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34
『약속대로 옥소저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겠소.』
『물론이다. 그런데 육초량이라고 했던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
한 검력이었다.』
사국천의 음성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정당한 시합이었고, 내가 이겼소. 따라서 더 이상 본인을 붙
잡아 둘 이유도 없을 터. 이만 작별할까 하오.』
육초량이 사국천에게 포권하고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를 바
라보는 옥소음과 이자청의 눈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육초량이 그
들의 눈빛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돌아설 때였다.
『너무 방자하다!』
처음으로 입을 연 붉은 전포의 사나이가 꾸짖으며 한 걸음 나
섰다. 그를 바라보는 육초량의 눈은 그러나 차갑기만 했다. 한
손을 들어 그 자를 막은 사국천이 육초량을 바라보며 침중한 음
성으로 말했다.
『육고헌은 나의 제자이자 본 맹의 팔패(八覇)중 한 명이다. 본
좌는 네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기 바란다.』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 듯 사국천의 말은 육초량의 의사와는 상
관없이 확고했다. 그의 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홍색 전포의
사나이를 쏘아보며 육초량이 차갑게 응수했다.
『나는 검의를 터득하고자 하는 일에 전념할 뿐, 귀하의 문파에
는 조금의 흥미도 없소.』
그러나 사국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특유의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본 맹은 아직 강호에 나선 적이 없는 비천맹(飛天盟)이다. 본
좌의 밑에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사검(四劍)과 팔패(八覇), 십
이수라(十二修羅)가 있다.』
사국천이 홍색 전포의 장한과 백의 미부(美婦)를 가리켰다.
『저들이 사검 중 양검(陽劍) 장무(張武)와 음검(陰劍) 음요옥
(陰夭玉)이다. 그리고 저 자들은...』
사국천이 이번에는 그의 뒤에 석상처럼 서 있는 삼 인의 복면
인을 가리켰다.
『본 맹이 자랑하는 십이수라 중 셋이지. 그들은 실혼인(失魂人)
들이다.』
(실혼인?)
육초량은 경악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으나, 강호에는 기이한
술법으로 인간의 심지를 제압해 초인적인 힘을 내도록 만든 괴물
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실혼인이었
다.
약물이나, 비전의 사술(邪術)에 의해 영혼을 제압 당한 그들은
오직 시술자의 명만을 따른다. 인간으로서의 일체의 사고 능력이
제거된 채 내부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으므로, 그
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평소의 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들 개
개인의 무서움도 무서움이었지만, 더욱 두려운 건 그들이 오직
명령에만 따른다는 것이었다. 죽음의 공포도, 육체의 고통도 모
르는 물건들인 것이다. 살아있으되 산 것도 아니고, 죽은 자와
같지만 죽은 것도 아닌 괴물들이었다.
잠시 육초량의 놀라는 모습을 살펴보던 사국천이 희미한 미소
를 띄었다.
『너는 이제 팔패 중 여섯 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가 힐끗 옥소음을 바라보고 다시 육초량에게 말했다.
『원한다면 저 아이도 네게 주마.』
육초량은 그가 자신을 놓아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
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며 힐끗 옥소음을 바라보던 그는 내
심 흠칫 놀랐다. 사국천 곁에서 옥소음이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그를 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어 보였던 것이다.
육 공자,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돼요.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그녀의 눈길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
고 마음을 굳게 먹은 육초량이 단호한 눈으로 사국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듭 말하거니와, 본인은 수행자일 뿐, 귀하의 일은 알고 싶
지도 않고, 상관하고 싶은 마음도 없소.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이
만 돌아가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슴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몇 걸음 옮겨
놓았을 때, 가볍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그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가로막았다. 양검 장무와 이자청이었다.
『본좌는 이미 본문의 일급 비밀들을 너에게 낱낱이 들려주었
다. 네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둘 뿐이다. 본좌의 말을 따르던지,
아니면 죽어서 입을 닫는 것 뿐, 그 외의 길은 없다.』
뒤에서 들려오는 사국천의 음침한 말을 들으며 육초량은 비로
소 그 자의 속셈을 간파하고 치를 떨었다.
한 번 여자에게 빠진 자는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옥소
음에게 반해 자신을 속이려는 생각까지 품은 육고헌을 그대로 둘
사국천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다시 배신한다면 그것
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
사국천은 비록 자신의 제자라고 하더라도 변심한 자를 그대로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무엇보다 사람
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를 잠시 망설이게 했던 것이다.
