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강(漓江)에서
이 문 열
집을 떠날 때는 가을도 깊어 있었는데 향항(香港)을 거쳐 계림(桂林)에 이르렀을 때는 오히려 늦여름이었다. 계림이 내 사는 해동(海東) 땅보다 남쪽이라 그리된 것이나 내게는 왠지 그만한 세월이 걸려서인 듯 느껴졌다. 이젯사람들의 나는틀〔飛行機〕을 빌려 열 시간 남짓에 이르렀으되 흥으로는 옛적 조각배로 발해(渤海)를 건너고 말등에 얹혀 중원(中原)을 가로지르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리라.
줄곧 나와 길을 함께한 그대는 계림에 이르러서야 나를 알아보았다. 양풍(洋風)으로 지은 커다란 객잔(客棧)에서 짐을 풀고 다루(茶樓)로 내려왔을 때 먼저 내려와 차를 마시며 아득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던 그대가 나를 보고 말하였다.
“어째 처음 와 보는 곳 같지가 않네요. 아무래도 기억에 있는 땅 같아요.”
“아마 그럴 거요. 생명 이란 풀씨같이 날리며 세상 이곳저곳에서 돋았다 지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뿌리박았던 땅에 대한 기억은 영혼에 새겨지는 법이오.”
“그럼 어느 생에선가 제가 이 땅에 뿌리박은 적이 있는 생명이었다는 뜻인가요? 이 한생에서는 전혀 본 적 없는 이 땅이 그렇게 그리웠던 것도 그 기억 때문이었을까요?”
해동 땅에서의 그대는 무슨 사숙(私塾)의 여사범(女師範)이었다 했던가. 번잡한 세사(世事)에 지워져 있던 기억의 한끝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내다보다 다시 내게 그렇게 물어 오는 그대의 단정한 모습이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한 내 기억의 또 다른 가닥을 강하게 일깨웠다. 그래, 내게는 이 땅뿐만이 아니라 그대도 기억이 있다. 이 땅에서의 그대를 나는 알 듯하다. 그 새로운 기억 이 내 목소리를 떨리게 했다.
“아마 그럴 거요. 생명이 품는 모든 알지 못할 그리움은 여러 살이[生]에 걸쳐 새겨졌다 지워진 기억들일지도 모르오. 그래서 이 한 살이의 기억에 매달리지 않을수록 더 많은 그리움을 품게 되는 것인지도.”
그러자 그대는 더욱 골똘하여 그 땅과 그 땅에서의 삶을 기억 속에 되살리려고 애썼다. 나는 그대 곁에서 뜨거운 차를 식혀 마시며 그대가 두터운 세월의 지층 밑에 파묻힌 그대 생명의 유적들을 온전하게 발굴하고 복원해 내기를 기다렸다. 그 속의 나까지도.
“그런 것도 같네요. 그래요. 이 땅은 틀림없이 제가 언젠가 살았던 곳이에요.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삶의 형태예요. 어쩐지 그때의 저는 원초적 삶의 고통에 짓눌린 민초의 딸이었던 것 같지는 않네요. 아니, 더 밑에는 그런 것이 깔려 있을지 몰라도 우선 잡혀오는 것은 무언가 상당히 자유롭고 유쾌한 넋의 움직임들이에요.”
이윽고 그대는 고개를 내게로 돌려 깊이 모르게 그윽해진 눈길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대의 기억은 뜻밖으로 희미해 겨우 그 옛날의 아련한 분위기에나 미쳤을 뿐이었다. 나는 적이 실망하여 마시고 있던 꽃차〔花茶〕 마저 쓰디쓰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래 실망해 있을 필요는 없었다.
“거기 나는 없소?”
