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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잠언 8,22-31
로마 5,1-5
요한 16,12-15
<나와 은총과 진리>
한 엄마가 1 살배기 아기를 폐가에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우연히 폐가에서 아기의 울음소기를 들은 주민들은 당장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도착했을 때 더럽고 차가운 바닥에는 1살짜리 여자아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아기가 최소한 며칠 동안 이곳에 홀로 버려져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경찰은 추가 조사 후, 아이의 이름이 ‘리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행방불명 상태였습니다.
리자는 몹시 쇠약해진 상태였기에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리자는 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한 한 여성을 만납니다.
‘이나’라는 여성은 리자의 옆 병실에서 아픈 아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리자를 만나게 됩니다.
보호자 없이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 이나는 금세 연민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들을 찾아갈 때마다 리자의 선물과 옷들을 함께 준비해갔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리자를 찾아간 이나는 빈 침대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이나는 병원 직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직원은 리자가 퇴원할 정도로 건강해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나는 리자가 건강을 찾아 기뻤지만 동시에 깊은 상실감도 느꼈습니다.
그녀는 고아원으로 찾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리자를 자신의 딸로 입양합니다.
이나는 리자의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2살이 된 리자는 여전히 극도의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음식을 잘 씹지도, 야외에서 걷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픈 아들을 돌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리자 또한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이나는 리자가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무용학원에 보내주었습니다.
엄마의 사랑과 지원 덕분에 리자는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갔습니다.
리자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굳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리자는 미인 경연대회와 장기자랑에서 우승을 휩쓸면서 모델로서 첫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리자의 모델 커리어와 인생 이야기는 그녀를 러시아 유명 연예인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10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친엄마가 이 소식을 듣고 딸과 연락을 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리자는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
그녀는 제가 힘든 순간 곁에 있어주었고 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출처: ‘폐가에 1살 아기 버렸다가 수십 년 뒤 믿기 힘든 사실 마주한 엄마’, 포크포크, 유튜브]
‘함께 있어줌’과 ‘절대 포기하지 않음’, 이 둘은 함께여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지만 교육을 포기한다던가, 교육은 하지만 함께 있어주지 않으려 한다면 그런 부모 밑에서 아이는 올바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함께 있어줌을 ‘은총’이라 할 수 있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있어줌을 사랑이라 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부모로부터 함께 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실 때 이 두 가지를 충만히 지니고 오셨습니다.
은총과 진리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예수 그리스도는 은총과 진리와 하나이십니다.
이렇게 은총과 진리는 그것을 주는 이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삼위일체이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성령을, 진리로 성자와 함께 하셔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엄마의 영광을 누리려면 은총과 진리와 항상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함께 있어주는 것’이고 ‘진리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리자가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 그녀는 제가 힘든 순간 곁에 있어주었고 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분입니다.”라고 할 때, 리자에게 이나는 은총과 진리를 지닌 어머니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은총과 진리를 갖춰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될 때 그 태어나는 자녀들에 의해 영광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시고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은총’이 성령이십니다.
은총과 진리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창조자로서의 영광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은총은 함께 있어주는 것에서 드러나고 진리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3년 동안 가르치셨고 승천하시면서도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그렇다면 은총과 진리를 어떻게 지니게 될까요?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가진 이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그 은총과 진리를 받은 이는 그 어머니로부터 반드시 태어났어야 합니다.
태어난 이들이 지니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은총과 진리입니다.
우리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로부터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과 진리를 내보내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그 사람은 창조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창원 씨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돈을 안 가져온 것에 대해 심하게 나무랐을 때 자신 안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부모와 선생님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지만 그들에겐 은총이 없었습니다.
진리는 있지만 은총이 없을 때 아이는 올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늑대들은 인간의 아이들을 키워주었습니다.
젖도 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것들은 은총은 있었지만 진리는 주지 못했습니다.
은총도 늑대 수준의 사랑이고, 진리도 늑대 수준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아이들을 인간으로 성장시킬 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늑대들은 늑대 수준의 영광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은총과 진리를 주기 위해서는 그 은총과 진리로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받는 영광과 차원이 다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 사랑합시다.
하느님으로 가르칩시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완전함을 닮는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6일 [삼위일체 대축일]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
몇몇 아픈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제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앓아누워 있던 제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해주시던 모습 말입니다.
용돈에는 꽤 인색한 '짠순이'였던 어머니께서 아픈 순간만큼은 앞뒤 재지 않고 팍팍 쓰셨습니다.
고열에 시달리던 제 머리맡에 앉으셔서 당시 구경조차하기 어려웠던 달걀 프라이라든지 복숭아 통조림을 먹여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꾀병을 앓게 됐는데 그런 때 어머니는 꾀병인지 아닌지를 귀신같이 알아맞히셨습니다.
