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FvGj4CPXu4M?si=du3K94UnLBzB655O
응시와 현대미술
백상현
미술의 역사는 그리는 자와 지우는 자의 투쟁의 역사이다.고전주의 시대는 그리는 자가 승리한 시대이다. 반면에 19세기 말과 20세기는 지우는 자가 승리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그 중의 한 명이 에드워드 호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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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의 작품은 디테일을 지우면 혹은 이미지를 폐허로 만들면 응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원경에서 개성이 없는 인물이 대체로 뭘하는 지 모르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여기서 누군가의 응시가 드러난다.영화 속에서도 많이 응용된다.디테일이 생략되기 시작하면 커메라의 응시가 부각된다.
호퍼는 적당히 지울 줄 아는 자다.다 지우면 관객이 눈을 돌린다.관객의 시선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 수 있는 데까지 이미지를 지울 줄 아는 자 이들이 20세기 예술의 상당한 계보를 형성한다.게하르트 리히터가 전형적인 인물이다.
독일의 리히터는 사진을 찍고 그 위에 물감을 짓이겨 매혹적 방법으로 지우는 자이다.관객이 여전히 그 이미지에 눈길을 줄 수 있게 매혹적으로 지운다.지우면 응시가 등장한다.눈 감아보면 누군가가 우리를 응시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눈감는다는 것은 시각에 커튼을 치는 것이므로 지우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의 응시 - 신디 셔먼의 사진작품
신디 셔먼은 사진작가인데 응시를 출현시킬 줄 아는 예술가이다.
이 사진 속의 여자의 한 쪽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다.
셔터다.여성지에 나타나는 모델로 분장해 자기 자신을 찍었다.여성지는 여자들이 보는 것이지만 여성은 무의식적으로 남성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볼 수 있다.그러므로 남성의 응시를 불러내려는 목적이 있다.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보다 추상적인 남성의 응시를 불러내는 것이다.그런데 신디 셔먼의 독특성은 너의 응시를 불러내는 것을 나, 즉 여성이 관리한다는 상징이다.너의 응시가 이 이미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내가 잡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나는 바라봐지는 존재이지만 바라보는 너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책무는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다.로고스가 아니라 파토스이다.
신의 응시- 돔성당
모세가 만난 신은 나는 나다(I am that Iam)라고 하였다. 즉 신은 공백이라는 것이다. 이 공백을 표현하기 위해 기하학적 돔양식이 고안되었다.
이것은 천정의 통제된 신의 필터링된 응시이다.
내부에서 거대한 공백과 마주하면서 신성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원근법에서 다루는 2차원 공간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태도와 동일하다. 즉 공백을 공간화시키는 태도이다.
공백과 공간은 비어있다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공간은 죄표화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성당은 공간을 통해서 공백을 통제하는 강박증적 구조이다. 그 반대편에 히스테리적인 태도가 존재한다. 그 공백을 해방하려는 태도 공백을 그 자체로서 향유하려는 태도이다. 라캉 미학에서는 그러한 구조가 예술의 본질이다.르네상스 예술은 예술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공백을 가두려하기 때문이다.
중세 예술과 20세기 예술-결여와 공백, 존재의 가벼움
20세기 예술은 공백을 해방하고 탐닉하려고 한다.20세기 예술은 공백과 결여를 만날 수 있다. 다양한 표현방법이 있지만 어떤 작품은 의미의 공백, 어떤 작품은 내용의 공백, 그 밖에 시간의 공백을 경험하게 해 준다.
중세는 균열, 결여,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수용하려는 시대였다(그런 면에서 히스테리적이다).그것을 통해 신과 1대 1 대면하려는 시대였다.그 중세적 태도가 20세기에 반복되고 있다.대표적 작가가 데이비드 호크니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얇음 그리고 깊이의 부재가 느껴진다.얇다는 것은 그 뒤에 통제되지 않은 공백이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얇다는 것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고 깊지 않다는 것은 공백이 공간화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그 평면성, 그 가벼움, 밀란 쿤대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20세기 예술의 특징이다.왜냐하면 존재는 가벼워야하고 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존재가 가볍다는 것은 존재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존재의 본질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