내가 참지 못해 그렇게 묻자 그대가 무슨 날카로운 것에 찔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크고 맑은 눈에 처음 내비치던 것은 틀림없이 놀라움이었지만 이어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과 오랜 그리움의 끝에 오는 투명한 슬픔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오오, 그대 이제 나를 알아보는가. 나도 그대와 같은 슬픔으로 갑작스레 가슴이 미어져 왔다.
“아, 있어요! 맞아요. 바로 상공(相公)이셨군요. 이 여름내 밤마다 저를 잠 못 들고 뒤척이게 한 것은, 휘붐하게 밝아 오는 새벽 창을 바라보며 어딘가 내가 반드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며, 이제는 그곳으로 떠나야 할 때라는 느낌에 빠져들게 한 것은. 그래서 복직이 의심스러운 휴직계를 주저 없이 내던지고 많지 않은 적금을 털어 이 길을 떠나게 한 것은. 피붙이와 이웃들의 걱정스러워하는 눈초리가 아무렇지 않고, 이 여행이 남은 삶에 끼칠 해로움도 두려워 않게 한 것은.”
그대가 숨 한 번 쉬는 법 없이 단숨에 그렇게 말했다. 벅차 떨리는, 그러나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도 벅참과 떨림을 누르면서 가만히 받았다.
“실은 나도 그대가 바로 나를 부른 사람이라는 건 조금 전에야 알아보았소. 하지만 이제는 더 많은 것을 알 듯하오. 우리가 그때 여기서 누구였으며 어떤 사이였던지를. 어째서 이강(漓江) 삼백 리가 우리 모두에게 여러 생을 거듭하면서도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는가를.”
그때 나는 진실로 그대와의 즐거웠던 날들과 내게는 쓸쓸하기 그지없던 그 마지막을 한 끈에 꿴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그 이별의 의식은 바로 사흘 밤 사흘 낮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이강을 따라 흐르며 이루어졌는데, 그 뒤 그대는 강물이 되어 남으로 흐르고 나는 구름이 되어 북쪽 하늘을 떠도느라 우리는 그 살이에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대의 기억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고개도 갸웃거려 가며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지만 더는 잘 안 되는 눈치였다.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네요. 그때 우리는 누구였나요?”
“그대는 재예(才藝)로 형 양(荊襄)을 떨쳐 울리던 가인(佳人)이었고, 나는 불우한 공자(公子) 였소.”
나는 나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으나 그대는 아니었다. 재예는 뛰어나도 그대는 한낱 유녀(遊女)에 지나지 않았다. 그대는 내 거짓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음의 일만을 궁금해했다.
“그런데 왜 이강 삼백 리가 우리에게 여러 생이 지나도 잊지 못할 곳이 되었나요?”
“아주 즐거웠던 날들이 있었소. 내일 그리로 유람을 가면 그대에게도 떠오르는 일이 있을 거요. 그때 함께 떠올려 봅시다”
나는 한층 심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대는 다시 만난 기쁨에서였는지 조금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기억에도 없는 이강을 그리워하며 다음 날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가까운 주루(酒樓)에서 오랜 세월 만의 만남을 함께 기뻐했다. 그러다가 늦어서야 객잔으로 돌아가 한 침상에 들었는데, 놀랍게도 그대의 몸은 그때 헤어진 뒤 몇 번이고 거듭된 생(生)에도 불구하고 옛 그대로였다.
다음 날 일찍 객잔을 나선 우리는 기차(氣車, 자동차)를 타고 이름난 계림산수(桂林山水)에서도 으뜸가는 절경으로 꼽는 이강 삼백리(漓江三百里)의 상류 선착장을 향했다. 가는 길에 보니 옛날의 웅장했던 장원이나 아무렇게나 몰려 있던 오두막들은 자취가 없고, 혁명 후에 지어진 붉은 벽돌의 농가들이 누가 보아도 일정하게 배치된 형국으로 무리 지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대지는 수백 년 그 옛날보다 오히려 더 젊어진 듯 온통 붉은 황토였다.
