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月, 음력 9월 15일)
[1924년] ‘멍텅구리 헛물켜기’ 연재
← 멍텅구리 헛물켜기 (1)초대면과 (2)방문편.
흔히 한국 신문만화의 효시를 말할 때 1909년 6월 2일자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한 컷 만화를 꼽는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만화라기보다 만평(漫評)에 가까운 것이지만 한국 신문만화사(史)의 첫 포문을 연 일임에는 틀림없다. 대한민보는 1910년 6월 5일부터 국내최초로 신문 연재소설에 삽화까지 실어 초기 한국신문의 비주얼화를 선도했다. 대한민보가 폐간된 후에는 조선일보ㆍ동아일보가 그 역할을 대신해, 조선일보는 연재만화를, 동아일보는 독자투고 만화를 시작했다.
한국신문사상 최초의 네 컷짜리 만화가 연재를 시작한 것은 1924년 10월 13일자 조선일보였다. 미국의 조지 맥마너스의 만화 ‘매기와 지그스’에서 착안한 ‘멍텅구리 헛물켜기’란 명랑만화였다. 주인공 최멍텅과 친구 윤바람, 그리고 미모의 기생 신옥매가 등장, 한량과 기생의 연애행각을 그린 이 만화는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던 시절에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림은 노수현이 그렸고 줄거리는 조선일보 편집고문 이상협과 주필 안재홍이 꾸몄다.
‘멍텅구리...’는 이후 ‘멍텅구리 련애생활’ ‘멍텅구리 가뎡생활’ 등 시리즈로 연재되며 2년 5개월동안 총 501회나 연재되다 1927년 3월 11일에 막을 내렸다. 1926년 1월에는 영화로도 제작돼 만화만큼이나 큰 인기를 끌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시상 모습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2000년 10월 13일 오슬로 소재 노르웨이 노벨연구소에서 가진 수상자 발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됐으며, 1901년 처음으로 앙리 뒤낭과 프레데리크파시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이래 81번째의 수상자이자 아시아인으로는 일곱 번째로 노벨평화상을 타게 됐다. 김 대통령에 대한 노벨평화상 시상은 12월10일 오슬로에서 열렸으며, 김 대통령은 90만 스웨덴크로나(약 96만달러․약 10억원)의 상금을 받았다. 이번 노벨평화상 후보에는 개인과 단체를 합쳐 모두 150명이 올랐으며,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등도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뒤,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들의 성원 덕분"이라면서, "이 영광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리고자 한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1999년] 탤런트 서갑숙 자전 에세이집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출간
탤런트 서갑숙씨의 자전 에세이집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가 출간되자마자 사회적인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여자친구와 함께 남자 1명과 성관계를 맺은 이야기를 비롯, 동성애, 강간 등 자신의 성체험을 적나라하게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책이 출간되자 교보문고는 처음에는 이 책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 책을 전량 출판사에 돌려보냈다가 이후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스티커와 함께 책에 랩을 씌워 판매했다. 한편 KBS는 서씨가 출연중인 ‘학교2’프로에서 그녀를 출연정지 시켰으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26일 청소년유해간행물로 결정했다. 그러나 서울지검은 음란성내사결과 책 내용에 문제없다며 27일 내사를 종결했다. /조선
[1999년] 미국 프로농구 선수 월트 체임벌린 사망
← 프로농구 선수 윌트 체임벌린
미 프로농구(NBA) 통산 최다 리바운드의 주인공 윌트 체임벌린(63)이 1999년 10월 1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LA 레이커스 팀 대변인과 경찰은 체임벌린이 이날 로스앤젤레스 벨에어에 있는 자택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2m16cm의 장신 센터 체임벌린은 1959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 입단 후 1973년 LA레이커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14년 간 경기 당 평균 30.1득점에 22.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데뷔 첫해 신인왕과 동시에 MVP를 차지하는 등 통산 4회 MVP에 오른 그는 통산 최다 리바운드(2만3924개), 한 게임 최다 득점(100점)과 최다 리바운드(55개) 기록을 갖고 있다. 통산 최다득점 기록(3만1419점)도 갖고 있었으나 이는 1984년 카림 압둘 자바(통산 3만8387점)에 의해 깨졌다.
