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가 드높던 벼 베기
송백 정문섭
* 이 글은 제가 1984년 ‘벼 베기 일손 돕기’에 갔다 온 후 르포형식으로 농수산부 <주간소식지 1984.10.26>에 올린 글입니다.
“재미있었다며, 나도 갈 걸 말이야.”
이튿날 수차례 아쉬움의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지난밤에 제법 세심하게 그림까지 보여주면서 비가 올 거라는 김동완 캐스터의 기상예보는 모두 부도수표가 되고, 황금들녘과 더불어 초가을의 높은 하늘은 정녕 맑기만 하였다. 조치원이라 쓰인 이정표를 뒤로 하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지났을 때는 풍년가 속에 입 다물 줄 모르는 인심 좋은 충청도 아저씨들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온갖 매스컴의 ‘사상최대풍년’이라는 단어를 새기며 삭! 삭! 경쾌한 소리가 나는 낫질 속에 무거워져 가는 볏단의 낟알 속에서 어느 분이 ‘산간지도 풍년인가 봐.’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릴 적 벼 베던 실력을 발휘하다 보니 목에 벌써 땀줄기가 흐른다. 새참으로 떡 안주에 곁들인 농주는 더욱 토종 꿀맛이다.
농촌일손돕기 중 가장 즐겁고 신나는 것이 벼 베기라더니 그림자가 채 길어지기도 전에 논바닥은 금세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벨 데 없나 하는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버스는 계획된 정기노선을 이미 벗어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시골 장터를 이리저리 헤집고 비포장도로의 흙먼지 구경을 한참 하다 보니…. ‘축목장이잖아? 술과 안주는 많은데 마실 장소가 마땅찮다고들 몇 분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하더니.’ 들고는 못 가도 뱃속에 넣고는 간다는 옛 술꾼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버스 속에서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막걸리통도 콤바인의 벼 포대처럼 꾸역꾸역 내려지고 있었다. 단백질 육고기 안주와 붉은 색 입맛을 돋우는 홍어무침들이 내려지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수십 명이 잔디밭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흥이 안 나고 베길 수 없는 처지! ‘ㅇㅇ국 사람, 어〜 없나?’, ‘왜 이래, 여기 나〜간다.‘. 급기야 실,국,관서 대항전으로 풍년가에 이어 아리랑이 연달아 이어진다. ’저 사람 누구지?‘. ‘예, ㅇㅇ과의 ㅇㅇㅇ라고 올봄에 ㅇㅇㅇ에서 올라 왔죠.’ 노래판의 사양법도가 어이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평소에 빼던 이들도 이제는 자청하고 있으니 말이다.
‘ㅇㅇ국장 닮았나? 노래도 잘 부르네그려.’, ‘노래도 잘 불러야 빨리 출세합니다.’ 간곡한 요청에 높으신 분들 ‘에이, 나 노래 못 불러.’ 하며 손을 내젓지만 이미 마이크가 잡히고 구성진 가락이 절로 나게 한다. 이게 바로 옛 성현들이 말씀하신 언행일치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노래 불렀는데 팁도 없나?‘ 뒷발로 꾹꾹 눌러 담은 막걸리 한 잔과 종축장에서 내어 놓은 날 통닭, 홍어무침이 입을 꽉 채운다.
노틀카 찡띠오스(술잔을 놓지 말고 털지 말고 마신 후 카! 하고 소리 내지 말아야 하며 얼굴을 찡그리지도 입에서 떼지도 말고 오래 들고 마시지도 않고 마신 후에는 헤! 하고 스마일 해야 한다는 ㅇㅇ주조장 권주 C.M song)로 몇 순배 돌리다 보니 막걸리통의 수위는 작년 늦가을의 안동댐만큼이나 형편없이 낮아져 가고 있었다.
이 도령 춘향 만날 제 ‘생긋 웃는 네 모습도 이쁘지만 꾀꼬리 같은 너의 소리 한끗 이쁘고나.’ 했다던가. 우리 어여쁜 아가씨들 노래솜씨는 어깨춤과 더불어 우리 딸낭구가 제일 좋아하는 조용필의 ‘못 찾겠다 꾀꼬리’를 닮아가고 있었다.
점차 길어져가는 그림자가 파장을 재촉하는데 관중 없을 때 불러 자기 PR이 안됐다고 관중 많은 지금 꼭 한자리 해야겠다는 간곡한 요청에 또 한 번 흥이 나 이어지고 있었다.
농수산부 이래 이런 재미는 일찍이 없었다는 얘기가 오가면서 조직 활성화라는 게 탁상 앞 회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어이, 사회자, 왜? 나는 안 시켜, 나도 노래 잘 한단 말이야.’
그 친구 무척이나 노래 부르고 싶었던 모양이지 끌끌! 그저 지는 해가 아쉬울 뿐이로세.
첫댓글 40년 전 농촌 벼베기 지원 풍경이군요. 요즈음은 대부분 콤바인으로 수확하니 함께 울력하는 기회가 별로 없지요. 그러고 보면 옛날이 더 행복했고 사람사는 맛이 났던 것 같네요. 돌이켜보니 나는 고등학교 시절 선친을 도와 1500평의 벼를 벤 이후 오늘날까지 한번도 논에 들어가 본 적이 없군요. 그러고도 매일 쌀밥만 잘 먹고 있으니 농부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더 드는군요. 날이 가면 갈수록 농촌 일꾼이 줄어드니 각종 작물 수확에 맞춘 범국가적 노력봉사 플랜이 있어야 할 것 같군요. 잠시 흥에 겨운 시간이었습니다.
봄 가을 한차례씩 모심기 벼베기 봉사를 나갔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주전자를 들고 논두렁을 오가며 막걸리를 따라주던 주인 농부의 상기된 얼굴도 떠오르구요. 그땐 낭만이 있었지요. 나도 나름 연줄이 있어서 이런 공무원 나리님들 봉사도 받고 있다는... 농부는 만면에 득의에 찬 웃음을 머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런 낭만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그런데 송백이 그 옛날의 아련한 추억 하나를 소환해 주시네요. 잘 읽었어요~
80년대 송백글을 읽으니 40년 젊어
진것 같군요. 나도 시골 촌놈이라
농부들 애환을 어느정도 알만합
니다.
고등학교 농업시간에 농업선생이
흑판에다 하얀분필로 "농업은
천하의 대본이다"라는 글을 쓴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벼베기 장소에 흥이 넘치네요.휴식시간에 홍어무칭과
통닭과 함께 마시는 농주 맛은 얼마나 좋던가요!
거기에 끝나고 노래자랑까지...요.순시대에 태평가를
연상 시키네요.저도 시골출신이면서 벼베기는 해본 일
이 없어 지금 생각하니 아쉽네요.풍요와 멋이 넘치는 글,잘 읽었어요.고마워요.
1984년 10월 26일이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 안양 평촌에 소재한 수도군단에서 재직중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 황금들녘이 남아 있었을 때라 송백의 벼베기 행사가 눈에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