육초량을 그대로 놓아둘 수도 없었고, 육고헌의 배신을 묵인할
수도 없으면서 사람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심 끝
에 강한 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육고헌이 육초량을 이긴다면 그는 육고헌에게 적당한 제재를
가한 후 그의 변심을 잠시 묵인해 줄 작정을 했다. 그리고 육초
량이 육고헌을 죽인다면 그것은 자기의 수고를 덜어준 것일 뿐이
므로 별 일 아니다. 육초량을 설득하고, 그게 안 되면 사로잡아
역시 적당한 제재를 가한 후 육고헌을 대신하게 하면 된다.
옥소음이라는 미끼가 육고헌과 육초량 둘 사이에 있으므로 어
느 쪽이든 쉽게 달래고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육초량이 의외로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사국천은 그것이 못마
땅했다.
단호하게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육초량을 붙잡아 둘 마땅
한 명분이 없었다. 승자에게 관용을 베풀겠다고 약속한 이상 지
키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체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
다. 그래서 그는 묻지도 않는 육초량에게 스스로 자신의 비밀들
을 말해 주었다. 육초량이 그것을 들은 이상 이제는 그를 붙잡아
둘 구실이 생긴 것이다.
육초량은 그런 사국천의 간교함에 치를 떨며 자신이 궁지에 몰
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자청은 별로 걱정
할 게 못 되었다. 하지만 양검 장무라는 자를 과연 일검에 베고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에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를 이긴다고 해도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망설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해낸다! 반드시 해 내야 한다!)
육초량은 지긋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만일 실패하여 사국천이
직접 손을 써 온다면 절망적일 것이었다.
(기습뿐이다!)
느낀 순간, 발끝으로 돌멩이를 차며 딴청을 피우고 있던 육초
량이 맹렬하게 몸을 던졌다. 장무의 품안으로 뛰어들 듯 돌진해
들어가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름으로 일검을 뽑아 쳤다. 비연
참의 일격이었다.
씨이이-
그가 움직인다 싶었는데 육초량의 검봉은 이미 장무의 목덜미
를 노리고 있었다.
모두가 앗! 하고 놀라는 사이에 한 줄기 피보라가 시야를 가리
며 뿜어져 나왔다. 놀란 토끼처럼 단숨에 삼 장 여를 미끄러져
물러선 장무의 왼팔이 팔꿈치 부분에서 절단되어 떨어지고 없었
다. 그 전광석화의 순간에 한 팔을 주고 몸을 빼낸 장무의 결단
력과 순발력은 감탄할 만했다.
(실패다!)
육초량이 다시 몸을 던져 맹렬하게 장무를 추격해 갔다. 장무
의 우수에는 어느새 새파란 청광을 발하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카카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어지러운 난검으로 뿌
려대는 육초량의 검격을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침착하게 받아내
는 장무였다. 대가다운 솜씨였다.
육초량은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하면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다. 장무 같은 고수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
다.
『이얍!』
절규에 가까운 기합성과 함께 장무가 벼락처럼 육초량의 가슴
을 찔러왔다.
(아차!)
육초량이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치는 순간, 그의 검격을 뿌리치
며 일직선으로 찔러오던 장무의 검이 눈앞에서 가볍게 떨렸다.
그러자 수십 개로 늘어난 듯한 검봉이 육초량의 시야를 가득 뒤
덮으며 그의 상체 전부를 치밀한 검기(劍氣)의 그물 속에 가두었
다. 눈부신 솜씨였다.
다급해진 육초량이 분수의 보를 밟으며 어지럽게 몸을 흔들었
다. 의외의 방향성을 가지고 정신 없이 움직이는 그의 몸이 허공
가득 일렁이는 그림자를 뿌렸다. 그 사이 사이로 장무의 검봉이
쉿쉿거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위험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느새 다섯 걸음이나 밀려난 육초
량은 처음 그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풍차처럼 검을 휘둘러 문호를 닫으며 몸을 틀었다. 그의 철검이
이번에는 이자청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친 이자청이 조
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연검을 휘둘러 육초량의 검을 감아
갔다.
쨍-!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 그 탄력을 빌어 몸
을 날린 육초량의 일검이 다시 장무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
다.
『죽일 놈!』
부드득 이를 간 장무가 마주쳐 나왔다. 두 사람의 검이 한 치
의 틈도 없이 서로 얽히며 다시 불꽃을 퉁겨냈다. 장무는 과다한
상처의 출혈에도 불구하고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의 검력은 완강했고, 검기(劍技)는 더욱 치밀해져
갔다.
조금 더 시간을 끈다면 이미 중상을 입고 있는 장무는 스스로
주저앉고 말겠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가 장무의 검격
을 쳐내며 더욱 초조해 할 때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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