체임벌린은 59∼60시즌부터 65∼66시즌까지 7시즌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11시즌서 리바운드왕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는 13회 진출했으나 `천적` 보스턴 셀틱스에 번번이 패해 우승은 2회에 그쳤다./조선
[1994년] 북아일앤드 신교도 무장조직들, 구교도와 아일랜드 공화군에 대한 휴전선언 성명 발표
1994년 오늘 북아일랜드의 신교도 무장조직들이 IRA, 즉 아일랜드공화국군에 대한 휴전을 선언한다. IRA가 신교도에 대해 휴전을 선포한 지 6주 만의 일이다. ‘로얄리스트’로 불리는 신교도 무장단체들은 이때까지 25년 동안 3천2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북아일랜드 유혈사태 가운데 4분의 1이상에 개입해왔다. 영국 정부도 8일 뒤인 같은 달 21일 IRA의 휴전선언을 항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IRA의 정치조직인 ‘신페인당’과의 본격적인 평화회담을 개최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YTN
[1990년] 노태우대통령, 범죄와의 전쟁 선포
노태우(盧泰愚, 1932~ ) 대통령이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범죄소탕을 위해 강력한 전면전에 들어 갈 것을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6공 당시 가장 문제가 됐던 가정파괴범이 사회적인 분노를 일으키자 '범죄와의 전쟁'를 결심했고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 범위 안에서 가장 강력한 대책을 수립했다.
전쟁선포 1년동안 전국 2백53개 폭력조직에서 8백39명의 폭력배를 검거해 그중 7백62명을 구속했다. 여기에는 두목급 20명과 행동대장 83명이 포함돼 있어 대부분의 폭력조직이 사실상 와해됐다. 이에따라 범죄발생건수가 1989년도에 비해 2.7% 감소하고, 범죄자 검거율은 7.4% 증가했다. 특히 마약사범 발생률은 1989년도에 비해 13.4%가 감소했다. /조선
[1962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초연
←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
1962년 10월 13일, 에드워드 올비의 대표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누가...’는 뉴욕 타임즈로부터 “최근 10년간 상영된 연극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토니상과 뉴욕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이미 ‘동물원 이야기’ 등으로 미국 부조리 연극계에 일정한 지위를 구축한 올비는 이 작품으로 대중성까지 확보하게 됐다. 그는 퓰리처상을 3차례나 받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작가였지만 이상하리만큼 브로드웨이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다. 출세작 ‘동물원 이야기’(1959년)도 미국 평론가와 연출가들의 냉대속에 멀리 독일에서 초연돼 성공을 거둔 후 브로드웨이로 상륙했다. 전문가들은 오랜 기간의 방탕한 생활과 알코올 중독 등으로 얼룩진 올비 개인의 삶을 냉대의 이유로 설명했다.
‘누가...’는 1966년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도 제작돼 5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조선
[1925년] 마거릿 대처(Thatcher, Margaret Hilda) 출생
결혼 전 성은 Roberts.
1925. 10. 13 영국 링컨셔 그랜섬~.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1979년부터 11년간 영국 총리 3번 연임이라는 기록을 남긴 마거릿 대처가 1925년 오늘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 서머빌 칼리지에서 법학과 화학을 전공하고 1951년 결혼해 쌍둥이 남매를 둔 그는 하원의원, 교육ㆍ과학장관을 지내고 1975년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보수당)로 뽑혔다.
1979년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총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그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당시 영국은 높은 물가상승과 낮은 경제성장, 노조의 파업 등으로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었다. 대처는 “웅변은 남에게 맡기고 나는 행동만 하겠다.”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의 활약으로 파업이 줄고, 경제적으로도 점차 안정을 찾자 영국 국민들은 대처를 1983년과 1987년 연거푸 총리에 당선시켰다. 그가 펼친 사회ㆍ경제 정책은 이름을 본떠 ‘대처리즘’이라고 불린다.
