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거[安居] , 죄 외 6편 / 박규리
안거, 죄
골짜기마다 치자 향기 흐드러지고 찻잔마다 산국 향기 흥건하고 눈 뜨면 사시사철 온갖 생명들의 서럽고 애잔한 눈물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이곳으로 놀러 오세요 신산하던 지난날도 생각해 보면 한 점 떨어진 꽃잎에조차 비할 바 아니어서 억울할 것도 서러울 것도 아니어서 가슴속에 품어 둔 시린 노래 한 소절 흥얼거리며 눈 감고 이곳으로 놀러오세요 가슴에 당신 품은 죄밖에 없는, 이 아늑하고 아득한 곳으로
안거, 파도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비질해도 마당엔 먼지 하나 일지 않고, 교교한 달빛이 사정없이 강을 뚫어도 물 위엔 흔적 하나 없습니다* 나도 언젠가 천길 마음 아래 닻 고이 내렸다 믿었건만, 스치는 한 줄기 그리움에 산산조각 난 상념의 파도는 이 밤도 벼린 칼이 되어 내 등을 맵게 후벼 팝니다
*야부도천冶父道川의 선시禪詩
안거, 구름 한 송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없는 줄 진즉 알아서 그동안 남몰래 사귀어 온 착한 구름 한 송이 불러다, 눈 감으면 마주보며 함께 웃다가 눈 뜨면 무작무작 함께 졸다가, 꿈 아닌 꿈길에선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비애와 칡넝쿨에 달라붙은 초월의 마른 잎도 몇 오물거리며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일없이 앉았습니다
안거, 강
애욕에 겨워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 희열로 터져 오르는 웃음소리, 그리움에 타는 탄식 소리, 죽어 가는 이의 거친 쇳소리,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통곡소리, 깨달은 자의 무심한 숨소리… 갈래갈래 서로 다른 길을 품에 안은 남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환희와 비애가, 만남과 이별이, 삶과 죽음이, 장엄하게 흐르는 그 강을 따라 천 근 같은 생살을 끌고 나도 따라 흘러갑니다
안거, 아찔한 삶
소낙비 그치자 산안개 뭉실 피어오릅니다 그 사이로 무언가, 빛 같은 무언가가, 한순간 피었다 사라집니다 미처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미처 잡지도 못했는데, 아직 그게 무언지도 모르겠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나타났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저게 목숨이 아니라면, 저게 이 아찔한 삶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안거, 그러려니
이제 그만 하자, 그만 하자, 그리 다짐해 놓고도 또 그립고 그리워 목메는 밤입니다 어디 내 마음이라고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외로움에 담담해지는 것
그리움에 그만해지는 것
뼈마디 쑤시는 일에 무던해지는 것
그러다 문득 마지막 그날이 오면
잠결에 자던 베개 하나 옆구리에 끼고
슬그머니 건넛방으로 넘어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ㅡ박규리 시집 『사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