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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육산악회-8월산행-후기
일시:
장소: 무갑산
참석: 박정천(회장), 김경흠(총무),
산행경과:
9시15분경 동서울터미날에서 13-2번 퇴촌행 버스를 타고
박회장이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이미 전주에 혼자 선등답사(先登踏査)하며 코스를 미리 살펴보고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적어 한적한 장소와 코스를 점 찍어 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앞서 세밀하게 산행을 계획하는 박회장에 대해서는 몇 마디의 찬탄으로는 표현할 길은 없고 그저 열심히 함께 동참하여 산행을 즐기는 것만이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을회관 옆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능선에 오르기까지 전날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길인지 개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인데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없어 꽤 덥고 땀이 줄줄이 흘러 그리 길지 않은 오름 길은 상당한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정상 근처에 있는 삼거리 길에 위치한 통신컨테이너에 다다르니 점점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햇볕이 쨍 하니 푸르렀던 녹음을 더욱 짙푸르게 비춰준다.
하산 길은 관산으로 향하는 웃고개에서 무갑리 계곡으로 내려가는데 점점 계곡의 물이 많아져 물소리가 요란하다. 넓은 계곡의 초입(初入)에서 모두 등산화를 벗고 물놀이를 즐기다 아예 옷 젖은 김에 등목까지 하게 되었으니 참 오랜만에 이런 물놀이까지 하게 되었다.
무갑산(武甲山)은 산세가 갑옷을 두른 듯하다 하여 불렸는데 우리가 이번에 걸었던 코스는 산과 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원점회귀 산행으로서 승용차로도 쉬이 다닐 수 있다. 무갑산 만을 도는 산행이 조금 짧다 싶으면 관산까지 돌아도 되는데 1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가 더 소요된다고 한다. 물론 건각의 산사나이라면 무갑산에서 양자산까지 4개의 큰 봉우리를 넘나드는 종주산행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반 버스편으로는 광주로 가서 무갑산행 버스로 오고 갈 수 있으나 운행회수가 적어 불편할 듯---우리는 뒤풀이 식당에서 제공한 소형버스로 광주IC입구에서 동서울터미널행 1113-1좌석버스를 타고 귀경하였다.
특기사항:
--오랜만에
--김경흠이 부지런하게 유니폼을 받지 못한 친구들을 파악하여 유니폼을 나누어주었다. 여럿이 유니폼을 입으니 귀여운 병아리(?)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ㅎㅎ
--전종하가 장인상에 많은 위로를 받아 고맙다고 하며 금일봉을 희사하였다.
--다음 일요일은 총동문산악회에서 홍천으로 간다고 하니 많은 동문의 참석바랍니다.
--이제 어느새 여름도 안녕하고 말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화살 같이 빨리 흘러가는 세월아! 너는 참으로 야속하구나.
陽川閑談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옛날 이야기 중에 황후나 왕비가 유별나게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오랜 삶을 살면서 대하드라마의 진수(眞髓)를 보여주는 예가 많이 있다.
프랑크 왕국의 왕이면서 로마교회의 영웅으로 간주되었던 클로비스는 유럽전역을 거의 정복하였으나 죽을 때 게르만족의 부족관념에 따라 네 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하여 주었다. 공평하게 나누어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론적인 것일 뿐으로 남의 땅이 좋아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로서 서로 영토를 빼앗기 위하여 근 50년간을 싸운 결과 558년에 막내인 클로테르(Clotaire)가 재통일을 이루었다.
물론 그 동안 형제간의 격렬한 투쟁을 거치면서 다른 게르만족의 왕국도 병합하여 이때 쯤에 프랑크 왕국은 드디어 현재의 독일과 프랑스의 영역에다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클로테르가 561년에 죽으면서 그도 역시 아들 4명에게 땅을 분할해주었으니 그의 아들들이 이전에 그가 벌였던 처절한 투쟁의 전철(前轍)을 또다시 밟게 된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일까?