[1921년] 이탈리아 출생의 프랑스 샹송가수, 영화배우 이브 몽탕(Yves Montand) 출생
본명 이브 리비.
이탈리아의 피스토이아 근교 몽스마노 출생.
1923년 집안이 파시스트에 쫓겨 마르세유로 이주,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빈곤 속에 자라 빵공장 등에서 일하다가 18세에 가수가 되었다.
1944년 파리의 물랭루주에 출연하여 E.피아프의 후원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1950년 《바르바라》를 비롯하여, 1951 ․1952 ․1954년 디스크대상(大賞)을 수상하였다.
가수로서의 레퍼토리가 다양하여 감상적인 것, 사실적인 것, 환상적인 것까지 능숙한 연기와 춤을 곁들여 연출하였다.
대표곡으로 《바르바라》 이외에 《낙엽》 《새벽에》 등이 있다.
1946년 《밤의 문》을 비롯하여 《공포의 보수》(1952) 《악의 결산》(1955) 등의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이브 몽땅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지만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좌파 정치활동을 벌여 온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PCF)의 당원이자, 정치영화의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정치활동과 예술을 결합시킨 프랑스 최고의 좌파 예술가였다.
1980년대 프랑스인들은 이브 몽땅을 대통령 후보로 거론하기도 했으나 그는 죽는 날까지 영화에만 전념했다. 1991년 11월 8일 장 자끄 베네 감독의 영화를 찍고 있던 그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다음날 파리교외의 상리병원에서 70세의 인생을 마쳤다. 그는 연인이었던 에디뜨 피아프와 시몬느 시뇨레가 묻혀있는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 라 셰즈에 안장됐다.
[1914년] 소설가 장덕조/張德祚 출생
1914. 10. 13 경북 경산~2003. 2. 17 서울.
한국 문단에서 여성작가로는 드물게 역사소설을 썼으며,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사적인 문장을 많이 사용했다. 배화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중퇴했다. 그해 〈개벽〉 기자로 있으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평화신문〉 기자,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 1973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1933년 〈제일선〉에 단편 〈저회 低徊〉를 발표한 뒤, 단편 〈남편〉(신가정, 1933. 10)․〈아내〉(신가정, 1934. 2)․〈여자의 마음〉(조선일보, 1935. 9. 20~10. 10)․〈자장가〉(삼천리, 1936. 4) 등을 발표했다. 1935년 매일신보에 역사소설 《은하수(銀河水)》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낙화암(落花巖)》, 1958년 한국일보에 《벽오동 심은 뜻은》을 연재, 역사소설가로서 대중적 인기를 높였다. 폭넓고 해박한 지식으로 역사 장편소설 30여 편을 발표했으며 1965년 한국일보에 장기연재된 대하소설 《이조(李朝)의 여인들》은 인고(忍苦)의 애환(哀歡)속에 펼쳐지는 조선조 여성 정염(情炎)의 세계를 감동있게 그려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브리태니커
[1908년] 의병장 이강년(李康秊) 순국
1858(철종 9) 경북 문경~190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 樂寅), 호는 운강(雲岡). 아버지는 기태(起台)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지 않던 집안에서 태어나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95년 8월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 김인담(金仁覃) 등 3명을 체포하여 농암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梟首)했다. 이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의를 맺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했다. 이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한 후, 강원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랴오둥[遼東]으로 가고자 했으나 영월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소백산에 들어가 7월에 의병을 해산했다. 유인석이 랴오둥으로 가자 그도 잠시 랴오둥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와서 단양 금채동(金采洞)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하여,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단양 고리평(故里坪), 10월 23일에는 풍기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강원도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및 경기도의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풍기·문경·단양·연풍·영월·죽령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이후 이인영으로부터 경기도로 집결하라는 통문을 받고 경기도 건천(乾川)으로 진출했다. 1908년 7월까지 충청도·강원도·경기도 일대에서 약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 모인 의병장들이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鎭所)를 성립시키고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이인영을 13도창의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각 도별로 진명을 내리고 지휘체계를 정비할 때,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3도연합의병부대가 해체된 다음 1908년 2월 17일의 경기도의 용소동(龍沼洞)전투를 비롯하여 2월 26일의 갈기동(葛基洞)전투, 3월 12일의 백담사(百潭寺)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등 강원도 인제 부근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망을 돌파·항전하면서, 1908년 4월경에는 소백산·일월산 일대로 활동무대를 옮겨와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했다. 이때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尙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蓮哲) 등 의병장과 제휴하여 안동 서벽(西壁)전투에서 일군을 맞아 매복작전으로 크게 승리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소백산·일월산 일대에서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청풍(淸風)·작성(鵲城)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1908년 6월 4일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처형되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과천의 효령대군의 묘 아래 장례했다가 나중에 제천으로 옮긴 듯하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운강선생창의일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08년] 월북 시인 임화(林和) 출생
1908. 10. 13 서울~1953. 8. 6 평양.