“이 길은 기억날 듯도 하네요. 그때는 마차로 흔들리면서 왔었지만요, 아마.”
창밖을 내다보던 그대가 눈을 찡긋하며 내게 그렇게 소근거렸다. 우리와 기억을 함께하지 않는 다른 일행들을 꺼려 해서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실한 그녀의 기억을 채워 주었다.
“그렇소, 마평(馬乎, 형양의 옛 이름)에서 빌린 쌍두마차였소. 팽(彭)가 성을 가진 마부가 꽤나 익살맞았더랬지.”
그대가 다시 길가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마을도 기억에 있는 듯해요. 흙벽이 벽돌로 바뀌고 이엉 대신 날림 기와가 얹혀도 전 금방 알아볼 수 있어요. 가서 보면 그때 우리 말에 여물을 먹여 주던 그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있을 거요. 그 숱한 혁명의 세월이 지나갔지만 그리 많은 것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구려. 그들은 감격에 차서 우리는 변했다, 우리는 발전했다고 수없이 외쳤었소. 특히 저 붉은 벽돌집들이 지어졌을 ‘대약진(大躍進) 운동’의 시기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아닌 듯싶소. 어쩐지 그들의 한, 충족받지 못하는 갈망은 의연히 엣 그대로인 듯만 싶소.”
나는 까닭 없이 비감에 차서 그렇게 받았다. 그 찬연하던 아라사(我羅沙)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이래로 상념이 혁명의 언저리에 이르면 나는 언제나 영문 모를 비감에 빠져들고는 했다. 그러나 그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벽돌 굽는 법도 예나 다름없네요. 저기 저 둥그렇고 붉은 흙더미가 벽돌 굽는 가마겠지요.”
그대는 또 한군데를 손가락질하며 회상의 달콤한 감회를 즐길 뿐 내 섣부른 비감 따위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윽고 그리워하던 계림의 산수가 그 특이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렇게도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아름다움의 한 이상태(理想態)로 그려 내던 그 산수 듣기로 계림의 산수는 저 유명한 미리견(美利堅)의 대협곡(大峽谷, 그랜드캐니언)과 같은 융기 지형(隆起地形)이 빚어낸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다 같이 이름나도 그 이름의 실질은 너무나도 달랐다. 대협곡이 웅장함, 신생, 힘 따위의 강렬한 인상으로 우리를 압도한다면 계림의 산수는 수려함 노성미, 기품 같은 보다 성숙한 미의식으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우리가 선착장에 이른 것은 객잔을 떠난 지 한 시간 남짓, 멀리 신선도(神仙圖)의 배경 같은 연봉(連峰)들이 자태를 드러낸 지는 채 이십 분도 안 돼서였다.
그 선착장은 개방 뒤에 몰려든 이방의 유람객들을 위해 새로이 연 것이라 우리의 기억에는 이어지지 못했다. 배들도 사면 유리창을 대고 발동기를 단 이양선(異樣船)이었다. 그게 다시 그대의 기억을 건드린 탓일까.
“그때 우리가 빌렸던 그 작은 돛배들은 다 어딜 갔을까요? 우리가 떠났던 그 나루를 찾아내면 아직 거기 있을까요?”
배 안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기 무섭게 그대가 내게 물었다.
“아니, 없을 거요. 물굽이는 변하고 돛배들은 사라져 갔소. 형상은 세월을 따라 변하는 법……. 그러나 실질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소. 저기 사공을 보시오. 기억에 없소?”
나는 그러면서 키를 잡고 있는 유람선의 늙은 선장을 가리켰다. 그대도 쉽게 옛 기억을 되살렸다. 무감동하게 출발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선장을 흘깃 보고는 두 눈까지 반짝이며 받았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난데없는 선장복과 선원모에다 수염을 밀어 알아보지 못했나 봐요. 저 말 없음이며, 무심함 맞아요. 바로 저 늙은이였어요. 그때도 양소(陽塑) 나루까지 우리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커녕 제대로 쳐다본 적조차 없었지요.”
