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이후 중공군 수에대해 많은 이론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최대 30만명이 1950년 10월에서 12월사이에 투입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당시 UN군은 크게 함경도 일대와 평안도 일대로 나뉘었는데 중간엔 고산지대가 있어서 상호간 연결이 잘 되지 못했습니다.통신도 두절되기 일수였죠.
게다가 맥아더장군은 중공군의 참전에대해 믿지 못했습니다.
10월 유엔군 정보부서는 압록강변에 중공군 병력의 집결을 확인하였으나 총사령관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았고 유엔군 하급제대는 중공군개입에대한 정보없이 계속 진격하여 10월말경엔 국경지역인 압록강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 참전의 징후가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었으며 미제8군 및 한국군의 각 단위부대가 중공군과 조우하기시작하였고 10월25일 국군 제1사단은 최초로 운산 부근에서 중공군 포로를 생포,유엔군 사령부에 보고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중공군 포로에 관한 보고가 속속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부는 애써 이를 축소하고 중공군 개입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10월 중순부터 중공군 제4야전군 소속 제13병단은 약20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으며 제13병단은 3개보병사단으로 구성된 6개군,각 군의 병력수는 약 3만명이며 이외 2개의 포병사단,독립포병대,기병연대, 2개의 트럭연대로 구성되어 10월 25일 부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제1단계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여습니다.
이후 제3야전군의 일부인 제9병단이 11월초 3개군을 이끌고 만포진과 린창이란 곳을 통하여 압록강을 도하하여 진입하였습니다.
결국 11월23일까지 압록강을 도하, 유엔군에게 공세를 취하게 되는 중공군의 병력은 약30만에 이르게 되었고 유엔군의 정보부는 이러한 중공군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중공군의 철저한 기도빈익에 의한 야간행군 및 야영규율,산악지대에 난 보조도로를 통한 이동등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유엔군은 영국제 모스키토 항공기 외엔 육안 정찰을 위한 항공기를 이용하지 않았고 또한 이용가능한 항공정찰기들은 모두 압록강변 교량공격 지원에 투입되어 중공군 제13병단의 도하를 놓쳤고 이어 제9병단의 도하마저 놓치게 됩니다.
압록강변의 만포진과 린창의 교량은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폭격목표에서 밀려나 있어 이 곳을 통해 중공군은 손쉽게 침투할 수 있었으며 유엔군은 정찰대에 의한 지상정찰에서도 차량을 이용해 산악지대에 난 정규도로에서만 순찰을 함으로써 산악 깊숙이 매복한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은 인민해방군중에서도 최상의 부대였는 제4야전군은 린 피아오(임표)가 사령관인 최상의 야전부대였으며 그 휘하 제13병단은 '철의부대'라고 호칭되는 국공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부대이며 첸이가 지휘하는 제3야전군 휘하 제9병단은 '분쇄부대'라고 불리울 정도의 정예부대였다.
이들은 포병의 열세.공중지원은 전무한 대량의 보병사단이고 무기의 수준도 떨어지나 국공내전을 통한 풍부한 전투경험(2차대전 당시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이 있는 고급장교가 상당수였다고 함)과 높은 사기등이 중공군으로 하여금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10월말에서 11월초까지의 제1단계 전초공세에서 중공군은 제13병단만의 단독 공격을 중지하고 제9병단이 이동완료하기까지 기다리게 됩니다.이 1차 공격과정에서 중공군 사령부는 UN군이 중공군과의 확전을 바라지 않고 있으며 또한 UN군과의 교전에서 얻은 전투평가에 대단히 만족하고 약30만의 2개병단 병력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당시 중공군의 부대배치는 강력한 상대방과 대면하였을 때 사용되어온 전통적인 중공군의 기동방어 작전개념에 입각한 것으로 거점을 고수하지 않고 짧은기간내에 신속한 전투로 적을 격파하는 것으로 공격전략은 적과 조우하여 적의 대규모 공격을 유발하고 지연작전을 펴는 동안 자신들의 공격부대를 적진 깊숙이 돌파시키고 미리 선정된 목표지점과 시기에 갑작스러운 반격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전술입니다.