클로테르의 큰아들 하리베르트(Charibert)에게는 파리 일대, 둘째 군트람(Guntram)에게는 부르군드와 오를레앙(프랑스 남부), 셋째인 시게베르트(Sigebert:535-575)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sia;라인강 유역)를, 막내 힐페릭(Chilperic:539-584)은 스와송(파리 동북쪽) 일대를 주었다.
시게베르트는 조금 특이(?)한 성격을 가졌다는데 그것은 그의 형제들이나 자기네 부족의 호색(好色)기질을 싫어해서 조금이라도 고상(高尙)해지고 싶었다나?
그래서 교양과 미모를 겸비하였다고 소문이 난 서고트(Visigoth-지금의 스페인 지역에 있었다)의 왕녀 부룬힐다(Brunhilda:543-613)에게 구혼하여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 막내였던 힐페릭은 물려받은 영지가 형제 중 가장 작은 소국에 불과하여서 내심 못마땅하여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이 서고트의 왕녀와 결혼하게 되자 잔머리를 굴리게 되었다. 즉 형과 결혼한 부룬힐다에게 동생이 있는데 그녀 역시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에 필(feel)이 딱 꽂혔다. 이제 그녀와 결혼하면 미인도 얻고 서고트왕국과 형의 나라와 깊은 삼각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 호색과 세력확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567년 힐페릭은 부룬힐다의 동생 갈스빈타(Galswinta)를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하자 마자 문제가 생겼다.
우선 힐페릭은 첫 왕비 오도베라(Audovera)와 사이가 나빠 그녀와 헤어지고 그녀의 시녀였던 프레데군트(Fredegund)와 눈이 맞아 있었다. 게다가 갈스빈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힐페릭의 호색기질을 싫어하여 첩들을 전부 내보내라고 독촉을 하였기 때문에 힐페릭은 금새 갈스빈타에게 싫증나고 말았다.
이런 남편에게 실망한 갈스빈타는 결혼하였던 다음해인 568년 시집올 때 지참금으로 가져왔던 재보(財寶)와 영지(領地)들은 되돌려 받지 않을 터이니 단지 몸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힐페릭은 진퇴양난의 입장으로 빠져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비의 자리에 욕심을 가지고 있던 ‘질투덩어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레데군트가 힐페릭을 꾀어 그녀를 죽이게 하였고 그녀는 원하던 왕비 자리를 꿰어 찼다.
여기에서부터 부룬힐다와 프레데군트의 처절(凄切)한 30년 혈투(血鬪)의 막이 오른 것이다.
동생의 죽음을 알게 된 부룬힐다는 격분하여 남편 시게베르트와 아버지에게 호소하여 그 연합군과 힐페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575년 수적우세(數的優勢) 속에서 승리를 목전(目前)에 둔 시게베르트가 프레데군트가 보낸 자객으로부터 독을 바른 단검을 맞아 죽었다. 한 순간에 패전의 고배를 마시게 된 부룬힐다는 포로가 되었다.
이때 부룬힐다의 미모때문이었는지 무언지는 알 수 없으나 힐패릭의 첫 왕비 오도베라의 아들이었던 메로베((Merovech)의 머리 속에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는 힐패릭의 맏아들이지만 아무래도 왕위는 힐패릭이 사랑하는 프레데군트의 자식에게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래서 포로가 된 부룬힐다와 결혼하면 죽은 시게베르트의 땅 아우스트라시아(독일지역:부룬힐다가 계승권이 있으므로--)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갖은 핑계와 수단을 떨어 부룬힐다에게 접근하였고 드디어 그녀와 결혼한다고 세상에 공표(公表)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반대역풍은 거셌다. 그것은 제 동생의 아들과, 또 백모와의, 결혼이니 당연한 것이었고 힐페릭과 프레데군트에게는 더욱 찬성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복수의 일념과 왕위에 대한 집념이라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반항하다 힐페릭의 군대에 쫓겨 로마교회의 성당으로 피신하였다가 또 다시 포로가 되었다.
