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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유로파 19호에서 이걸 쓴 기자가 직접 퍼온 글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필자의 귀차니즘이 커지다 못해 옆동네 기사로는 투고해도 여기에 쓸 생각을 못했습.. 아니 안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시 정신차리고 다시 쓰려고 노력할테니 많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짤들을 모두 구하고 편집해주신 월간 유로파 편집장님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며.
자 글을 시작합니다!
매사냥꾼 하인리히 1세, 오토 대제, 오토 왕가, 독일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모두 류돌핑거 가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매사냥꾼 하인리히 1세는 류돌핑거 가문 원이고 그의 아들이 오토 대제며 그가 개창한 왕가가 오토 왕가다. 즉 오토 왕가는 곧 류돌핑거 가문인 셈이다. 그럼 오토 왕가 이전의 류돌핑거 가문은 어떤 가문인가? 이제부터 다룰 내용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이 류돌핑거 가문의 중심지, 작센 공작령의 문장이다}
류돌핑거 가문의 시작은 작센공 류돌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센공 류돌프는 작센 백작의 - 혹은 동프랑크 왕국의 변경백- 브룬(혹은 브룬하르트)의 아들이다. 830년, 그는 25세의 나이에 프랑크 왕국의 총사령관격 되는 빌룽공의 딸인 오다와 결혼했다. 이후 그는 844년부터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서 주군인 동프랑크왕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신하로서 엘베강 동부 정복에 힘썼다. 고귀한 결혼과 이번 공로를 인정받은 류돌프는 대략 850년대에 작센 공작으로 승격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가 작센 공작이 된 것을 상징적으로 여기고, 그를 기점으로 류돌핑거 가문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류돌프의 가문이란 뜻인 류돌핑거라는 가문이름이 탄생했다.
{작센 공작 류돌프. Duke of Saxony Liudolf. 생몰 : 805?~866. 재위 : 844~866. 그는 류돌핑거 가문의 시조이자, 오토 왕가의 시조이기도 하다. 추가로 그가 다스린 작센 지역은 현재 작센의 위치와 다르다.}
또한 그가 이때 얻은 공작령과 영지는 이후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지속적인 동방 정복과 내부 분쟁을 통해서 확대되고 보강되어, 그의 손자인 매사냥꾼 하인리히 1세와 증손자 오토 대제가 왕위에 오를 때 기반이 되었다. 그는 845/846년에 아내와 함께 로마로 순례를 떠나 세르기우스 2세 교황을 만나고 그에게서 수도원 증축에 대한 허가를 받아 852년에 브룬스하우젠에 독자적인 수도원을 건설했다. 그리고 856년에 증축이 계획된 최초의 작센지역의 수녀원인 간더스하임 수녀원은 881년에 완공되었다. 초대 수녀원장은 그녀의 첫째 딸 하투모트라고 한다. 이후 그에 대한 큰 기록이나 사건 없는 것으로 보이며 그는 866년 3월 12일즈음에(864년이란 말도 있다)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사족으로 그의 부인 오다는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아 107세로 913년에 죽었다고 한다. 사후 그의 유해는 그가 지은 브룬스하우젠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가 지은 수도원이고 또한 그가 묻힌 수도원이기도 하다}
그의 작위와 영토는 모두 세습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분할되어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카롤링거 왕국들의 상황이 자아낸 지방영주들의 분권화 강화가 아닐까 싶다. 이런 증상들은 작센뿐만이 아니라 독일 내에서만 프랑코니아, 슈바벤, 바바리아에서도 목격되며, 프랑스도 여러 지방에서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났다. 즉 원래 비세습적이고 비영구적이었던 백작들의 제한적인 권한은 확대되고 세습적이고 영구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계속 심화되어서 전형적인 중세의 봉건제도를 낳고야 말았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류돌프의 작위와 영토는 그의 장남인 브룬에게 이어졌다. 브룬은 866년부터 880년까지 작센을 통치했다.