이에 따른 중공군의 부대운용으로 유엔군은 10월말부터 11월까지 중공군의 전초부대만 접촉하게 되어 주요부대는 파악치 못하였으며 중공군 제13병단이 11월6일 작전을 멈추고 산악지대로 사라지자 이을 중공군이 약세임을 인정하고 후퇴하는 것이라 단정,중공군이 매복하고 있는 산악지대로 공격을 재개하게 됩니다.연말까지는 전쟁이 끝나고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갈 수있다는 낙관론에 휩싸인 채로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합니다.
1950년 11월 24일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내리고 미8군휘하의 각 부대들은 전진을 개시합니다.미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정주와 태천을 향하여 휘하 2개 사단을 전진시키고 미9군단은 킨 소장이 지휘하는 25사단2개연대와 기갑부대인 dolvin특공대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운산방면으로 전진시시킵니다.카이저 소장의 미 제2사단은 9군단 우측에서 전진하였으며 한국군 제 2군단(유재흥소장) 휘하 제 7, 8사단도 진군하였고 공격개시 당일에는 별다른 적의 저항없이 순조롭게 공세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워커장군은 동부전선의 미제10군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중앙의 한국군 제2군단에게 진격속도를 늦출것을 지시하고 26일에 계획대로 본격적인 진격을 개시할 예정이었습니다.
11월 25일 유엔군의 공격에 전초부대만으로 산발적인 접촉을 하던 중공군은 드디어 매복하고 있던 산악지대에서 튀어나와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제13병단은 청천가의 미제1,9군단과 한국군 제2군단을 목표로,제9병단은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을 목표로 해 장진호 방향으로 진출합니다.
11월25일 밤 군우리 북방 청천계곡 중심부까지 진출한 제9군단 휘하 미 제2사단의 제9연대와 제23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고 25사단과 구룡쪽의 돌빈특공대에도 공격을 가해 미군은 최전방의 2개의 산악진지중 하나를 잃어 버립니다.
중공군제38군 및 제42군은 11월25일 미 제8군의 우측을 담당하던 한국군 제2군단을 공격합니다.징과 꽹과리,괴성등으로 방어중인 국군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며 좁은 아군 방어진지에대한 집중적 병력운용(보통 인해전술이라고 비하하는데 순간적인 정보판단에 의해 아군 약점을 집중공격하는 중공군 지휘관이 구사할수있는 고도의 전술입니다.)으로 쇄도하여 국군제2군단이 진출해 있던 덕천을 덮쳤고 국군제7사단과 6사단,8사단도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국군 제2군단은 혼란속에서 붕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유재흥소장은 이듬해 3군단장으로 부임해서도 동일한 포위공격으로 군단(예하 3,9사단)이 전멸당하는 비운을 맛보게되죠)
미 제2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26일 저녁, 우측의 한국군 제2군단의 붕괴로 청천강지역에 전개한 미제8군의 우축면이 완전히 와해된 것을 알고 후방의 군우리로 철수하기 작하였고 국군 제2군단의 붕괴로 우측측면이 와해되자 미 제9군단은 터키여단을 덕천 방향으로 진출시키나 오히려 중공군의 매복으로 극심한 손실만 입고 터키여단은 겨우 빠져 나옵니다.
11월28일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공세의 종결을 선언하고 전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미 제8군의 철수는 제군단의 엄호하에 제1군단이 먼저 철수하고 후속해서 미 제9군단도 철수하기 시작하나 최우익에 있던 미 제2사단은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난 도로로 철수하는 도중 조통강 계곡에서 도로 양축에 매복해있던 중공군의 소총과 박격포 공격에 극심한 손싱을 입게 됩니다.중공군은 우선 좁은 도로에 진입한 미군의 선두 전차와 차량대열을 로켓포와 박격포로 공격하여 진로를 막은 뒤 선두의 상황을 모른 채 계속 진입하던 후속부대들의 차량들이 병목현상으로 정체하자 마음껏 포화를 퍼부었으며 결국 미 제2사단은 3천명의 병력손실을 입게 됩니다.
결국 12월초 유엔군은 38선으로 총퇴각을 하게 되고 38선에서 방어선을 치게 됩니다.