힐패릭은 그들의 결혼을 무효화시키려고 아들 메로베를 성직자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메로베는 모든 일이 틀어지자 시종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하는데 한편에서는 프레데군트가 메로베 뿐 아니라 그들의 결혼을 주재하였던 사교까지도 자객을 보내 죽였다고 하는 설이 있다. 아마도 어쩌면 후자가 좀더 개연성(蓋然性)이 있을 듯하다.
어쨌든 메로베의 덕택으로 석방되어 아우스트라시아로 돌아간 부룬힐다는 아들 힐데베르트 (Childebert)2세를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으로 들어앉아 왕국을 주물렀다.
그녀는 섭정정치를 반대하는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해치우고 여왕처럼 군림하며 아우스트라시아를 개혁하였다.
로마제국의 행정을 본 따 행정을 개혁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교회, 수도원, 요새를 확장하였으며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게다가 어린 딸을 서고트의 왕자 헤르메네길트(Hermenegild)에게 시집을 보내 아버지의 나라와 강력한 유대를 엮어놓으려 했으나 헤르메네길트가 로마교회로 개종하며 종교전쟁을 일으켰다가 부부가 모두 죽어 헛수고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모두 프레데군트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니만큼 이러한 부룬힐다를 두려워한 힐페릭과 프레데군트는 은밀히 공작(工作)을 하여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들로 하여금 부룬힐다를 암살하게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이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이들간에 숙명적인 전쟁이 벌어져 584년 힐페릭이 죽고 궁지에 몰린 프레데군트가 교회로 숨어들어가 힐페릭의 둘째 형 군트람으로부터 보호받았으나 결국 597년에 죽음으로써 부룬힐다와 프레데군트 사이에 벌어진 30년간에 걸친 증오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부룬힐다는 아들이 죽은 후에는 손자, 그리고 손자가 죽은 후에는 증손을 왕위에 앉히고는 사실상 여왕처럼 프랑크 왕국을 지배했다. 그사이 그녀의 강압정치로 귀족들은 그녀를 미워했지만 로마교회로부터는 로마교회의 수호자로 찬양 받았다. 그것은 그녀는 원래가 이단이었던 아리우스파였으나 시게베르트에게 시집오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영광도 한때, 드디어 그녀 나이 70이 되던 613년 그녀의 압제(壓制)를 뒤집어 엎으려는 귀족들이 프레데군트의 아들 클로테르(Clotaire)를 왕으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양측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진하게 되었는데 인심을 잃은 부룬힐다는 자신의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부룬힐다는 벌거벗겨진 채 머리털과 팔 하나, 다리 하나만 말꼬리에 묶여 매달려진 채 거리를 질주(疾走) 당하는 참혹한 죽음으로 생을 끝냈다.
부룬힐다는 프레데군트에 의해 여동생과 남편 둘을 잃고 프레데군트는 부룬힐다의 반격으로 남편을 잃고는 죽었고 다시 그녀의 아들이 부룬힐다를 죽였으니 그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무협소설의 그것과 다름없다.
부룬힐다처럼 처절한 전쟁과 복수극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만큼이나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세월을 보낸 사람이 전한(前漢) 후기의 왕정군(王政君: BC71-AD10?)의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대하드라마로 제작한 “모의천하”(母儀天下)의 주인공이다.
왕정군은 18세 때(BC51?) 궁녀로 들어갔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모르나 어떻든 나중에 권력다툼으로 죽는 날까지 암투를 벌이게 될 부(傅)씨와 풍(馮)씨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외로운 궁궐에서 서로 친 자매처럼 지냈지만 결국은 누가 태자비가 되느냐를 가지고 암투를 벌이게 된 것은 궁에 들어온 이상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닌가 싶지만 왕정군은 그러한 갈등(葛藤)에 초연(超然)하고자 했다. 그녀라고 하여 태자비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없을 리가 없겠지만 유순한 그녀는 참소와 질투를 억제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도리어 그런 그녀를 하늘이 예쁘게 보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와 행운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러 흥륭(興隆)의 정점(頂点)에 이르렀던 전한은 이후 서서히 쇠퇴하는 조짐을 보였다. 무제 이후 소제, 선제에 이르기 까지 별다른 외환은 없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무제 당시의 외정으로 인해 국가재정의 궁핍으로 경제질서가 무너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져 사회가 불안하게 되었다.