일제 강점기 및 8·15해방 직후에 활동한 사회주의 문예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인식(仁植). 필명은 청로(靑爐)·임화(林化 또는 林華)·성아(星兒)·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
생애와 활동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192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해 이상·조중곤·윤기정 등과 사귀었으며, 문학에 흥미를 느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보성중학교를 중퇴한 뒤부터이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해 1928년 중앙위원이 되었고, 그해 〈유랑〉·〈혼가 昏街〉 등의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이듬해 박영희의 후원으로 연극공부를 하기 위해 도쿄[東京]로 유학을 갔으나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에 관한 책만 탐독했고 김남천·안막·한재덕·이북만 등과 함께 '무산자사'에서 활동했다. 1931년 귀국해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결혼했으며, 그해 KAPF 제1차 검거사건 때 검거되었다가 9월경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2년 4월 KAPF 중앙위원회 서기장이 되었고, 기관지 〈집단〉의 책임편집을 맡아보았다. 같은 해 KAPF 제2차 검거사건 때도 검거되었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석방되었다. 1935년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 경찰국에 KAPF 해산계를 제출하고, 그해 8월에는 요양을 위해 마산으로 내려가 193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에 여기서 만난 지하련과 재혼했다. 1937년 학예사를 대리 경영했고, 〈사해공론〉·〈인문평론〉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1940년초에는 고려영화사 문예부 촉탁으로 근무했고, 1943년 조선영화 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조선영화연감〉·〈조선영화발달사〉를 편집했다. 8·15해방 직후 김남천·이원조·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했으나 이기영·한설야·안막 등이 조직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과 대립이 일어나자, 1946년 2월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두 단체를 통합해서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1947년말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 머물면서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북한의 종군작가단으로 서울에 온 벅찬 감동을 시 〈너 어디 있느냐?〉와 인민군이 후퇴해 평안북도까지 쫓겨간 심정을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에 나타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문제가 되어 1953년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미제의 고용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이승엽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문학세계
1926년 〈매일신보〉에 시 〈무엇 찾니〉·〈서정소시 抒情小詩〉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는 사회적·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반예술을 내세우는 다다이즘에 열중하는 듯했으나, 1926년말 KAPF에 가입하면서 계급문학론으로 옮겨갔다. 당시 KAPF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무정부주의 문학론과의 논쟁에 참여한 것은 그가 계급문학론으로 전향했음을 입증해 준다. 1929년 시 〈네거리의 순이〉(조선지광, 1929. 1)·〈우리 오빠와 화로〉(조선지광, 1929. 2) 등의 ‘단편서사시’를 발표하여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시인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한편으로 문학비평에 참여한 것은 김기진의 〈대중화론〉(동아일보, 1929. 4)에 대하여 쓴 〈탁류에 항(抗)하야〉(조선지광, 1929. 8)가 시발점이다. 