가진 도반의 시詩와 같은 소갯글의 고백도 눈에 띄어 일부 소개합니다.
“어릴 때 하늘을 바라보며 떠도는 구름따라 꿈을 키웠습니다.
움직이는 구름따라 살랑이는 바람을 느꼈습니다.
바람결에 어려움도 알고 시원스러움도 따스한 사랑도 느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려울 때면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기쁨이 넘쳐도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습니다.”
희망의 여정에 희망의 도반입니다. 희망의 도반중에 도반이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요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두분다 삶 자체가 하느님의 희망이 된 분 희망의 도반이요, 참으로 최고의 도반은 이런 희망의 도반입니다. 그날을 꿈꾸는 희망의 예언자 이사야요 예수님처럼 언젠가의 그날의 꿈을 오늘 앞당겨 사는 대림시기의 우리들입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리라.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의 덮개를 없애시리라.”
흡사 주님의 산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 성전 미사잔치를 통해 실현되는 느낌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너울, 거짓과 위선, 허영과 교만의 덮개를 거둬주시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이어지는 꿈의 실현도 얼마나 황홀한 아름다움인지요!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이 또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날의 꿈을 앞당겨 실현 시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꿈을 살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희망의 꿈나무를 키우는데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 미사의 공동전례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가톨릭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이 아름다운 전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날이 아닌 바로 오늘 이사야서 말씀처럼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여기 머무르신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도반,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실현되라 있는 꿈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 꿈은 개꿈이나 헛꿈이 아닌 참 꿈인 하늘 나라 꿈입니다.
이사야의 하느님 꿈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듯 오늘의 우리를 통해 실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얼마나 신바람 나는 현실인지요! 그대로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꿈의 실현에 하느님 찬미와 찬양이 요, 늘 입에 달고 살아야 할 하느님 찬미와 찬양입니다. 이래야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꿈의 실현입니다. 이어지는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인 빵과 물고기의 기적도 놀랍습니다. 광야에서의 기적은 그대로 우리 인생 광야에서의 기적을,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의 장면은 한폭의 살아있는 그림을 보는 듯 참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신후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니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합니다.
흡사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광야에서 하늘 나라 꿈이 실현되듯 연옥같은 지상의 광야 세상에서 우리를 통해 하늘 나라 꿈이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빵과 고기를 예수님이 직접 나눠 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나눠준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눔의 기적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누지 않아 굶주린 불평등의 세상입니다. 이건 하느님 탓이 아니라 우리 탓입니다. 예수님의 지극정성의 사랑에 감동한 군중들이 회개하여 소리없이 가진 것을 다 나누니 바로 대동세상大同世上,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탐욕을 위해서는 수개의 지구도 부족하지만 필요한 나눔을 위해서는 지구 하나도 차고 넘칩니다.
그러니 희망의 여정에 영원한 희망의 도반인 주님과의 우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가 깊어질 때 우리의 꿈도 희망도 함께 성장 성숙합니다. 이래서 은총의 대림시기 더욱 끊임없는 기도가 절실합니다. 지난 주 교황님의 강론 일부를 인용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21,36). 기도는 마음의 램프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열심히 식을 때 느끼는 진리이다. 기도는 재점화再點火이다. 기도는 모든 것의 중심인 하느님께 우리를 데려 가며 영혼을 깨어 있게 한다.
우리는 아주 바쁜 일상중에도 결코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성탄에 이르기 까지 세 말마디로 이뤄진 “오소서, 주 예수님(Come, Lord Jesus)”, 짧은 기도를 반복하여 끊임없이 바치며 아름다운 대리시기를 보내기 바란다.”
이미 오래전에 타계한 ‘기도의 대가’ 베네딕도회 존 메인 신부가 강조한 관상기도 역시, 아람어 ‘마라나타(maranata;오소서 주 예수님)’를 호흡에 맞춰 끊임없이 반복하여 기도로 바칠 것을 권했는데 교황님의 권고도 이와 일치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하늘 나라 희망의 꿈을 부단히 키워가는 것이 죽음에 대한 최고 최상 최선의 준비도 됩니다. 특히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를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바칠 것을 권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희망의 여정에 항구한 희망의 순례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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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wROJiFZL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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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 37)
우리의 울음과
배고픔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신다.
지친
우리 삶을
끝까지
껴안아 주신다.
삶의 모든
시간에
함께 하시는
사랑이다.
사랑에는
소외된
변방이란
없다.
가려져 있던
하느님 사랑이
드디어
가난과 결핍으로
얼룩진 삶을
위로하듯
사랑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사랑의 빛은
생활의 빛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모두를 배불리
먹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삶의
아픔을
고쳐주시고
우리 삶의
허기를
채워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매일같이
주님의
밥상에서
힘을 얻는
우리들
신앙이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신다.
생명의
주님이시다.
생명은
나누어야
행복을
체험한다.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
다시 차려지는
오늘의 식탁이다.
주님과 함께
오늘에 감사하며
오늘을 나눈다.
가장 낮은 곳에
더더욱
사랑의 배부름이
풍요롭다.
여기 이곳에
배불리 먹게
하시는
주님이 생명의
빵으로 오고
계신다.
참된 나눔의
참된 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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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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