이런 때 선제(宣帝: BC91-49)에게 아들 원제(元帝=劉奭: BC76-33)이 있었으나
이를 일찍 죽은 생모대신 원제를 길러왔던 왕황후가 듣고는 어떻게든 태자비를 들이도록 강요하여 원제도 그야말로 싫은 것을 억지로 참고 태자비를 간택하는데 동의하였다.
이때의 에피소드가 천고(千古)에 없을 대단한 해프닝이다. 태자비 예비후보로 선발되어 원제의 앞에 늘어선 절세가인(絶世佳人) 5명의 후보를 놓고 억지로 끌려 나온 그는 여자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아무렇게나 손가락으로 지명한 것이 바로 왕정군이었다. 그렇지만 왕황후가 보기에 왕정군이 그 중 가장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제일 현숙(賢淑)하게 보였는지 그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태자비로 간택된 왕정군은 뜻밖의 행운을 잡게 되었지만 그날부터 그녀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다른 궁녀들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특히 자매처럼 지내기로 약속했던 부씨는 자신이 훨씬 태자비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아니꼬운 왕정군의 앞에서는 웃고 친한 척했지만 기회만 되면 등뒤에서 칼을 꼽으려 들었다.
이때 왕정군에게 또다시 행운이 찾아 들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을 것을 염려한 왕황후는 원제에게 매일 궁녀들의 침소를 찾도록 재촉하여 원제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할 수 없이 어머니의 말대로 행하였는데 그러다 그는 부씨의 미모에 빠져 부씨를 아끼게 되었다. 왕정군은 말이 태자비일 뿐 뒤에 홀로 처박혀 궁내에서 부씨의 세력에게 밀리고 있었다.
이때 어머니의 강권(强勸)에 의해 어느 날 밤 딱 한 번(!) 왕정군을 찾았는데 그 하루 밤이 왕정군의 일생을 결정 지운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어쨌는지 그날 이후 왕정군은 아기를 잉태하여 드디어 성제(成帝=劉鰲: BC51-7)를 낳았다.
아기를 낳자 선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기를 손수 기를 정도였으니 태자 폐립의 생각일랑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 덕분에 왕정군은 남편의 깊은 사랑은 받지 못했어도 시부모의 사랑으로 버틴 셈이 되었다.
성제가 2살이 되었을 때 선제가 죽고 아버지 원제(유석)가 승계하였다. 이때까지도 왕정군은 뒷방 신세나 마찬가지로 원제는 부씨와 풍씨를 총애하였기 때문에 왕정군을 황후로 봉하지 않고 미적거렸다. 사실 그의 마음에는 부씨를 황후로 봉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엿이 황태자를 낳은 어머니로서 안팎으로 잡음이 없는 왕정군을 황후로 봉하지 않은데 대하여 중신들이 잘못임을 간하자 하는 수 없이 왕정군을 황후로 봉하고는 부씨와 풍씨에게는 소의(昭儀)라는 새로운 직제를 마련하여 부소의, 풍소의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소의의 지위는 승상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더욱 왕정군을 괴롭힌 것은 아들 성제(유오)가 별로 재능이 뛰어나지 못한데다 그에 반해 부씨의 아들 유강(劉康)이 훨씬 다재다능하여 원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항상 위태로운 마음이었던 것은 언제 원제의 마음이 홱 바뀌어 황태자 자리를 바꾸랄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외견상 황후이면서도 실세(實勢)로 군림하지 못하고 언제나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몸조심하며 살고 있는 왕정군은 궁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100점 만점의 현숙한 황후로 칭송을 받게 되었으니 화가 복이 된 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 것일까?
기나긴 16년이라는 인고(忍苦)의 세월이 흘러 원제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또 다시 위기가 닥쳤다. 원제가 부씨와 정도왕(定陶王)으로 나가있던 중이던 아들 유강을 부른 것이다.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유언으로 태자의 지위가 바뀔 가능성이 농후했다. 왕정군은 모든 수단을 다해 부씨와 유강이 원제를 면회하는 것은 막았다. 그런 결과 드디어 아들 유오(성제)가 제위에 올랐다.
