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36
때로는 자신의 검에 스스로도 놀랄 만한 힘을 쏟아 넣을 수 있
었고, 몸에 아무리 큰 부상을 입었어도 며칠만 조용히 정양하면
믿기 힘들만큼 빠르게 회복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육초량은 그것
이 바로 혼원지기의 효능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
다.
사국천이 보여 주었던 그 놀라운 장력과 지력을 다시 생각하자
마음 한편에 남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한 운기(運氣)와 축기
(蓄氣), 발경(發勁)의 공부에 대한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는 데
에서 오는 아쉬움이었고, 허탈함이었다. 또 다시 사국천과 부딪
친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일장을 맞받아 칠 수 없을 것이라는 생
각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기의 운용(運用)과 전이(轉移)는 오랜 세월을 두고 그것을 연
구 발전시켜 온 타문(他門)의 비법을 얻기 전에는 깨우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육초량의 무모하리만치 큰 고집은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국천의 장
력에 대적할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육초량은 지긋이 입술을 물었다. 그렇다고 그를 만날 때마다
꽁지가 빠져라고 달아나기만 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부
딪치게 될 것이고, 그 때는 오늘의 빚을 아낌없이 갚아 주어야만
했다.
(그 자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그 자보다 더 빨리 칠 수 있다
면 이길 수 있다.)
오직 그것만이 유일하게 사국천을 벨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
각했다. 육초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움직임을 시
험해 보려던 그는 그러나 그만두고 말았다. 또 하나의 생각이 그
를 맥빠지게 했던 것이다.
(아니다. 내가 움직일 때 그 자도 움직이고, 내가 쳐 갈 때 그
자도 쳐 온다면 소용이 없다.)
상대를 베고, 상대의 주먹에 나도 맞으면 모두 죽은 뒤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국천이 바보가 아닌데 멍청히 서 있을 리는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빠르게 다가가 내리친다고 해도 그 또한
빠르게 움직일 것이고, 더 사납게 일장을 때려 올 것이었다. 그
러면 잘 해야 함께 때리고 맞을 수 있을 뿐, 소득은 없는 것이다.
육초량은 스스로에 대하여 화가 났다. 문득 바닥에 떨어져 있
는 나무토막 하나를 주워 들고 철불을 겨누었다. 그것에라도 마
음껏 화풀이를 하지 않고는 속이 시원해질 것 같지 않았던 것이
다.
『사국천, 이놈!』
외치고 비조처럼 몸을 날려 철불의 정수리를 힘껏 내리쳤다.
쩡-!
속이 비어 있는지, 철불의 몸에서 맑은 울림이 터져 나왔다.
마치 범종을 나무토막으로 두드린 것 같았다.
육초량은 분수의 보를 밟아 눈부시게 움직이며 자신이 여태까
지 터득해 온 모든 검격을 철불에게 쏟아 붇기 시작했다. 사나운
난검인 폭풍검(暴風劍)에서 시작하여, 난풍구도(亂風九道)와 운
산표풍(雲山飄風), 비연참(飛燕斬)을 거쳐 풍벽검(風壁劍)에 이
르기까지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나운 검격은 철불의 머리며
어깨, 가슴, 팔 할 것 없이 전신을 우박이 때리듯 무참하게 쳐댔
다.
한 동안 사당 안에 진동하던 철불의 공명음(空鳴音)이 최후의
비연참 일격을 맞아 땅, 하는 맑은 쇳소리를 내고 서서히 그쳤다.
천검(千劍)이 일검(一劍)인 듯, 일시에 와르르 쏟아낸 혼신의 검
격이었다.
육초량은 상기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나무토막을 늘어뜨리고
섰다. 철불은 여전히 그 거대한 몸집을 그 자리에 둔 채 미소짓
고 있었다. 한 순간 육초량의 전신에 부르르 잔 경련이 스쳐갔다.
(이것이다!)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번개라도 쪼개낼 듯한 극쾌함으로 폭풍
처럼 사납게 몰아쳤으나 철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
로 서 있을 뿐이다. 동(動)을 제압하는 정(靜)의 묘법(妙法). 그
것을 이 낡고 볼품 없는 철불이 보여준 것이다.
『아, 부동심(不動心). 바로 이것이다!』
육초량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양검(陽劍) 장무와 겨루었을
때 자신이 그처럼 조급해하지 않았더라면, 사국천의 일장 앞에서
자신이 그처럼 두려워하여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육초량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만일 그 때 부동심의 진
경(眞境)을 엿보았더라면 장무는 벌써 그의 검 아래 꺾였을 것이
고, 사국천의 일장도 두려울 게 없었을 것이다.
철불 앞에서, 한 손에 부러진 몽둥이를 든 채, 넋을 잃고 서
있는 육초량의 모습은 아침의 햇살이 무너진 벽을 넘어 긴 그림
자를 끌고 스며들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 * * *
(인기척!)
그것을 감지한 순간, 육초량은 철불 뒤로 몸을 숨겼다. 옷자락
날리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암자 안으로 한 사람이 날 듯이 뛰어
들어왔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우람한 체격의 장한이었다.
심한 싸움을 치르고 온 듯, 그의 전신은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
였고, 호흡마저 탁해 있었다.