네이버 : ekhonn님
첫댓글 교과서에는 1.4후퇴에 대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우리군은 역부족으로 후퇴했다는 식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쓰여져있는데... 삽질이 심했네요. 그래서 퍼옵니다.
흠 한줄로 정리하면 정찰을 안한 탓으로 중공군의 사령부를 파악하지 못한것과 중공군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은 맥아터의 판단으로 된것이 1.4후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중공군 사령부를 파악하고 중공군 개입을 인정했다 하더라도 40만 이상의 대병력이 한번에 밀고 내려오면 그 당시에는 저지할 화력이 부족했으니 똑같이 후퇴했으리란 판단입니다, 다만 얼마나 피해를 입었느냐 차이겠죠.
평양정도 선에서 방어로 전환했다면 방어가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압록강쪽은 동서로 워낙 넓어서... 미8군이라면.. 2차세계대전 서부전에 패튼의 미3군 정도의 규모라면 지형규모가 한반도 평양축정도라면...
콜디스트 윈터라는 책에 의하면 중국은 외교적으로 한국전 참전을 선언했고 그에 따라 워싱턴에서 맥아더에게 지속적으로 경고도 했었고 예하부대들은 중공군 포로까지 잡아다가 보고했지만 맥아더는 38선 이북 공략에 대해서 이미 워싱턴 행정부와 사이가 틀어져있었으므로 자기가 원한 정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지 못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만약 중공군 참전 사실이라면 자기가 밀어붙인 사안에 문제가 생기니까요.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다고 하네요. 맥아더의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센 성격도 한몫 한듯
그 당시 최대의 삽질은 국군이었습니다. 정확한 사단명이 생각이 안나지만 워커장군을 비롯한 미군과 여러 국군 장군이 중공군 참전이나 북한군의 추가 저항을 예비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여 꾸준히 압록강으로 진격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국군의 한 사단이 평양에 먼저 도달하겠다고 그 방어선을 빠져나오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뒤틀린 방어 계획은 그 틈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국군을 막을 수 없었고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각개격파되었다고 합니다.
미 10군단과 함께 정식 작전부대인 1사단을 제외하면 당시 평양에 입성한건 7사단 예하 8연대 인데
7사단은 미군 명령계통과는 별계로 육본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진입했습니다.
기존의 설은 크릭스마리네님이 위에서 하신 말씀 처럼 중공군의 침입에 대비하지 않고, 빠른 전쟁 종결을 위해 우리하게 진입한 탓이라 보고 있죠. 실루님이 말씀하신건 새로운 견해네요.
제가 밑에 설명을 달았습니다.
맥아더장군이 긴 전쟁이라도 확실하게 이길 생각으로 밀어 붙엿으면 정말 세계3차대전이 일어났을까? 이런 생각도 나름 드네요
국군이 평지로 쭉쭉 올라오는동안 중공군은 산타고 쭉쭉 내려오는 기이한 현상
이런말 하긴 좀 뭣하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국이 전쟁을 그리 잘한적은 없습니다.
국제정치학적으로도 중국의 발언신뢰도(대외적으로 한 발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성향)은 매우 높이 평가받지요. 만날 한국전쟁 이야기 나오면 한국사람들은 '중공의 불법개입'이라며 치를 떠는데 크릭스마리네님 말씀대로 전혀 불법개입이 아니었다는 거....유엔군이 청천강 넘는 순간 바로 참전할 것이라고 워싱턴에 통보해 두었죠.
제가 말씀드린것은 우리나라의 KODEF 안보총서 "히든제너럴"에서 따왔습니다. 미 10군단 등 맥아더를 비롯한 UN사령부와 여러 미군단들은 경고를 무시한채 무리하게 북진을 강행했고 그 결과 전선이 3배 이상 넓어지게 되어 부대간 연락이 부실해지고 연계가 힘들어졌습니다. 그 와중 전선 중앙을 책임지던 국군 2군단이 평양을 반드시 미군보다 먼저 선점하라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고 주력인 7사단을 우회시켜 평양에 진주시켰습니다. 그렇게 중앙에 뚫린 간격으로 중공군이 뚫고 들어왔죠. 그리고 미군 제1 기병사단이 국군을 추월하려고 중공군을 무시하고 내달리다가 그대로 무너지면서 다시 후퇴의 길에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