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유 태 경
산들산들 부는 가을바람과 따듯한 태양이 보듬어 키운 무, 파, 배추들이 모였다. 바다 품속에서 뛰어놀던 멸치들도 정답게 모여 만들어진 액젓이 아주머니들과 함께 어울려 김장이 한창이다. 마을의 옛이야기가 나오고 숨겨졌던 남편들의 외도까지도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가슴속 언저리에 주저리주저리 서리어 있던 지난날의 삶에 회한을 갖은 양념과 함께 배춧속에 감춘다. 맛보라며 한 쌈 입에 넣어주며 서로서로 정을 나눈다. 늦가을의 차가운 날씨는 어느 사이 훈훈한 바람이 되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시집살이하면서 날이 섰던 감정을 채지 버무리듯 비벼대어 속은 후련해지고 김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땅속에 묻혀 잠이 든다.
자취하며 고등학교에 다녔다. 어느 날 방ː과 후 시장에 들러 일주일 먹을 찌개용 김치 두 봉지와 비계가 섞인 돼지고기 반 근을 사서 책가방에 넣었다.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항상 만원이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가방을 받아 주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김치 봉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학생이 내 가방을 빼앗다시피 받아 자기 가방 위에 올려놓는다. 불안했다. 두 정거장쯤 지났는가 싶다. 내 가방을 받은 학생은 또 다른 남학생의 가방을 받아 내 가방 위에 털썩 올려놓는다. 안 된다며 내 가방을 잡아당겼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여학생의 가방을 타고 김칫국물이 치마에 흘러내린다. 가방에 들어 있던 김치 봉지가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나는 재빨리 가방을 낚아채어 차 문 앞으로 가서 차가 멈출 때를 기다렸다. 여기저기서 “무슨 냄새야!”라는 소리가 콩콩 뛰고 있는 내 가슴에 박힌다. 심상치 않음을 알고 기사가 정류장도 아닌데 버스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었다.
어떻게 버스에서 내렸는지 난 기억할 수도 없다. 가방을 들고 뛰어가는데, “소매치기다.”라는 소리가 들리면서 누구인가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소매치기가 아니에요!”라고 소리치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이 와서 설명을 듣고 나의 말을 믿어 주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나의 자존심이 바싹 말라 불에 타고 있는 심정이었다. 도망치다시피 골목을 빠져나와 한적한 공원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버스 안에서 벌어졌던 영화 한 편이 재상영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예쁜 여학생이 다가와 내 어깨를 치며, “괜찮아요. 치마는 집에 가서 빨아 널면 돼요. 어서 일어나 같이 가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김칫국물에 젖은 가방을 핥고 있다. 가방을 열었다. 물 빠진 김치, 색깔 변한 돼지고기, 부러진 연필들·····.
이렇게 냄새도 좋은 국물 없는 짬뽕 김치를 본 사람은 오직 나뿐일 것이리라. 다른 차를 탈 수도 없어 먼 길을 걸어 집에 왔다.
나는 김치찌개와 김치 볶음을 잘 만든다. 솥에 짬뽕이 된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고 적당히 물을 붓고 끓인다. 연탄난로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끓여놓은 솥을 올려놓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훌륭한 도시락 반찬인 김치 볶음이 되어 있다. 그것으로 일주일 반찬 걱정 끝이다. 그대로 먹으면 볶음, 물 붓고 데우면 김치찌개, 학창시절 나는 두 가지 반찬만 먹은 것 같다.
김치는 대한민국 대표 음식이다. 영어로도 김치다. 일본어로는 발음상 “기무치”라 하지만 엄연히 김치다. 신기하게도 담근 직후에 ‘겉절이’부터 오래된 묵은지까지 맛이 각각 다르면서도 모두 환상적이다. 아무리 ‘시어빠져도’ 찌개로 먹을 수 있다. 김치찌개는 신김치로 끓여야 또 다른 최고의 맛이 난다.
점심시간에 반찬 뚜껑을 열면서 문득 예쁜 그 여학생이 생각난다. 김칫국물에 색깔이 변한 책에서도 그 여학생이 보이는 듯하다.
그 여학생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버스만 타면 나는 두리번거리는 습관도 생겼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미국에 왔다.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 여학생도 미국에 왔나 보다. 오십 년이 지난 오늘 아침 밥상 모락모락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김치찌개에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학생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렸다. 오늘따라 그 여학생을 생각하느라 짠맛도 잊고 김치와 찌개를 다 먹었다. 김치를 또 사야 한다.
시장에 갔다. 사려던 물건을 바구니에 넣고 김치를 사려는데, 아내가 잠깐 기다리라며 채소 있는 쪽으로 급히 간다. 한동안 기다려도 아내가 오지 않는다. 김치 병을 바구니에 넣고 채소 있는 곳으로 갔는데, 두 여자가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있다. 두리번거리며 아내를 찾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아내가 어느 여자와 싸우기 때문이다. 우르르 사람들이 모여든다. 뛰어가서 무슨 짓이냐며 간신히 서로 떼어 놓았다. 그녀는 어디로 인가 울면서 뛰어간다. 나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그녀가 뛰어간 쪽을 쳐다보았다. 공중전화 옆에 기대어 울고 있다. 나는 그녀 곁으로 가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순간 나를 쳐다보며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리도 찾고 싶었던 그 예쁜 여학생이다. 우리는, “왜 이제야 왔느냐.”라며 서로 힘껏 껴안았다. 그런데 아내가 소리친다. “그 여자가 한국에서부터 당신과 같이 살겠다며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바로 그 여자다. 내가 떠나 줄 터이니 둘이서 한번 잘 살아봐라.”라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 아내가 집어 던진 김치 병이 우리를 향해 날아온다. 나는 여학생이 다칠세라 있는 힘을 다하여 힘껏 껴안았다.
“아악 아파요. 인제 그만 놓아요! 깜짝 놀라 정신 차려 눈을 떠보니 이불 속에 아내가 내 품에서 비명을 지른다.
오늘따라 아침 밥상에서 평생 맛있게만 먹었던 김치 맛을 잘 모르겠다. 김장하던 가을 날씨처럼 씁쓸하고 마음마저 서늘하다.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설명하기도 멋쩍어 애꿎은 김치만 집어 먹었더니 애꿎은 냉수만 벌써 몇 컵 째 들이킨다.
첫댓글 그 숫한 세월이 흘렀건만
그 여인의 얼굴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살아 있네요..^-^*
ㅎㅎ 사람들 마다 마음 한켠에 놓아둔 그리움이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