잠시 번갯불 같은 시선으로 암자 안을 휘둘러본 그가 서둘러
철불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암자 안을 조심스럽게 훑어보
더니 철불 곁의 마루판자를 뜯어내고 그 속에 품에서 꺼낸 보자
기 하나를 급히 밀어 넣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판자를 덮어놓고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도위충, 어디로 더 달아날 것이냐!』
밖에서 싸늘한 일갈이 들려왔다.
『헉!』
도위충이라 불린 장한이 크게 놀라며 멈칫거렸다. 한 줄기 바
람과 함께 십여 명의 괴한들이 가볍게 날아들어 그를 에워쌌다.
흑의 경장의 괴한들이었는데, 가슴에는 하나같이 아수라상이 금
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 중 얼굴에 귀면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내놓아라!』
그가 음침하게 외치며 도위충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위충이 가
슴을 펴고 코웃음을 쳤다.
『흥! 믿던지, 믿지 않던지 그건 너의 자유다만, 물건은 이미
내게 없다!』
『개소리! 네놈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귀면인이 사납게 윽박질렀지만 도위충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
다.
『물론, 어제까지도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희들은 헛수고
를 하고 있는 것이다.』
『흐흐, 설마 나 음소귀(陰笑鬼)를 속이자는 수작은 아니겠지?』
『물건은 오늘 새벽 비천맹의 손에 넘어갔다. 내 몰골을 보면
모르겠느냐?』
도위충이 태연하게 발뺌을 했지만 음소귀라고 자신을 밝힌 자
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흐흐, 좋다. 일단 네놈을 잡아 뒤져보고 나서 다음에 사국천
그 놈을 찾아가지.』
귀면인이 손짓을 하자 도위충을 에워싸고 있던 십여 명의 괴한
들이 일제히 덮쳐들었다.
『어림없는 수작!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 철권무적(鐵拳無敵) 도
위충이 아니다!』
사납게 외친 도위충이 맹렬한 권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철권무적 도위충. 그는 산서 제일의 권문(拳門)인 철권문의 문
주로서 산서철권(山西鐵拳)이라는 별호로도 명성이 쟁쟁한 인물
이었다.
그의 권격이 쳐 나가는 곳마다 빠지직 빠지직 하는 금속음과
함께 사나운 경기가 바닥의 먼지를 말아 올렸다. 그의 권력(拳力)
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도위충을 합공하고 있는 십인의 괴한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도위충의 질풍 같은 권격 속에서 고양이
처럼 가볍고 날렵하게 신형을 움직이며 신랄한 기세로 수중의 검
을 쳐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도위충의 일격에 빗맞은 암자의 벽 한쪽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뻥 뚫렸다. 울에 갇힌 표범처럼 으르렁거리며 좌충
우돌하는 그의 권세(拳勢)는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수레바퀴가
돌 듯 연달아 용호파풍권(龍虎破風拳) 십여 권의 권력이 꼬리를
물고 쳐 나가자 정면에서 달려들던 두명의 괴한이 산산이 부서진
가슴을 안고 날아갔다.
그 틈을 노리고 여덟 개의 날선 검이 일제히 그를 찔러왔다.
도위충이 급급히 보법을 밟아 몸을 틀었으나 그 중 삼 검을 맞고
말았다. 선연한 피보라와 함께 답답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와하하하-』
분노로 가득 찬 대소를 터뜨린 도위충이 저돌적으로 부딪쳐 갔
다. 바람이 찢기고 압축된 경기가 터지는 요란한 파공성이 암자
안을 가득 메웠다. 도위충의 강렬한 권력이 폭죽처럼 터지며 팔
방을 때리자 다시 두 마디의 참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를 둘러싸고 신랄한 검격을 가하던 괴한들이 주춤거렸다. 엄
중한 상처를 받고도 그처럼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놀라
운 일이었다.
그 때까지 팔짱을 낀 채 관망하고 있던 음소귀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가 품속에서 각기 한자 길이의 거무튀튀한 철조(鐵爪)
를 꺼내어 열 손가락에 끼우고 음악한 눈길로 도위충을 노려보았
다.
『흐흐흐... 도위충, 네놈이 날뛰는 꼴을 더 못 봐주겠다.』
수하들을 물러서게 한 그가 솔개가 병아리를 덮치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사납게 덮쳐들었다.
『좋다. 귀문(鬼門)의 사귀(四鬼)가 과연 어떤 솜씨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를 간 도위충이 그의 쌍권에 팽팽한 진력을 모으며 소리쳤
다. 음소귀의 철조가 허공 가득 현란한 조영(爪影)을 뿌리며 도
위충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잡아갔다. 마치 귀신이 흐느적거리듯
형체를 종잡을 수 없이 빠르게 움직이며 할퀴고 잡아오는 것이
사나운 중에 음침한 기운을 싣고 있었다. 그의 독문절기(獨門絶
技)인 귀영조수(鬼影爪手)였다. 서늘한 음기가 바람을 가득 몰아
왔다.
도위충의 눈에 언뜻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가 재빨리 칠성의
방위를 밟아 신형을 이동시키며 백호퇴산(白虎推山)의 삼권(三拳)
을 신중하게 때렸다. 권력에 실린 웅장하고 뜨거운 열기가 묵빛
조영의 음산한 그림자를 밀어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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