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담과 우리말 -
뜨겁기는 박태보(朴泰輔)가 살았을라고
박태보(1654~1689)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예조좌랑, 교리, 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지냈습니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다고 전해집니다.
1689년에 기사환국이 일어납니다.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왕자를 낳지 못하자 숙종이 후궁인 장 씨를 총애하던 중 그로부터 왕자를 얻게 됩니다. 그러자 숙종이 장 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고 인현왕후 민 씨를 폐한 후 장 씨를 희빈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이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을 축출한 게 기사환국입니다.
이때 서인에 속해 있던 박태보는 인현왕후 민비를 폐위하는 일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로 인해 임금의 분노를 산 박태보는 친국(親鞫)을 당하는 등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고문 중 맨살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는 단근질을 당했음에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을 정도로 꼿꼿했으며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뜨겁기는 박태보가 살았을라고’라는 속담이 나왔습니다.
뜨겁기는 하지만 참으라는 말로 쓰는 속담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박태보가 종묘 제향에 향로를 만드는 봉로관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은 으레 물수건으로 싸서 들곤 했는데, 나랏일에 약간 뜨겁다고 해서 직접 들지 않고 다른 걸로 싸서 드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며 맨손으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맨손으로 향로를 든 박태보의 손이 노랗게 타들어갔으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나중에 임금이 고문을 할 때
“너는 뜨거운 것을 잘 참더구나” 하면서 단근질을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박태보가 단근질을 당하고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국 모진 고문 끝에 진도로 유배를 당했으나, 유배 가는 도중 노량진에 이르러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이 서른여섯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임금은 곧 후회하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세웠으며 이조판서를 추서하기도 했습니다. 민비를 폐하는 일이 불가하다고 상소하다가 화를 입은 박태보(朴泰輔), 오두인(吳斗寅), 이세화(李世華) 세 사람을 일러 삼간관(三諫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박태보의 행적을 바탕으로 삼은 박태보전이라는 고전소설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박태보의 충절과 기개가 사람들 마음에 인상 깊게 자라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시조 한 수를 소개합니다. 충절가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박태보의 꿋꿋한 기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흉중에 불이 나니 오장이 다 타 간다
신농씨 꿈에 보아 불 끌 약 물어보니
충절과 강개로 난 불이니 끌 약 없다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