아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았지만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들 성제였다.
성제가 26년간을 제위에 있었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고 주색에 몰두했다. 뒤에 절세미인(역사상 절세미인이 하도 많은지라 과연 누가 1등미인일지는 알 수 없으나--)이라는 조비연(趙飛燕)과 조합덕(趙合德) 자매에게 빠져 조비연이 성제의 황후로 까지 입신 출세하게 되자 그녀들의 권세는 왕정군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그 이야기는 훗날 따로 비연외전(飛燕外傳)이라는 일종의 다큐소설까지도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나 자매는 성제를 더욱 깊은 쾌락의 늪으로 빠뜨리기 위해 각종의 최음제(催淫劑)를 과다 사용하여 성제가 급사했다고 한다.
성제가 그러하였으니 황태후가 된 왕정군은 스스로 정치를 관장하여야만 했다. 이젠 부씨의 위협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조비연 자매는 황제의 위세를 믿고 세력을 쌓아 대항하려 하였기에 또 다시 인고의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전과 달리 힘이 되는 것은 친족이었다. 황태후의 위세를 업고 왕씨 일족이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들 일족이 외척세력이 되자 권력을 전횡하게 되고 교만과 사치에 빠지는 자도 있어 반대여론과 비난도 있었으나 왕정군이 그런 일족(一族)은 퇴출시키려 하였고 대부분의 왕씨 일족이 대체로 실력과 재능이 있었고 재물을 모으지 않고 백성들에게 나누며 정무(政務)도 비교적 엄정하게 하였기 때문에 큰 탈 없이 정치를 해나갈 수가 있었다.
이때 왕정군의 총애를 받으며 급성장한 사람이 왕망(王莽)이다. 그는 왕씨 일족이었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고아가 되었기에 왕정군의 동정(同情)을 받게 되었는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위에 검소하였다. 그래서 왕정군은 왕망을 중하게 등용하여 젊은 나이에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왕망은 겸손하고 검소한 생황을 하여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왕정군에게 다시 위기가 닥친 것은 성제가 급사하였을 때다. 성제가 아들이 없어 원제의 둘째 아들 즉 부소의의 손자인 유강의 아들 애제(哀帝=劉欣)가 제위를 승계하게 되었는데 원래 그 일은 왕정군의 뜻은 아니었다.
애제(유흔)이 태자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성제의 애첩들인 조비연 자매에게 유흔의 조모 부씨와 어머니 정씨가 뇌물을 먹이는 등 갖은 수단을 다하여 서로 한편이 되어 만들어 놓은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왕정군과 싸워왔던 부소의는 다시 한번 왕정군을 제압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황제의 조모인 부태후와 황제의 어머니인 정황후에 더하여 풍씨가 함께 새로운 외척으로 등장하여 정권을 쥐자 왕씨들은 쫓겨나고 왕망도 물러났다.
그러나 부씨와 정씨의 외척들은 평범한 인물들로 모두 교만하고 사치만 쫓아 민중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이 동안 왕씨 일족과 특히 왕망의 경우 근신하며 절제하는 생활태도를 보이자 도리어 왕망의 명성만 높아졌다.
부태후는 제대로 권력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애제의 모친 정씨와 함께 2년도 채 되지 않아 차례로 사망하여 왕정군과 부소의의 50여년의 암투는 종막을 고하였고 BC1년에는 애제마저 급사하였다.
이때 부씨의 위세에 눌려 또다시 궁에서 연금당하다시피 지내왔던 태황태후였던 왕정군은 애제가 죽은 소식을 듣자 즉시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의 옥새를 수중에 넣어 친위대를 장악하고는 왕망을 소환하여 복직시키고 다시 원제의 손자 평제(平帝=유연:원제의 셋째 아들이자 풍씨의 아들인 유흥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다.