그런 날 복숭아는커녕 단단히 기합만 받았지요.
저희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 그간 세상에서 받아온 상처가 만만치 않은 아이들입니다.
'짠한' 마음에 저희들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그들의 상처입은 날개를 치료해주고 싸매주고자 노력하지만 한계를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이 아픈 순간, 외로워하는 순간, 괜찮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해지는 순간, 그래서 만만한 저희에게 무례함을 느낄 정도로 맹렬히 반항하는 순간에는 저희보다 어머니의 그 섬세함, 부드러움, 따뜻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주어도주어도 더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시 뭔가 아쉽고, 뭔가 모자라는 것만 같아 허전해 합니다.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가련한 우리 인생을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조금이라도 더 사랑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그 결과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하느님께서 성삼위(聖三位)로 존재하시는 이유는 보다 완벽하게, 보다 진하게, 보다 강하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랑이 보다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통합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성과 모성, 인간성과 신성이 잘 조화된 통합된 사랑이 요구됩니다.
결국 그 사랑은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삼위께서는 통합된 사랑, 충만한 사랑의 가장 좋은 모범이지요.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하느님이신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 성삼위께서 동시에 존재함은 결국 우리 인간을 보다 확실하게 구원하시기 위해, 보다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최첨단 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정복하지 못할 신세계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난해한 이치라도 명명백백하게 세상 앞에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삼위 신비는 이를 정의 내리기 위한 숱한 시도들이 계속돼왔지만 아직도 베일에 감추어진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연구할수록, 심사숙고할수록 더욱 애매모호해지고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부족한 인간의 필설로는 도무지 명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비입니다.
인간들이 마련한 잣대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너무도 크신 하느님, 인간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풀지 못할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그 존재가 다 알려지고, 모든 사람들 의식구조 안에 뚜렷하게 형상이 포착된 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겠지요.
더 이상 신앙의 대상도 안 되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해 대상이 아니라 신앙 대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느님, 비록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대상이시지만, 그리고 아무리 기를 써도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시지만, 언젠가 우리 신앙이 더욱 깊어진 그 어느 날, 보다 명료하게 우리 앞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보이실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고 희망하며 우리 부족한 신앙을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6월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우리는 지난주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지내며 부활시기를 마쳤는데, 이제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모든 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미 드리기 위함이다. 즉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신 구원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동시에 삼위일체의 신비의 영광에 대해 흠숭의 예를 바쳐드리는 것이다.
복음: 요한 16,12-15: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살아 계신 실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구원 업적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삼위의 신비는 소위 ‘위격’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개체성을 통해 실현되는 구원업적들에 의해 그 신비가 드러난다.좀 더 쉽게 말하자면,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삼위의 신비에 가까이 가지를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삼에 대한 계시는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학적 이론으로 연역되거나 또는 그렇게 정립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의 구원사명을 완성시켜줄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5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위격의 ‘다양성’이 나타나지만,원초적 ‘단일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되지만 모든 것이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것이며,그 아버지의 것을 아드님과 성령께서 이루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위격적 특성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는 역할과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려주는 역할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진리’는 철학적 개념의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물이 되신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말한다. 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을 동반한 ‘신앙’이다. 즉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진리’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그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12절)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원업적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14절) 성령이 오셔야 했다.
성령은 유일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케 해주시는 분이시고, 그 진리를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은 ‘생동케 하는 성령’이 되신다. 그래서 우리 모든 신자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살도록 노력함으로써 자신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는 “연대기적 차원에서의 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에 비추어 현재를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그 종말의 빛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비록 지금 당장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끝날지라도 그 때에는 승리의 카드가 사랑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부활하셨다. 분명히 패배한 그 사랑만이 유일한 승리의 실체가 된다.”(B. Maggioni, in I Vangeli, Assisi 1975, 1614)
제2독서: 로마 5,1-5: 사랑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여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1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보증해주시는(5절)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2절)의 은총을 누린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충실히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차지하시어 우리 행위의 내적 원리가 되고자 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내적 원리가 되신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우리의 삶을 모두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에 대한 확고한 기다림 속에서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 안에 살려 노력하는 삶이 요청된다. 즉 삼위일체의 신비는 추상적인 앎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성령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서 하나이신 분이심을 잊지 말고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그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하느님, 저는 당신의 삼위일체적 생명을 믿습니다.당신 사랑을 통해 그것을 믿습니다. 그 생명의 신비는 당신의 진리를 지켜줍니다. 만일 그 신비가 버려지고 만다면 그 즉시 당신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 생명의 평화가 우리의 본향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적 이유에서라도 그 생명을 믿습니다.그것은 곧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보다 높이 보다 멀리 그리고 그처럼 거룩한 빛을 비추어주는 그 희망의 빛을 저에게서 꺼버리지 마소서. 오 하느님,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R. Guardini)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