이후 〈김기진군에게 답하는〉(조선지광, 1929. 11)을 발표해 김기진의 대중화론은 투쟁정신을 제거한 타협주의라고 비판했다. 1933년에는 김남천의 소설 〈물〉과 이기영의 소설 〈서화 鼠火〉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김남천과 벌인 '물·서화논쟁'을 통해 과거 KAPF 지도자들이 지녔던 도식성과 사회적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1934년에는 낭만주의론을 발표해 KAPF 내부의 우익적 일탈과 객관주의적 편향을 비판했으며, 이듬해 KAPF가 해산되어 프롤레타리아(프로) 문학이 위기에 처하자 프로 문학의 발생 및 발전과정에 대한 문학사 서술에 관심을 갖고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조선중앙일보, 1935. 10. 9~11. 3)을 발표했다. 1938년에는 프로 문학이 퇴조한 이후의 한국문학의 경향을 세태소설(世態小說)과 내성소설(內省小說)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본격소설론을 제기해 사실주의론을 구체화시켰다. 그가 당시 수준 높은 사실주의론을 수립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이론적 노력이 바탕이 되었으며, 그의 사실주의론은 세계관과 방법의 변증법적 연관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서 근대문예비평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시집으로 〈현해탄〉·〈찬가〉(1947) 외에 6·25전쟁 때 전선문고로 펴낸 〈너 어디 있느냐〉(1950)가 있고, 평론집으로 〈문학의 논리〉(1940)가 있다. 6·25전쟁 중에 북한에서 단행본 〈조선문학〉(1951)을 간행한 바 있다./브리태니커
[1905년] 헨리 어빙 사망
← 배우로서 최초로 ‘경(Sir)’라는 칭호를 받았던 영국의 대배우 헨리 어빙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세상만사가 다 이 이치를 따르는 거라지만, 배우로서 최초로 ‘경(Sir)’라는 칭호를 받았던 영국의 대배우 헨리 어빙 역시 1905년 10월 13일, 화려했던 날들을 뒤로 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평범한 세일즈맨과 농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어빙은 6년간의 시골 생활 후 런던으로 상경한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은 런던 극장의 연극과 배우에게 쏠려 있었다. 대사없는 단역 남자배우 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한 그는 3년 동안 셰익스피어 작품 대부분을 포함해 모두 330편의 작품에서 400여 가지 배역을 맡았다. 10년 동안 이러한 견습배우 생활을 계속하다 미국인 흥행주 H.L.베이트먼의 라이세움 극장에서 공연한 ‘종(Bells)’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어빙은 당대 최고 배우로 떠올랐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미결수 살인범 매시어스 역은 그의 타고난 으스스하고 멜로드라마조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으며, 이 작품은 죽을 때까지 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됐다.
1875년 베이트먼이 죽자 어빙은 1878년부터 라이세움 극장을 빌려서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목표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 세부적인 일에도 일일이 신경을 썼으며 무대장치와 의상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영국에서 제일 가는 디자이너와 음악가를 고용했다. 이 모든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대중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1878년 그가 엘런 테리를 주연 여배우로 고용함으로써 이 둘은 영국 연극사에서 가장 유명한 동반자 관계로 일세를 풍미했다. 어빙은 사색형의 내성적인 남자, 테리는 시원스럽고 충동적인 여자의 연기를 펼쳐 모든 사람을 매료시켰다.
이후 어빙은 독창적인 연극연출에 대한 공로로 영국왕실로부터 ‘경(Sir)’이라는 칭호를 받는 최초의 배우가 됐다. 그러나, 이렇듯 화려한 날들도 1897년 아들 로렌스의 연극 흥행 참패와 라이세움 극장의 화재, 그리고 잇따른 미국 순회공연에서의 참패 등으로 그 끝을 맞아야했다. 결국 1902년 극단은 해체되었고, 어빙은 1905년 오늘 68세에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났다.
[1875년] 한말의 의병장 박춘실(朴春實) 출생
1875. 10. 13 전북장수~1914. 6. 3.