제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9세에 불과했으니 당연히 왕정군이 조정에 나가 황제 대신 조칙을 내리고 왕망이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게다가 평제의 모친 위씨와 조모 풍씨의 일족을 미리 유폐시켜 새로운 외척의 등장을 미리 방지했다. 그래서 평제가 즉위 년간에는 조정에 왕씨 외에는 다른 정치세력이 있을 수 없었다.
그 평제도 재위 5년 만에 죽고 왕망은 겨우 두 살난 선제의 먼 현손(玄孫) 영(嬰)으로 하여금 황제 위에 앉혔으니 이제 한나라 조정은 왕씨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영을 허수아비로 앉혔던 왕망은 자칭 가황제(假皇帝 또는 攝皇帝[섭황제])로 칭하다가 8년 드디어 선양의 형식으로 신新)나라를 창업하였는데 왕망의 성공(?)은 무능한 군주와 나이 어린 군주의 등극에 있고 그에 따라 외척과 관료, 환관이 정치에 관여하였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 시원(始原)은 왕씨 일족이 베푼 선정(善政)과 왕정군이 황태후로서 뒷받침한 정치적 지원에 있었다.
왕정군은 왕망이 왕위를 찬탈할 때 옥새를 넘겨주지 않다가 어쩔 도리가 없자 땅에 집어던지며 “나는 늙어 곧 죽을 것이나 너 때문에 우리 일족이 멸문당할 것이 걱정된다”고 하며 한탄하며 지내다가 신나라가 망할 즈음에 이르러 죽었다.
부룬힐다와 왕정군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으나 이들에게는 프레데군트나 부소의와 같이 수십 년간에 걸친 적(敵)이 있었다는 것도, 그들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렸다가 재기하는 것도, 그리고 오랜 세월의 인고 끝에 여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의 정상에 올라 오랜 세월 권세를 휘두르게 된 것도 꽤나 유사하다.
부룬힐다는 대단히 적극적인 여걸형(女傑型)으로 스스로 여왕처럼 행동하였다는 것에서, 왕정군은 대체로 유순하여 남을 참소하지 않고 욕망을 억제하며 운명의 흐름에 맡기고 있었다는 것에서 서로 다른 것일까?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두 사람의 죽음의 결말(結末)에서 보여지는 모습일까?
누구나 살아오는 과정에서 행운이나 불운을 겪게 마련이다. 우리네 보통사람도 스케일에 차이가 있을 뿐 살아오면서 갖은 풍파를 겪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다.
부룬힐다는 동생과 남편의 죽음 등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도 그녀에게 마냥 불운이 닥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동생의 아들 메로베가 구혼하여 그녀에게 재기의 기회가 된 것, 개종의 덕택으로 로마교회가 그녀를 지지한 것, 그녀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사전에 누설된 것이 그것이다.
또 왕정군에게는 그저 이름뿐인 남편을 가진 것이 불행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어쩌면 원제의 존재 자체가 행운이었고 태자비 간택이나 회임의 사실은 그로 인해 이루어진 기적(奇蹟)이 아니겠는가 싶다.
흔히 로또에 당첨되면 호사방탕(豪奢放蕩)하게 써버리고 말거나 심보 고약한 자들에게 뜯기거나 하여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왕정군은 자신에게 돌아온 행운을 차분하게 잘 관리했다는 것이고 부룬힐다는 제 마음껏 써보다가 끝났다는 차이가 아닌가 싶다. 어느 쪽에 선악호오(善惡好惡)를 둘지는 글쎄올시다.
하여튼 이 두 여걸(女傑)의 이야기에서 얼핏 떠오르는 것은---
“사물이 극에 이르면 반전하게 되고
운수라는 것도 꽉 막힌다 싶어도 곧 바뀌게 된다.”
(物極則反 數窮則變)
라고 하듯 “행운이다 싶으면 몸가짐을 반듯하게 하고 불행이다 싶을 때는 좋은 시절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말이렷다.
(陽川書窓에서
첫댓글 우리 일육산악회, 몸과 맘이 정화대는 참 존 산악회임돠~!!!.... 양천서창!!! 끄까지 일거는 데두 등장 인무리 마나서.....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