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에 빠진 나를 구해준 형,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박청순(1954~1998)
박 민 순
지난 설날(1월 25일)을 열흘 앞두고 나는 한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오토바이크를 타고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중리 만의사를 찾아갔다.
22년 전, 45세의 나이로 세상 떠난 형(내 바로 위로 나보다 2살 더 많다)의 유골이 뿌려진 곳이 바로 만의사 아래다.
형이 생각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찾는 곳이지만 특히 명절날이 다가오면 꼭 찾아가는 습관이 생겼다.
11남매(7남 4녀) 중에서 형은 맨 밑에서 10번째이고 남자로선 6번째, 그리고 그 밑의 동생이 나(11남매 중 막내로 남자로선 7번째)다.
위의 누님들과 형님들은 건강한 편이었지만 어머니 나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태어난 누나와 형과 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약한 체질로 태어났다.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30대 중반 이후에 배앓이를 한 어머니는 그 병을 고치기 위하여 담배 한 번 입에 대보지 않은 아버지 허락 하에 민간요법으로 흡연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들을 임신한 상태에서도 어머니는 흡연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래선지 모르지만 우리집 가계도를 보면 기관지나 폐 계통이 약한 편이다.
여섯째 형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마치고 중학교는 못 다녔다.
초등학교 졸업 후, 15살에 충청도 산골에서 나와 아이스케키 장사, 기술을 배워본다고 목욕탕(때밀이), 양복점(재단사)에도 조금 다녀보았지만 녹녹치 않아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9살에 수원으로 올라와서 철공소에서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여 경기도 용인과 경기도 광주로 옮겨가며 일하다가 결혼 후엔 오산시에 정착하였다.
충청도 산골에서 살던 1964년, 초등학교 2학년 내 나이 9살, 여름방학 때로 기억한다.
고향동네서 3Km정도 산길로 걸어가면 구룡사 절 밑에 은천저수지가 있다. 그곳으로 날마다 더위를 날려 보내자며 형과 나,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이 멱 감으러 갔다. 어느 날이던가 깨벗고 저수지가에서 놀다가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수영도 제대로 못하던 내가 어쩌다 깊은 곳으로 떠밀려가 허우적댈 때였다. 살아야한다는 생각하나로 계속 물속과 물위를 들쑥날쑥 발버둥 치다 지쳐서 물속에 잠길 무렵, 밖에서 앉아 땡볕을 씌던 형(11살)은 물속에 잠기는 나를 보고는 잽싸게 저수지물로 뛰어들어 한 손으로는 저수지 가장자리의 억세풀을 꽉 잡고 한 손은 길게 뻗어 내 손을 잡아당겼다.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갈림길에서 형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난 나는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그 저수지로 멱을 감으러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 결국 동네 초등학생 아이가 그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 일요일, 수원을 떠나 경기도 용인과 경기도 광주를 전전하며 철공소에서 일하던 형을 가끔 찾아갔다.
그때마다 형은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단칸방에서 기름때가 낀 가무잡잡한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사 주고 만 원 짜리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수업료를 제 날짜에 못내 교실에서 쫓겨나오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로 약간의 돈을 벌어 쓰던 학창시절이었기에 형이 준 만 원은 나에게 큰돈이었고, 학비나 용돈으로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결혼하여 아들 딸 남매를 낳고 넉넉하거나 여유 있게 살지는 못했지만 형수와 맞벌이하면서 집도 장만하고 다복하게 사는 형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40을 넘기면서 약한 체질 때문인지 결핵도 앓고 전립선염이 심해 병원에 입원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IMF사태가 왔고 이런저런 고통을 이기지 못한 형은 대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을 남기고 45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형은 기억할지 모르지만, 내가 저수지에 빠져 죽느냐 사느냐 긴박한 상황일 때 가까스로 살려낸 내 생명의 은인이 형이야.
형이나 나나 가난한 농부 집안의 흙수저로 태어났지만, 형의 고달픈 삶의 여정을 가장 가까이서 안타깝게 지켜봐 온 이 동생은 형이 떠난 지 22년이 흘렀어도 형을 잊지 않고 있어.
형이 이 세상에 남긴 두 자녀는 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손자가 둘인데 큰손자는 벌써 초등학생이 됐어.
요즘도 가끔 꿈속에서 나타나는 형을 만난 뒤 잠에서 깨면 형이 꼭 살아있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어. 지금 만날 수만 있다면 형이 그토록 좋아하던 돼지고기 로스에 소주로 건배할 텐데….
약한 몸으로 태어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다간 형을 본보기 삼아 나도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이 세상 떠나 형한테 가면 예전처럼 반갑게 맞이해 줘.”
<2020.3.25,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