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월리는 지금은 육지이지만
교회 설립 당시만 해도 100 여 가구가 사는 야월도라는 작은 섬이었다..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배유지)은 1897년 개항도시.
목포에 목포 선교부를 설립하고 전남 서 남해안 선교에 주력했다.
유진 벨은 영광 지역 첫 교회 백수 교회(1903),를 시작으로 묘량 교회(1904),
영광 대 교회(1905), 등을 이미 세웠다.
당시 육상 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조기잡이로 유명하였고 이 일대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던
법성포로 가는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야월도는 온갖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고
외국인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과 거부감이 있었던 섬이었는데
그러함에도 유진 벨은 원래 가려던 법성포로 다시 가지 않고 야월도에 머물면서 복음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야월도는 문맹률이 높았고 농촌 계몽 운동도 미치지 않았던 곳이어서 복음 전파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초가집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리고 주민은 당 집 앞에서 주문을 외듯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드디어 1908년 4월에 교회를 세우고
정식으로 전남 노회에 염산리 교회로 등록하는데 후에 야월교회로 개명한다
처음에는 조직 교회가 아니었으나 복음이 들어가자 문해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조직 교회로 발전해 나갔다
교인들은 농촌 계몽 운동과 애국 운동, 신앙 교육을 전개하였고.
후에 염산교회(1939) 분립 등 지역 복음화에도 힘썼다.
일제때는 야월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농촌 운동, 생활 개선운동, 애국 사상 고취 등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신사참배 강요와 이에 대한 항거로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집사가 구속됐고 교회가 폐쇄됐다.
그들은 교인 가정에 모여 예배를 이어가다가 해방이 되자 교회를 재건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곧 재건된 야월교회는 조양현 허숙일 두 영수가 교회 강단을 지켜왔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닥친 이념의 갈등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족이면서도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씨앗을 뿌렸고
결국은 한국 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불러왔다.
생각하기도 힘들만큼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하는 일은 이 조용한 마을에도 생겨났다.
교인이 고작 65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지만
야월 교회는 초대 교회처럼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소문나 있었다.
6.25때 인민군과 함께 들어온 내무서원(북한의 사회안전원)은 야월 교회를 점령하고
인민 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교회를 빼앗긴 교인들은 가정으로 뿔뿔이 헤어져서
각각 몰래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
6.25 당시 야월리 마을 유지들에 대한 공개 인민 재판에 크리스토교인들이 반대한 것과
공산당이 9.28 수복때에
크리스토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 환영 행사 준비를 한 것을
빌미로 삼아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크리스토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을 묶어 구덩이에 생매장 시키고 죽이기도 했는데
한 구덩이에서 수십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전 교인 65명이 다 순교햇는데
세계 크리스토교 역사상 전 교인이 다 순교한 유례는 찾아 볼 수 없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순교 사건 이후에 야월리는 교회도 없고 교인도 없는 마을이 되어 졌다..
야월도 사람들에게 교회는 곧 죽음을 의미했고
교회 때문에 망한 동네라는 인식마저 있었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의 기피 대상 지역이기도 했는데
순교 1년이 지난 1951년에 야월교회서 분립해 나간 염산교회 청년들이
야월리 현지에 와서
고작 10여명의 어린이를 모아두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 교육을 하였다.
어린이들은 구호 물자를 나누어 주니 그것을 얻으려고 나온 아이들이었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의 기피 대상지역 까지 되어 순교 이후 80년대 초까지
무려 20여명의 교역자가 다녀갈 정도로.
어렵고 열악한 형편었지만
그래도 다행히도 몇 뜻있는 사람들과 미 남장로교의 지원으로.
한 성도의 사랑채에서 다시 예배당을 짓고 시작하여 차츰 자리를 잡아 가게 되었다.
현재 이 적별돌 예배당은 1975년에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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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 순교기념관
영광군은 사회주의자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조직책 김삼룡의 영향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공산당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이다.
따라서 70년이 지난 지금도 6.25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후손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피해자의 가족 중에는 갯벌의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있다.
한국전쟁 때 갯벌에 던져진 시신들을 고기가 파먹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전쟁은 끝났다 해도 잔당들은 남아있었다.
공산당들과 좌파 세력들은 1951년 9월까지 야월교회 성도들을
설도 분주소(지금의 파출소)에 끌어다 때려죽이고,
허리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등 잔인하게 학살을 이어갔다.
목격자 이시성 씨는 ‘김성종 영수, 조양현 영수, 최판섭 집사, 유영섭 집사, 최판원 집사, 김두석 성도 등
전 교인을 수문 앞에 개별적으로 끌고 가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고 증언했다.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집사는 해방 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가족들도 같은 날 희생되었는데
마을 공동묘지 앞에 10m 넓이의 깊은 구덩이를 파고 떠밀어 생매장되었다.
이날 주민 80명도 학살당했다.
최판섭 집사는 어머니가 울면서 “네 장형 최판원 집사가 잡혀 죽게 되었다.
네가 분주소에 들어가면 네 장형을 살려준다고 하니 네가 들어가거라.” 하자
최판섭은 찬송을 부르며 설도 분주소로 갔다.
결국, 최판섭 집사는 설도 수문에서 돌을 목에 걸고 칠산 바다에 빠뜨려져 장렬히 순교했다.
최 집사의 부인 유영섭 집사는 죽음의 형장에서 살인자를 향해 “아저씨도 꼭 예수 믿으세요!”
전도한 후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하면서 칼에 맞아 죽었다.
최판원 집사와 함께 남석우 씨는 예수 믿는 반동분자라 해서 돌에 맞아 두개골이 파열됐다.
숨을 겨우 건져 집으로 옮겨진 후 결국 회생하지 못해 순교했다.
이처럼 야월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노인부터 젖먹이까지 전 교인이 순교한 것이다.
야월교회와 순교기념탑
공산세력은 교회당 건물도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렸다. 야월리는 여러 해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다.
1952년이 되어서야 안창건 전도사(천호동성결교회 원로)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전도자로 헌신했는데 안창건 전도사의 사랑채에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1988년에 부임한 배길양 목사는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순교자들의 이름을 찾아내
65인의 명단을 확정하고 순교 기념탑에 이름들을 하나씩 새겼다.
이후 야월교회 출신으로 통합교단 총회장이 된 안영로 목사가 총회 결의를 얻어 ‘야월교회 순교기념관’ 건립을 성사시킴으로써 2009년 7월 연건평 250평 규모로 ‘기독교인 순교기념관’과 ‘교육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불갑산의 상사화가 계곡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영광 군민은 이 장관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고 ‘피해자들의 피흘림’ 이라고 아픔을 토설한다.
현재 심재태 목사가 담임하며, 교회가 지역사회를 사랑으로 잘 품고 있다고 강조한다.
순교의 영성을 한국교회에 나타내기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수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