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40
『그대로 있을 텐가? 사국천을 만나보고 싶다면 거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게.』
넋을 잃고 있는 육초량의 귀에 사내의 음성이 점점 멀어져가며
들려왔다. 기다리게.... 라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어디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육초량의 눈에 자욱한 화약 연기 너머로
산모퉁이를 돌아 달려오고 있는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사국천인 것 같았다. 천검과 지검도 서너 장 밖에서
낭패한 모습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수
가 없었다. 육초량은 사나이가 사라져간 방향을 보고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 * * *
『하하하... 아름다운 여인과 고독한 사나이의 사랑을 방해하려
는 자들을 내가 어찌 그대로 보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육초량은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자 라고 생각하며, 유쾌한
듯 웃고 있는 그 아름다운 사내 초유성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
다.
벌써 세 번째였다. 그는 언제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
게 만나게 되어 그 때마다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사라진 사나이
였다.
그들 곁에서 고른 숨을 쉬며 깊이 잠든 옥소음을 바라보는 초
유성의 눈에 한 줄기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육초량은 그
의 슬픔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항산 기슭의 길마읍 화
승루에 마주앉아 화주(火酒)보다 독한 허무를 들이키며 들려주던
그의 말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수련(水蓮)이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
운 여인이야...
수련을 부르며 그대로 엎어져 정신을 잃었던 사내. 빼앗긴 한
여인을 찾아 천하를 방황하고 있는 사내. 그가 지닌 그 아름답고
처연한 슬픔이 그를 바라보는 육초량의 얼굴마저 우울하게 했다.
『그대에게는 왠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육초량은 감사라는 말속에서 느껴지게 되는 타인과의 거리를
이 사나이, 초유성에게서만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초유성이 그
런 육초량의 마음을 안다는 듯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수행자, 그대는 육초량이라고 했지? 기억나나? 나에게 느닷없
이 무시무시한 일격을 날리던 때 말이야. 하하, 아찔했지. 그처
럼 사나운 일격은 처음이었거든.』
그 새벽 어스름 속에서 자신의 비연참 일격을 멋들어지게 타
넘고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던 그의 모습이 다시 보이는 듯했다.
육초량이 얼굴을 붉히고 겸연쩍게 웃었다.
『기억하고 있소.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워지오.』
『하하하...』
초유성이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그 때도 자네는 강했는데, 오늘 그 외팔이를 치던 모습이란...
그 때보다도 열 배는 더 강해져 있는 것 같더군. 참으로 놀랐네.
불과 두어 달 보지 못한 사이에 그처럼 발전해 있었다니...』
육초량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어쩐지 이 사내 앞에서만은 자
부심으로 오만해질 수 없는 그였다.
유등(油燈)이 가물대는 한적한 객사(客舍) 안이었다.
* * * *
『아, 육 공자... 소녀는...』
옥소음이 무너지듯 육초량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
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육초량의 눈에 후회와 번민, 그리고
연민과 사랑의 복잡한 빛이 뒤섞여 일렁였다. 초유성이 쓸쓸한
웃음을 남기고 훌쩍 떠나버리고 난 뒤였다.
육초량은 옥소음의 등을 쓸어 주며 그를 떠올렸다. 병부상서
양처량을 죽이고 수련을 되찾아 오기 위해 새벽을 기다리지 못하
고 홀로 북경으로 떠난 그였다.
(아무래도 따라가 도와줄 걸 그랬나 보다.)
더욱 어두워진 창문을 바라보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병부
의 상서를 암살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쩌면 그는
그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꿈만 같아요. 소녀가 이렇게 살아서 다시 당신 곁에 있을 수
있게 되다니...』
눈빛을 몽롱하게 적신 채 어느새 자신이 처했던 위험도, 앞으
로의 일에 대한 근심도 잊고 오직 충만한 기쁨으로 들떠 있는 여
인이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던 육초량이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옥소음의 처지가 가엾어서였다. 그녀는 이제 의지
할 아무 곳도, 아무도 없었다. 비천맹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일신의 무공마저 사국천에 의해 폐지되어 버린 지금, 홀로 강호
를 떠돌 수도 없었다. 육초량은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돌보아 주
고 지켜 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그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자신은 일정한 거처도 없고, 부양할 능력도 없는 떠돌이 수행
자에 불과했다. 언제 누구의 검에 패하여 죽을지 알 수 없는 불
안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직 검의 궁극을 추구
하고 있을 뿐, 따뜻한 애정에 대하여 눈뜨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옥소음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그녀를 보살펴 줄 것인가.