{작센 공작 성 브룬. Duke of Bruno. 생몰 : 830?~880. 재위 : 866~880. 그는 40세 (혹은 50세)가 되는 나이임에도 후계가 기록에 없는 것이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아마 동생 오토에게 밀려난 것인지 아니면 정말 후일 성인으로 추대된 것처럼 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일까}
아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부실하다.(사실 이때가 다 거기서 거기다) 아마 그의 치세는 지속적인 동방 정복과 계속되는 수도원 증축이 아닐지 싶다. 또한 874년에는 그의 여동생인 류트가르트는 자신의 주군인 동프랑크왕 독일인 루트비히의 아들인 젊은이 루트비히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는 왕의 외척으로써 작센지역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된 듯하다. 그리고 기록의 부실이 있다 했듯이 그의 결혼과 자손에 관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위에 서술한 대로 그는 아버지처럼 동방의 여러 이교도를 정복하고 점령지를 그들의 매서운 침공으로부터 방어했다. 그러던 880년 2월 2일에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영지를 침범한 바이킹의 - 웨섹스 왕국의 대왕인 알프레드에게 패배한 덴마크 바이킹들로 추정되는 - 침공을 방어하다가 '뤼네부르크의 황야' 라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여러 작센의 귀족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를 기록한 메르세부르크의 주교는 그가 후퇴하는 중에 강을 도하하는데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살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곳은 후일 브룬이 성인이 되면서 덩달아서 성지가 되어 여러 순례자들이 성지순례를 다녀간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통치는 갑작스레 중단되고 말았다. 여담으로 그는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성전'에서 순교한 것으로 간주되어서 이후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그 지역에서는 - 아마 작센 - 그가 전사한 2월 2일은 그를 기리며 축하하는 날인 '작센의 성 브루노의 축일' 이라고 한다. 그에게서 자식이 정말로 없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아마 동생인 오토 영광공에게 작위가 넘어간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아들은 적자가 아니거나 매우 어렸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기록에선 초대 브라운슈바이크 백인 브루너가 작센공 브룬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것의 진위는 영영 밝혀내지는 못할 듯하다.
{작센 공작 영광공 오토 1세. Duke of Saxony Otto I the Illustrious. 생몰 : 851~912. 재위 : 880~912. 여기서 오토 1세는 작센 공작 작위를 기준으로 했을 때다. 오토 대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고 작센 공작 기준으로는 오토 2세다}
그의 작위와 영토는 그의 동생 영광공 오토 1세에게 넘어갔다. 그는 형이 생존해 있을 때는 튀링겐의 변경백으로 지내다가 - 아직 변경백이란 지위는 "크루세이더 킹즈2"의 지방 관령처럼 하나의 관직이면서 비세습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세습화되고 말았는데 그 예로 오스트리아가 있다 - 880년이 되자 형이 전사해서 형의 지위를 물려받아 작센 공작이 되었다. 그의 작센 통치는 아버지, 형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주군의 문제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청년왕 루트비히 3세부터 뚱보왕 카를 3세, 카란타니아의 아르눌프, 유아왕 루트비히 4세까지 총 4명의 카롤링거 가문의 왕들을 섬겼다. 그런데 882년에 청년왕 루트비히 3세의 요절 이후 무능한 카를 3세는 887년에 폐위당했고 아르눌프는 899년에 병사했고 마찬가지였던 루트비히 4세마저 911년에 병사하는 기이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동프랑크의 왕 루트비히 4세. King of East Francia Ludwig IV the child. 생년 900~911. 재위 : 900(!)~911. 그를 마지막으로 동프랑크에서도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가 단절되고 만다. 그토록 가문에서 형제끼리, 혈족끼리 골육상쟁을 해온 인과응보가 아닐 싶다}
결국 더는 독일 내의 카롤링거 가문에서는 동프랑크의 왕으로 추대할 만한 자가 없고야 말았다. 로타링기아의 대영주들은 단순왕 샤를 3세를 동프랑크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라인강 동부의 대영주들은 이에 반대했다. 아마 타지역의 인물을 왕으로 섬기는 것에 대한 불만과 워낙 비대해진 지방세력이 돼버려서, 마치 하나의 국가를 다스리고 있었던 그들의 욕심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들은 비카롤링거 가문에서 왕을 스스로 추대하려고 했고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작센 대공 - 대공이란 칭호는 대략 그의 여동생이 카롤링거 가문과 결혼을 했기에 붙은 것 같다. 다만 여기서의 대공은 그의 작센의 세력권의 크기에 따라서 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오토 1세는 공석이 된 동프랑크 왕위를 두고 프랑코니아 대공 콘라트 1세와 경쟁했으나 곧 자신이 노령이란 이유로 왕위를 거부하고 오히려 콘라트 1세를 추대하는 데 찬성했다.
