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흐드러지는 봄밤… 아쉬움 커지는 까닭은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
[한시를 영화로 읊다]〈56〉떨어진 꽃잎 흩어진 꽃잎
영화 ‘흩어진 꽃잎’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소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를 짓고 세상을 떠난다. KINO 제공
봄날 꽃이 눈부시다. 하지만 꽃비 내린 다음 날 바닥에 널브러진 꽃잎을 보노라면 서글퍼진다. 조지훈 시인은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고 썼다(‘낙화’). 장률 감독의 영화 ‘당시’(2004년)에도 유사한 내용을 읊은 당나라 맹호연(689∼740)의 유명한 한시가 나온다.
봄날 새벽 시인을 깨운 건 새소리지만, 시인이 마음을 기울인 건 밤새 비바람에 떨어진 꽃잎이다. 한시에서 꽃 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시(‘惜花’)는 한시의 분류 항목이 될 만큼 흔하지만(‘文苑英華’), 떨어진 꽃잎에 가슴 아려 하는 시인의 마음에 오랜 여운이 남는다.
불우했던 시인이 아쉬워한 것은 꽃이 아니라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일 것이다(이남종). 하지만 이런 자기 연민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으로 이 시를 읽어도 좋다(劉永濟, ‘唐人絶句精華’).
영화의 주인공은 수전증 걸린 전직 소매치기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 세상과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소매치기 기술을 배운 동거녀가 마지막 한탕을 제안하지만 완강히 거절한다. 주인공은 늘 말없이 TV의 당시(唐詩) 강연 프로그램을 본다. 영화에는 맹호연의 시를 시작으로 8수의 당시가 나온다. 하지만 영화 내용과 당시 사이엔 뚜렷한 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에는 주인공의 미래를 연상시키는 이웃 노인이 나온다. 참회라도 하듯 늘 복도를 쓸고 있는 노인도 한쪽 손이 불편해 보인다. 노인은 오해를 받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영화사 초창기 작품인 D W 그리피스 감독의 ‘흩어진 꽃잎’(1919년)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희생된 소녀를 꽃잎에 빗댄 후 많은 영화에서 죽음과 희생의 코드로 꽃잎이 활용됐다. 우리 영화 중엔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년) 속 소녀가 그렇다. 한시에서 떨어진 꽃잎은 젊은 시절에 대한 아쉬움, 총애를 잃은 여인의 한탄 등으로 시인의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됐다. 조선 후기 이봉환은 서얼 신분인 자신의 처지를 떨어진 꽃잎에 투영하기도 했다(신익철).
우리가 떨어진 꽃잎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건 각자의 상황과 경험 때문일 것이다. 지난밤 비바람엔 또 어떤 꽃이 졌을까.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