본관은 밀양. 일명 동식(東植)·충실(忠實). 한학을 공부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주·장수·진안·용담 등지에서 구국운동의 내용을 담은 격문을 띄워 의병 52명을 모집했다. 이들 의병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큰 전과를 올렸다. 1906년 문태서(文泰瑞:일명 泰秀)가 지휘하는 의병대와 합세해 무주·장수 일대의 일본군을 습격해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겨울 13도 연합의진의 서울진공이 있을 때 호남창의 대장으로 양주(楊州)까지 진출해 참전했다. 1907년 무주 고창곡에서 교전하고 1908년 무주 구천동에서일본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간에 걸쳐 진안 천반산·성수산, 장수 덕유산, 구천동적상산, 토옥동 문성어전·농수리·양악·진도리 등지에서 60여 회 교전했으며 김성범(金聖凡)·문태수를 부장(部將)으로 해 200~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무대로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세웠다. 1909년 5월 8일 함양 수비대장이 이끄는 토벌대와 교전하던 중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사형선고를 받아 복역중 1914년 전주형무소에서 탈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뒤 6월 3일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자살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22년]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조각가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 사망
신고전주의의 대표자이다. 일찍부터 석공 밑에서 일하다가 재능이 인정되어 베네치아의 조각가 토레티의 공방에 입문하였으며, 이때 고대조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79년 22세에 로마로 갔는데, 당시에는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반발로 고전주의적 풍조가 일기 시작, 폼페이와 엘코라노의 고대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빙켈만과 레싱의 저술을 참작하여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여서, 로마는 신고전주의운동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그는 고대조각을 열심히 연구하고 모방하였다.
The Three Graces, Hermitage Magdalen, Hermitage.
우선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를 제작하였고,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묘비》(1787, 산티아포스토리성당). 《클레멘스 13세의 묘비》(1792, 산피에트로대성당) 등이 있으며, 루브르에 있는 《아모르와 프시케》의 군상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바티칸미술관에 있는 《페르세우스》 《두 명의 권투자(拳鬪者)》 등을 제작한 후, 1802년에는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갔으나, 그 해 로마로 돌아와서 명사 ․귀족의 묘비와 초상을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거대한 나상(裸像:1810, 밀라노 브레라미술관)과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이 긴 의자에 기댄 반나상(로마 보르게세미술관)을 고대양식으로 제작하였다. 그 후 파리와 런던을 여행하였으며, 만년에도 쉬지 않고 일을 계속하여, 과로로 휴양하려고 베네치아로 귀향, 그 곳에서 죽었다.
[1453년] 계유정난 발발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의 수하인 양정·임운 등이 김종서와 아들 승규를 살해함으로써 계유정난이 발발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세종·문종 때부터의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1452년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영의정부사 황보인을 비롯해 남지·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하도록 명했다. 한편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 등을 모사로 해 세력을 모으고 있었고, 여기에 홍달손·홍윤성·양정 등 30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인들이 모이기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은 이들 심복 무사들을 거느리고 3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를 죽이고 나서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서 죽였다"고 고하고는 곧 왕명이라 하여 고위관료들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의정부찬성 이양 등 반대세력에 속하는 중신들을 대궐문에서 죽였다. 그밖에도 안평대군과 정분, 조수량 등을 귀양보낸 후 죽게 했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자기의 세력이 될 만한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권력기반을 다져나감으로써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브리태니커