{프랑켄의 공작이자 동프랑크의 왕 콘라드 1세. King of East Francia Conrad I. 생몰 : 881~918. 재위 : 911~918. 그의 통합된 왕권을 향한 발부림, 그리고 일어난 비극, 이 모든 것이 카롤링거조 프랑키아 제국의 내분이 나은 유산일지도 모른다. 과연 카를 대제는 저승에서 자신의 제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동프랑크 왕으로 콘라트 1세가 즉위하면서 동프랑크는 더 이상 카롤링거 가문의 지배 하에 있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912년 11월 30일에 그는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장남인 매사냥꾼 하인리히 1세가 작센의 공작이 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류돌핑거 가문의 수장인 류돌프부터 독일왕 하인리히 1세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내용은 한결같이 동부로의 정복과 대영주간의 갈등으로 인한 산발적 전투들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교회를 적극 후원하고 수많은 수도원을 세웠다. 결국, 이는 당대 지식인인 주교들의 행정적, 법률적, 문화적 지식을 활용하고 기술을 발달시켜서 총체적으론 자신의 권력을 굳히려는 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런 시도는 전 카톨릭권 유럽을 막론하고 일어난 일이었다. 어쨌든 새로이 선출된 최초의 비카롤링거 가문의 독일왕 콘라트 1세는 모두의 기대와 달리 무리한 왕권 강화를 추진하다가 반란이 국가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결국 바바리아의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치세는 독일 내 대영주들에겐 너무나도 비호감의 연속이던 것인지, 그의 가문원이 남아 있었음에도 귀족들은 새로운 가문의 사람을 왕으로 선출하니 그가 바로 작센공 매사냥꾼 하인리히다.
{동프랑크의 왕 매사냥꾼 하인리히 1세. King of East Francia Heinrich I Fowler. 생몰 : 919~936. 재위 : 876~936. 그의 별명 매사냥꾼은 그의 권력욕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사실일지는....}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진정한 독일 왕조가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오토 1세부터 하인리히 2세까지 총 4명의 신롬 황제를 배출해낸 류돌핑거 가문의 족보다. 아쉽게도 오토 3세와 그의 친척인 하인리히 2세는 자식이 없었기에 결국 황가는 단절되고 만다. 그리고 타 가문 원들도 자식 복이 없었는지 '크루세이더 킹즈 2'의 대표 스타트 년도인 1066년에 류돌핑거 가문은 모두 단절되고 역사 속에만 남아있다. 만약 류돌핑거 가문을 크킹으로 즐기고프다면 샤를마뉴 시대나 올드갓 시대를 택해서 작센 공작을 픽해보도록 하자. 특히 올드갓 시대의 작센 공작은 앞서 소개한 영광공 오토 1세다. 물론 고증오류로 형 브룬이 오토의 봉신으로 남아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크킹을 해보고 싶군요. 동방의 곰을 잡으러.....
리틀핑거??
Ottonian dynasty 란 표현이 더 흔하게 사용 되어지지 않나요?
흔히 오토 왕가라고 불리죠. 다만 오토 왕가의 시초가 류돌프기에 류돌핑거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글의 목적이 류돌프부터 였기도 헤서 뭐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