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후예들
늘푸른언덕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세기 4장 1절~15절
성서 속 ‘카인과 아벨’의 말씀을 인용하며 오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이 성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며 더욱이 형제 간 근친 살인의 비극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그 후 신앙인이 되어 자연스럽게 다시 접하게 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당시 신앙의 초심자로서 상당한 혼란 속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왜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동생인 아벨과 그의 제물만을 받으신 것일까?
일단 성서의 외견상 나타난 팩트(Fact)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숨은그림찾기 같은 대목입니다. 제 관심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아벨의 제물이 아니라 오로지 기뻐 받지 않으신 카인의 제물에 향하여 있었습니다.
카인은 농부로서 일 년 동안 피땀 흘려 얻은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왜 받지 않으신 것일까?
당시 제가 가졌던 신앙적인 의구심이었습니다.
그 후 목사님들의 설교와 이 대목을 해석하는 설득력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며 곧 카인의 제물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동시에 제가 가진 신앙의 태도에 커다란 영적 도전을 주게 됩니다.
성서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땅의 소산을 바치는 카인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음을 유추하여 지적합니다.
그것은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삼아 온전히 드리는 아벨의 제사를 구별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질투와 시기에서 비롯됩니다. 불만이 쌓인 카인은 결국 들에 나가서 동생을 죽이기까지 카인의 악한 심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카인의 제물이 결코 정성을 다한 제물이 아니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으로 이 이야기는 정리됩니다.
그럼에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줄곧 이 이야기가 석연치 않게 생각의 꼬리를 물며 따라다니는 것은 내 안에 숨길 수 없는 카인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다는 반증이고 결국 그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은 처음에 카인의 입장을 묵상하며 연민하는 상태로 시작됩니다. 그 후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기도 했고 결국 내 안의 카인의 DNA가 살아있음을 알고 슬퍼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학창 시절 한때 문학도를 꿈꾸며 문학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업에 열중하기 보다는 유명 문학인들의 작품들을 읽고 흉내 내는 것이 낭만인 줄 착각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 읽었던 몇몇 문학선 중에서 황순원의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가 있습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중등 시절 국어 교과서를 통하여 가슴 설레며 접했던 작가의 대표작 <소나기>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이 <소나기> 단편소설을 접하고 이어서 읽었던 책이 바로 <카인의 후예>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낙인을 받은 카인, 그 신화적인 메타포를 해방 후 공산정권 치하의 북한에서 벌어지는 토지개혁의 비극에 빗대어 쓴 작품으로 평가받는 수작입니다.
해방이 되자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새로운 질서가 구축됩니다.
조부에게 땅을 물려받아 지주가 된 주인공 박훈은 야학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인민군에 의해 야학을 금지 당합니다.
마을에 불기 시작한 이념의 바람은 계급 간 대립을 부추기고 공산당 정권은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하는가 하면 몽매한 농민들을 선동하여 토지개혁에 착수합니다.
박훈의 집에서 마름 노릇을 하던 도섭 영감은 노동당원이 되어 한 때 상전이던 박훈을 고발하는 등 숙청 사업의 선봉에 섭니다.
토지개혁과 함께 토지를 근간으로 한 사회구조가 무너지자 이를 지켜보던 박훈은 비정한 공산사회를 뒤로 하고 애인 오작교와 함께 삼팔선을 넘으며 끝이 납니다.
카인의 후예 (황순원)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면서 젊은 시절 깨닫지 못했던 카인의 속성을 다시 비추어볼 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시기와 질투, 미움과 욕망으로 가득 찬 카인의 후예들임을 그려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성서 속의 인물이 바로 ‘카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적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묵상하게 된 카인의 속성을 관찰하면서 내 안에 종종 발견되는 카인의 모습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영적인 비전으로 연결됩니다. 꾸준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내 안의 내재된 카인의 모습과 그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점차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영적인 목표로 삼게 된 것입니다.
내가 발견한 카인의 속성은 인간의 외양과 형식은 경건한 듯하나 속마음은 전혀 다른 성정, 즉 질투, 시기, 미움, 분노의 마음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나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카인의 DNA입니다.
이 형질을 없애기 위해 죽는 날까지 고민하며 발버둥 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과정이 바로 제가 감당해야 할 영적 전쟁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성정으로 대표되는 카인의 속성의 사례를 성서 속에서 찾아보면 또 다른 카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바로 성경 속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형의 모습 속에 비친 카인의 속성입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장차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을 재산의 분깃을 미리 받아 집을 떠나 타지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모든 것을 잃고 죽도록 고생하는 가운데 크게 회개하여 돌아오는 탕자인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며 그런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보는 큰 아들의 결코 곱지 않은 질투의 시선과 시기하는 마음을 통하여 카인의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생이 자신의 분깃을 받아서 다 허비하는 동안 정작 집을 지키며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일한 큰 형은 상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섭섭함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비록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창세기의 카인의 모습을 닮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여도 우리 안의 카인의 속성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 안에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내가 죽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자리해야 비로소 없어지는 카인의 DNA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숨어있는 카인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우선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카인의 속성으로 대표되는 시기와 질투, 분노와 미움은 비교의 속성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존재의 인정과 가진 은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카인이 하나님께 드려졌던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을 때 아벨의 제물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제물의 흠결에만 집중했다면 오늘날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역설적으로 흠이 없던 아벨은 죽임을 당하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살아 남아 인류의 후손들을 뿌리내리며 카인의 후예들의 역사를 이어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또 다른 큰 그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카인의 후예들로서 이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십자가 사랑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자 사모하며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우선 그 분의 모습을 사모하며 전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올해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꿈꾸며 이루기를 소망하는 영적 모습입니다.
첫댓글 인격적으로 때론 신앙적으로 성숙하여도
내 안에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카인의 후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카인의 속성을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가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