[552년] 백제, 일본에 불교 전수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긴메이천왕[欽命天皇] 13년(552)이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친밀한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552년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13년) 백제 성왕(聖王, 523∼553)이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파견하여 왜왕에게 불경과 금동석가여래상을 보내 불교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조정에는 새로운 종교를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왕실과 귀족들 간에 수용되었다. 특히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 594년 삼보흥륭(三寶興隆)의 칙서를 내리고 17개조헌법을 제정해서 불교의 국가적 숭앙을 촉구함으로써 일본 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에 의해 씨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의 보급은 또한 발달된 대륙문화의 수입을 뜻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도 여러 경전을 연구하여 〈유마경〉·〈승만경〉·〈법화경〉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건너간 한국 승려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혜총·혜자와 같이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 한국 승려들과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들에 의해 7세기 일본에는 〈삼론〉·〈성실론 成實論〉·〈구사론〉의 연구를 주로 하는 학파들이 각각 세워졌으며 중국의 법상종도 들어와서 강력한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Google
[ 54년] 로마 클라우디우스(라틴어: Claudius) 황제 사망
← Claudius
AD 54년 10월 13일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했다. 황후인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독버섯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북아프리카까지 확대하고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만들었다. 조카인 아그리피나와 다섯번째 결혼을 한 황제는 새 황후의 권력욕 탓에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그녀의 아들을 양자이자 후계자로 선정했다. 이 양자는 후에 네로 황제가 되었다. 전하는 문헌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방식은 현학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인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한편 클라우디우스의 황제 즉위 때 추방당했다가 뒤에 다시 불려와 네로의 교육을 맡았던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풍자문 <신성한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만들기 Apocolocyntosis divi Claudii>에서 클라우디우스를 독단적이고 부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같은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상류계급의 부정적인 평가는 상류계급의 기득권에 단호히 맞서 권위와 열정으로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킨 데 대한 반증이라는 분석도 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5년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 별세
2002년 전파연구소 ‘형식승인 처리방법’을 제정, 고시
1999년 미국 프로농구 선수 월트 체임벌린 사망
1999년 유엔, 탈북자 ‘난민’으로 인정
1999년 로버트 먼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7년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와 게리 애덤스 신페인당 당수, 북아일랜드 분규발생 후 76년 만에 회동
1996년 독일 ‘슈테른’지 창설자 헨리 나넨 사망
1995년 영국의 반핵 운동가 롯블라트 199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1993년 미국 러셀 헐스-조제프 테일러, 세계 최초로 쌍성 펄사 발견 공로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1992년 미국 시카고대학의 게리 베커 교수, 노벨경제학상 수상
1992년 북한탈출 귀순자 안혁, 강철환, 북한 연변 등 12곳의 정치범수용소에 20여만명이 수용돼 있다고 밝혀
1986년 유성환 의원, 국회 대정부질문중 국시(國是)발언
1982년 원전 9-10호기 공사 기공(경북 울진)
1981년 문교부, 국민학교 영어교육 결정
1980년 국보위, 사회악사범 4만7천여명 검거. 군부대 순화교육(삼청교육)중이라고 발표
1979년 신민-통일당 의원 69명, 의원직 사퇴서 제출(11.15 반려)
1978년 중국, 모스크바 겨냥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설치 발표
1977년 루프트한자 여객기 서독 적군파에 피랍
1970년 캐나다-중국, 국교 수립
1969년 인왕산 청운(淸雲)스카이웨이(現-인왕스카이웨이) 개통
1967년 NATO본부 파리 철수. 16일부터 벨기에 브뤼셀서 개소
1965년 맹호부대 인천항 출발
1964년 공화당 이만섭의원 판문점에 남북한면회소 설치 제의
1964년 뇌염환자 2957명. 사망 953명 발표
1962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초연
1962년 한국신문발행인협회 창립
1960년 북한, 중국에 대한 4억 2000만루블 차관에 조인
1958년 미국, 핵실험 정지 17개국 결의안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 제출
1958년 말라가시, 공화국 선포
1957년 이집트군, 시리아 침입
1952년 미국-영국-프랑스, 대(對)유고 원조협정 조인
1948년 사범학교 제외한 중고교 남녀공학제 폐지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발족(단장 이범석)
1945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발족
1943년 총독부, 전시교육비상조치방책 발표
1943년 이탈리아, 독일에 선전포고
1919년 경성악우회, 종로 청년회관에서 제1회 음악연주회 개최
1909년 스위스의 법률가 겸 철학자 카를 힐티 사망
1909년 제1회 사법시험 실시
1866년 병인양요
54년 제5대 로마제국 황제 네로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