잠시 동안에 배 안은 여기저기서 도착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색목인(色目人)에 양인(洋人)도 여럿 있었고, 왜인(倭人)들도 많았다. 배가 떠날 무렵 하여 사공 쪽의 가벼운 음식 접대가 있었다. 밀랍 입힌 종이에 싼 이름 모를 말린 과일, 지난 어렵던 시절에는 ‘비가’란 이름으로 우리 해동에도 있었던 밀가루 냄새 나는 질 낮은 엿과자, 그리고 껍질째 볶은 땅콩이 한꺼번에 담긴 접시였다.
“이건 정말로 변했군요. 도리어 사공이 우리를 대접하다니. 예전에는 끼니에서 술과 안주까지 우리가 모두 마련해서 배에 올랐지요. 물론 나루 가까운 객잔의 요리사가 만들고 그 일꾼이 배까지 날라다 준 것들이었지만.”
“그것도 꼭 그렇지는 않소. 술과 안주라면 여기 있소.”
나는 그러면서 손가방에서 술병과 잔이 함께 들어 있는 공부가주(孔俯家酒) 상자와 육포를 꺼냈다. 그리고 곱게 눈 흘기는 그대가 어여뻐 더욱 짓궂게 한마디 덧붙였다.
“변한 것은 오직 그대만인 듯싶구려. 그대는 비파를 안고 오지 않았소.”
그사이 우릉우릉 기관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뱃머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선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배는 드디어 이강으로 들어서 그 흐름에다 몸을 맡기려 하고 있었다.
배는 강물을 따라 흐르고 우리들의 기억도 그 강물을 따라 흐른다. 백 년, 혹은 천 년의 세월 저 너머의 것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한 기억이다.
우리의 기억조차 이르지 못하는 아득한 옛날에 대지가 주름져 솟아오르고, 원시의 물줄기가 그 대지를 씻어 가 거친 협곡을 이루었다. 그 뒤 다시 숱한 세월의 비바람이 깎고 다듬어 마침내 이루어낸 걸작이 계림(桂林)의 연봉(連峰)과 이강(漓江) 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은 그 모든 게 이루어진 뒤에 시작되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이 뱃전에서 지었던 노래들이 기억나오?”
나는 그대가 기억해 내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그대가 내 눈을 통해 마음까지 읽으려는 듯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떠오르지 않는군요. 어떤 노래였어요?”
“평측(乎仄)까지는 떠올리지 못하지만 대강 이랬던 것 같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내 기억을 감동 삼아 읊었다.
산과 물 바라보기 얼마나 여러 곳이었나〔觀山望河幾何處〕
이강 가에 이르니 말과 생각 어울려 끊기네〔暫絶言思漓江頭]
그래 놓고 그대가 알아보기 좋게 옛말을 종이에 옮겨 그대에게 보여 준 뒤 다시 짓궂게 물었다.
“하지만 나도 전(轉)과 결(結)은 기억하지 못하오. 혹 그대가 기억해 낼 수는 없겠소? 아마는 그때도 그대가 전과 결을 받은 것 같은데.”
그대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호소하듯 말했다.
“저는 옛말을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이젯말로라면 뜻은 겨우 이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고는 가만가만 읊어 나갔다.
무릉이 어떤지 내 보지 못했지만,
여기보다 낫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
그때 번다한 사람의 눈이 없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옛날처럼 그대를 껴안고 입 맞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독한 술 한 모금으로 갈증과도 흡사한 그런 감정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배는 10리 길을 흐르고 나는 다시 자신 있게 솟는 기억 한 자락을 펼쳤다.
“저기 구마화산(九馬畵山)을 알아보겠소? 그때 말수 적은 늙은 사공이 일러 주던 곳 말이오.”