그런 생각들이 육초량을 답답하게 했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가엾음을 느껴서인지 옥소음은 육
초량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껴 울었다. 한없이 우는 그녀
의 눈물이 가슴 앞 옷섶을 다 적셔 놓았다. 육초량은 아무 말 없
이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의 답답함과 안타까
움만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더욱 아프게 했다.
『공자님, 소녀는 괴로워요. 제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한참만에야 옥소음이 젖은 얼굴을 들었다. 눈물을 닦으며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해 보이는 그녀를 본다는 것이 더 가슴아팠다.
『제가 오히려 공자님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다니...』
육초량은 그녀의 볼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현명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육초량이 진심을 담아 한 자 한 자 힘
있게 말했다.
『그대만 괜찮다면 나는 세상 끝까지라도 그대와 함께 가겠
소.』
견디기 힘들 험한 식사와, 험한 잠자리를 견뎌내야 한다고 차
마 말할 수 없었다. 온갖 위험들 앞에서도 가슴 조이며 참아내야
하고, 때로는 조롱과 멸시를 견뎌야 한다는 것은 더욱 말하기 힘
들었다. 그러나 옥소음은 육초량의 그 한 마디에 환하게 웃었다.
『아! 육 가가, 그 말씀이 정말인가요?』
* * * *
<지난 밤 가가의 말씀은 소녀에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주었
습니다. 절강성 항현(杭縣) 남쪽에 봉황산(鳳凰山)이 있습니다.
봄의 두견화와 가을의 단풍이 속세를 잊을만한 곳입니다. 그곳
불성암(佛性庵)의 자혜(慈慧) 노사태는 정이 많으신 분. 그분 곁
에서 당신이 뜻을 이루고 돌아오시기를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천
년이 지난 후에라도 찾아만 주신다면 소녀는 지금 이 마음으로
여전히 거기 있을 것입니다.>
한 장의 편지를 손에 쥐고 육초량은 눈가를 붉혔다. 옥소음의
그 깊은 마음에 목이 메어왔던 것이다.
창 밖으로 아침 햇살이 붉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북천일마(北天一魔) 단목굉(檀木宏)
가을이 짙어 있었다. 온 산에 만연한 단풍이 불길처럼 현란했
다.
하남성 등봉현에 위치하고 있는 숭산(嵩山)은 중원 오악 중 중
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산이다. 그것은 그 빼어난 산세보
다 소림(小林)이라는 하나의 산문(山門)으로 더욱 유명했다.
그 숭산 소실봉 아래 작은 모옥(茅屋) 한 채가 매화나무 숲에
둘러싸여 운치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인적 없는 깊은 산중이고,
더구나 소림사의 경내였으므로 외인의 출입이 있을 리 없었다.
창문에 턱을 괴고 앉아 종일을 바라보아도, 한가롭게 오가는 산
짐승들만 마당을 기웃거렸고,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모옥을 찾아
오는 유일한 손(客)이었다.
매화나무 가지에 내려앉았던 참새들이 후두둑 날아가고 난 뒤
에 어슬렁거리며 채마밭으로 다가오는 한 노인이 있었다.
헐렁한 홑옷 바지저고리에 새끼줄로 질끈 허리를 동이고, 짚신
을 신었다. 주름살 투성이인 얼굴에 몇 가닥 염소수염이 은빛으
로 바랬고, 눈에는 짓무른 눈곱이 끼었다. 영락없는 산중의 늙은
농사꾼이었다.
소림의 경내에 이와 같은 모옥이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늙
은 농사꾼이 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이상했다. 그러
나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노인의 밋밋한 머리가 어쩌면 그도 소림
의 화상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했다.
노인은 등에 지게를 메고 있었는데, 그가 위태롭게 걸을 때마
다 지게에 실린 커다란 나무통이 흔들렸다. 고약한 악취가 조용
하던 매화 숲을 흔들었다. 인분통이 분명했다.
채마밭에는 오늘내일 뽑혀지기를 기다리는 청무와 호배추들이
흐드러져 있었고, 그 한 귀퉁이에 웅덩이가 깊이 파여 있었다.
노인은 지고 온 통을 기울여 그 웅덩이 속에 인분을 쏟았다. 그
리고는 다시 휘청휘청 매화림 속으로 사라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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