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만물이 솟아나고,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삶도 마찬가지다. 청춘엔 용기가 솟구치고 노년엔 보람을 얻는다. 자연은 가을이면 풍성한 먹거리를 준다. 들에는 오곡이, 산에는 과일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리고, 초가지붕엔 누런 호박이 익어간다. 인생의 가을을 맞아 흐른 세월이 안타깝고, 허투루 낭비한 것 같아 서글프다.
신혼살림을 직장 따라 객지에서 시작했었다. 오곡을 거두어들일 때쯤, 아내는 월세 집에서 첫아이를 출산했다. 전화기가 없어 허둥대다 우체국에 가서 출산소식을 부모님께 전했었다. 마침 서울 처형이 고향 갖다 집에 들렀었고, 농번기라 늦게 어머니가 올라와 산후조리를 했었다.
시골 처형이 산후통에 좋다며 누렇게 익은 호박을 보내준 것으로 몸조리를 했다. 그 계기로 아내가 호박을 좋아해 지금도 해마다 시골에서 보내온다. 아내는 누런 호박 덩이가 복과 행운을 가져온다는 이야기에 좋아한다. 그래서 관상용으로 안방의 문갑 위에 올려놓고 풍요로움을 즐기고 나중에는 식도락으로 즐긴다.
어릴 적에는 사는 것이 모두 어려웠다. 정부 수립과 6.25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기였고 먹는 것이 해결되지 않았다. 집집마다 가족은 많고, 흉년이 자주 들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었다. 부지런해야 식솔을 간수할 수 있었고, 어린이도 이른 아침에 거름 망태기 울려 메고 골목길의 소똥과 개똥을 주워, 거름에 보태어야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산비탈이나 논밭의 자투리땅과 집의 담장 울타리에 손바닥만 공한지가 있어도 구덩이를 파고 인분과 곰삭은 퇴비를 넣어 호박씨를 심었다. 호박은 다른 작물과 달리 심어놓고 나면, 그렇게 손을 대지 않아도 수확할 수 있다. 한해살이 덩굴에 속하는 호박의 싹은 떡잎부터 탐스럽게 나온다. 잡초 덤불과 울타리, 지붕에도 호박 덩굴을 올렸다. 자고나면 덩굴이 쑥쑥 자라 호박잎으로 덮였다. 그렇게 자란 호박은 호박잎, 호박꽃, 애호박, 늙은 호박까지 서민들의 끼니를 해결해주었다.
덩굴식물인 호박은 줄기와 잎에 털이 있고 다섯모꼴로 잎이 둥근 삼각형으로 자란다. 한 그루에 암꽃은 종鐘 모양으로, 수꽃은 사람의 생식기를 닳았다. 뿌리가 강해 수박, 참외, 박, 등 채소에 접을 붙여 튼실한 야채 생산에 이용도 했었다. 어디에 심으나 가뭄과 병충해에도 강하고 잘 자라 식자재로 유용하게 쓰였다.
호박 새순 잎을 밥 위에 쪄서 쌈장과 싸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새순 호박잎을 비벼 넣은 호박국은 대장(大腸)을 편안하게 했다. 늙은 호박에서는 단맛이 난다. 팥, 콩, 땅콩과 같은 잡곡과 찹쌀가루를 반죽해 새알심을 만들어 죽으로 끓이면 호박범벅이 되었다.
애호박은 삶아서 무치거나, 볶으면 국수의 고명으로도 좋고, 된장찌개에 넣어도 좋고, 전을 부치면 애호박전이 되었다. 호박전은 한정식의 별미 중의 별미다. 가을에 썰어 말려두었던 호박고지로 겨울철의 콩나물과 함께 끓이면 술 먹은 다음날 해장국으로 둔갑하여 달달하니 속을 풀어준다. 얇게 썰어 쌀가루에 수수까지 넣고 찌면 호박 시루떡이 된다. 가끔 호박시루떡을 만들어 이웃에 나누기도 했다.
《본초 각목》에도 호박은 소화기를 보호하고 몸의 기운을 돕는다고 되어있다. 호박은 수분이 많고, 포도당의 단맛, ‘데시틴’ 성분이 있어 두뇌 발달, 부종, 항산화 효과가 좋아 항암, 면역력 강화, 혈액순환, 동맥 강화, 노화 예방, 변비 해소, 피부미용, 저 칼로리 건강식품으로 속속 성분이 밝혀지고 있다.
선인들에 의하면 호박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좋은 일이 생기면 ‘호박이 넝쿨 채 굴려온다’라고 표현했고, 못난 여자를 조롱하는 말로 ‘호박꽃도 꽃이냐’ 또는 ‘호박에 줄 끗는다고 수박 되냐’라고 비아냥거렸다. 또한 평소에 아끼고 절약하다, 노름하여 잃을 경우,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 넣는다.’ 하면서 경멸하거나 혀를 차기도 했었다.
누른 호박을 꼭지 쪽을 도려내고 씨를 발라낸 다음 꿀을 넣고 쪄서 달인 물은 산모의 산후조리에 좋고, 가을철에 미꾸라지 넣고 찌면 호박 추어탕이 되고, 장어 가물치를 넣어 찌면 보양식으로 으뜸이다. 씨는 씻어서 말려두었다 겨울철에 심심풀이로 까먹으면 몸에 좋다.
호박은 누렇게 익으면 누구나 좋아한다. 호박은 늙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다. 사람도 호박처럼 늙어서 사랑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호박의 참 의미를 닮는 것처럼.
호박은 모가 나지 않고 둥글고 원만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찬이요, 명약이 된다. 나는 성질이 까칠하고, 밴댕이 속 같이 변덕이 많아 아내로부터 잔소리를 듣곤 한다. 남이 하자는 데로 따라가면 되지, ‘모가 나면 정 맞는다고.’ 밖에 나가서 점잖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아내는 신신당부한다. 호박같이 둥글둥글하게 살자는 게 아내의 노래다.
나같이 옹졸한 사람은 호박의 이치를 일찌감치 배워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늦게나마 호박처럼 사랑받으려면 지금부터라고 배워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