그대는 내가 가리킨 쪽을 정성 들여 살폈다. 그러나 어느 봉우리를 가리키는지는 얼른 알아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길 안내인이나 된 듯 그대에게 일러 주었다.
“저기 저 바위산의 검은 얼룩을 자세히 살펴보시오. 아홉 마리의 말이 뛰노는 형상 같지 않소? 그래서 옛부터 저 봉우리를 구마화산이라 부른다 했소.”
그때 그대가 갑자기 눈을 반짝하며 한곳을 가리켰다. 강가에 나와 조는 듯 앉아 있는 늙은이들이었다. 그들 주위로 몇 마리 검은 깃털의 몸집 큰 새가 날고 있었다.
“저 늙은이들은 알겠어요. 저 가마우지들도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요.”
나도 그 늙은 고기잡이들이 기억났다. 물고기를 잘 잡는 새를 훈련시킨 뒤 목에 가락지를 끼워 풀어 놓으면 그 새는 큰 물고기를 잡아도 삼킬 수가 없어 부리 아래의 주머니에 담아 주인에게로 오게 된다. 그러면 주인은 그 물고기를 거두는 대신 그 새가 삼킬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모이를 주고 다시 날려 보내 물고기를 잡게 한다.
나는 그대의 기억이 기특했지만 슬며시 심술을 부려 보았다.
“맞소. 그때도 저 늙은이들이 있었지. 하지만 저 새는 가마우지가 아니라 사다새요. 잡은 물고기를 저장해 둘 수 있는 주머니를 부리 밑에 가진 새는 사다새란 말이오.”
그리고 잠시 우리가 몸 받아 살고 있는 땅의 현실이 떠올라 덧붙였다.
“세계가 우리를 솟아오르는 용에 비유한다지만, 어느 정도 우리의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경제를 바로 사다새 경제라 부른다더군. 왜(倭) 기술, 왜 기계, 왜 부품 가져다 죽어라고 만들어 팔아 봤자, 남는 건 겨우 허기진 배나 채울 정도의 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겠지. 큰 물고기는 어부 격인 왜국이 챙기고 말이오.”
거기서 기억의 여행은 잠시 중단됐다. 우리는 이 한살이를 마칠 때까지 의지해 살아야 할 바다 건너의 동강 난 땅을 얘기하며 한동안 우울해지기도 하고 쓸쓸해하기도 했다.
우리가 다시 유장한 기억으로 되돌아간 것은 내 술병이 반 넘어 비었을 때였다. 찔끔찔끔 마신 공부가주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내 기억은 이내 한군데 눈에 익은 봉우리에 머물렀다.
“저기 필봉(筆峰)이 있군. 알아보겠소?”
나는 눈길만으로 필봉을 가리켰지만 이번에는 그대도 쉽게 알아보았다.
“알아요. 저기 꼭 붓같이 생긴 봉우리. 그런데 필봉이란 이름이 붙은 봉우리를 가진 땅에는 반드시 이름난 문사가 난댔는데, 저 봉우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이곳의 문사로는 누가 있지요?”
그대는 그렇게 물어 은근히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옛날의 문우들이며, 이 한살이에서 보고 들은 이름들까지를 더듬어 보았지만 계림 출신의 문사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가 그동안 내게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려는 듯이나 빈정거렸다.
“상공(相公)의 기억도 못 믿을 데가 있군요. 옛 글벗의 이름 하나 기억해 내지 못하세요?”
그러나 제법 오른 술기운 탓일까. 내게는 그대의 그 같은 빈정거림이 오히려 고혹적일 뿐이었다.
지난 살이에서의 아련한 기억이 주는 감동과 취흥 속에 배는 쉼 없이 흘러내리고 그사이 점심 때가 되어 선내식(船內食)이 나왔다. 주로 이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재료로 한 요리였지만 그대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배 안이라는 제한 때문인지 부실한 요리에다 세제(洗劑)를 안 써서인지 불결한 느낌을 주는 접시가 식욕을 앗아가 버린 듯했다. 내게도 그 식단은 나머지 술을 비우는 데 안주의 구실 밖에는 못 했다.
