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번째 편지 - 올리브유 세 스푼
2024년 1월이 거의 지나고 있습니다. 혹시 연초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오고 계신가요. 저는 더 이상 연초에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매달, 매주, 매일 어떤 계획과 할 일을 점검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연초라 해서 딱히 어떤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 계획 아래 실천할 것을 실천할 뿐입니다.
삶의 전략을 이렇게 바꾼 것은 <연초에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제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숙고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매년 연초마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각종 실천 방안을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꽃 피는 봄이 되면 다시 계획을 세우고 싶은 욕망이 살아나 몇 가지 계획을 또 세웠지만 이내 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여름이면 휴가 계획을 세우느라 삶의 계획은 뒷전으로 밀렸고 휴가를 다녀오고 8월 말까지는 휴가 후유증으로 머리가 멍했습니다.
찬 바람이 불고 추석 연휴가 다가오면 독서계획을 세웠지만 회상해 보면 추석 휴가 때 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지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제가 세우고 실패한 많은 계획과는 무관하게 삶은 전진하였습니다. 1년 내내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하였지만 11월 중순쯤 되면 또 1년을 마무리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2월 말이 되면 이룬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착잡한 상황에서 1월 1일을 맞이하였고 다시 과거의 실패를 망각하고 다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서너 달 전이었을까요.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올리브유를 매일 아침 식사할 때마다 세 스푼씩 꾸준히 먹으면 몸에 좋다는 기사를 읽고 집에 있는 올리브유를 모두 찾아보니 3병이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올리브유를 세 스푼씩 먹었습니다.
얼마 전 놀랍게도 3병이 모두 비워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올리브유는 명절 선물로 들어와 부엌 찬장에 몇 년째 방치된 것이었습니다. 매일 무엇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변화를 이루는 방법은 혁명과 개혁이 있습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이 인류 역사에 뚜렷하게 그 이름을 새긴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프랑스는 그로부터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 코뮌, 1968년 5월 사태까지 혁명을 자주 겪었습니다.
반면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더 이상의 혁명은 없었습니다. 영국인들 역시 정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국 왕실로서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러시아 혁명 때였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영국 왕 조지 5세의 이종 4촌인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자 조지 5세는 사회주의 세력의 군주제에 대한 공격을 실감하고 왕실 존립 전략을 수립하라고 지시합니다.
“군주제는 귀족이나 중산층의 지지만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조지 5세 이후 영국 왕들은 이 전략에 따라 국민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그 결과 혁명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태양왕이라 일컬어지던 루이 14세(1643년-1715년 재위) 시절 영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럽 최고의 강국이었습니다. 그 후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1871년까지 정치혁명이 이어진 반면, 영국은 동일한 입헌 군주제하에서 산업을 일으켜 프랑스를 능가해 버립니다.
어떤 정치 상황에서 혁명이 옳으냐 개혁이 옳으냐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만 프랑스와 영국을 놓고 보면 혁명만이 답은 아닌 듯싶습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여러 혁명이 있었습니다. 1960년 4.19혁명,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2016년 촛불혁명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알게 모르게 혁명에 장기간 노출된 채 살아왔습니다. 언어에서도 개혁보다는 혁명이나 혁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쉽게 올렸고, 삶에서도 점진적 변화보다는 획기적 변화를 선호해 왔습니다. 우리 세대는 죽을 때까지 혁명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미래 세대는 이 혁명 증후군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신 리셋 증후군 함정에 빠진 듯합니다. 그들은 컴퓨터 게임을 밤낮으로 하고 자란 세대입니다. 게임에서 불리해지면 스위치는 껐다가 다시 켜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세상도 그렇게 보게 보게 될까 봐 걱정됩니다. 현 상태에 대한 불만, 극적인 변화 욕구, 이상화된 미래에 대한 동경은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지 못하고 리셋 증후군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저는 혁명 선호 세대입니다. 그리고 게임도 좀 해봐서 리셋 욕구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삶은 이런 방식으로 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매년 연초에 세운 거창한 계획이 늘 실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매일 올리브유를 세 스푼 먹는 방식이 제 삶을 더 강력하게 바꾸고 제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나아가 한국 사회나 한국 정치도 혁명적 변화나 리셋 증후군에서 벗어나 올리브유 세 스푼의 힘을 깨달을 때 진영이 서로 타협하고 느리지만 확실한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정치의 계절이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4.1.29.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