우리가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갔을 때 나는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날은 밝고 강바람은 상쾌해 나는 “술 마신 뒤에는 찬바람 부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수주옹(樹州翁)의 충언도 잊고 갑판 위에서 나머지 여정을 보냈다.
우리는 그 오후에 다시 몇 번이나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아득한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만났다.
남쪽이라고는 해도 멱을 감기에는 이미 늦은 계절인데 유람객들이 던져 주는 과자 부스러기나 푼돈을 얻기 위해 뱃전까지 헤엄쳐오던 인근 마을의 아이들, 그들은 그 옛날에도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추위로 시퍼레진 입술, 까까머리 가운데 땜질을 한 듯 하얗게 드러난 쇠버짐 자리, 누렇게 흘러내린 코. ― 그래, 틀림없이 기억에 있었다.
왕대를 좁고 긴 뗏목처럼 엮은 쪽배를 타고 무언가 이름 모를 남방의 과일들을 팔려고 유람선 선창으로 저어 오던 소년과 아낙네들, 그들도 그 옛날에 본 듯하다. 해진 곳을 바탕 천과는 전혀 색깔이 다른 천을 대 기운 옷, 식물성 섬유로 삼은 신발, 때 먼지 위로 흘러내린 땀자국. ― 그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소년과 아낙들 틈에 간간 보이던, 그림이나 글씨를 팔러 나온 늙은이들도 우리는 알 듯했다. 그 옛날에는 마을의 묵객(墨客)들로 설령 글씨와 그림을 팔아도 사랑방에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시속이 각박해지니 늙은 몸을 이끌고 스스로 저잣거리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여러 기억 속의 얼굴들과 겹칠수록 마비와도 흡사한 상태가 되는 감동을 주는 계림의 산수(山水) 사이를 흐르는 동안에 어느덧 배는 그 종착 나루가 되는 양소(陽塑)에 이르렀다. 양소도 본디 우리 옛 기억 속에 있는 땅이다. 나루 자체가 옛부터 알려진 절경인데다, 그 석벽의 전각(篆刻)으로 유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석굴이 있고, 이름난 정자와 정원이 있다.
그러나 그 나루에서 목마른 사람처럼 들이켜 댄 몇 깡통의 맥주탓에 이 살이에서의 이강 삼백 리에 관한 내 기억은 그걸로 끝나고 말았다. 뱃전에서 강바람을 쐬었다 하나 이미 마신 한 병 술이 약한 술이 아니었으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날 남은 여정을 이끌려 다니는 중에 내가 석굴의 어떤 전각 앞에서 그 옛날 내가 쓴 글씨를 찾았다며 떠들어 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동행의 기억일 뿐이다. 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돌연 세월의 허망함을, 우리 살이의 속절없음을 과장하며 눈물까지 글썽이더란 말도 있으나 그 또한 다른 동행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양소 나루에 내린 뒤의 내 기억은 다만 오래 참아 온 그대의 물음에 대답한 거짓말뿐이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헤어졌나요? 그리고 그 뒤 우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대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진작부터 준비해 둔 대로 일러 주었다.
“실은 이 이강 삼백 리가 바로 길고 쓰라린 이별의 의식이었소. 그 뒤 그대는 아미산(蛾嵋山)으로 들어가 니승(尼偕)이 되었고, 장안(長安)으로 간 나는 영락을 거듭하다 『석두기(石頭記, 홍루몽의 다른 이름)』를 남겼소.”
하지만 아니었다. 그때 그대는 형양의 유녀(遊女)로 돌아갔고, 나는 장안으로 올라가 봉미(俸米) 백 석도 안 되는 벼슬길에 머리터럭이 희어졌다.
(1996년)
2016년 12월 6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