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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미선과 함께하는 수필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소향/이미선
<<화장의 유래와 역사>>
‘make-up’은 분장이라는 뜻이 강한 단어이다. 그러나 화장품 제조회사에서 상품을 파는 미용사원들에게 화장을 가르쳐 주며 ‘beauty make-up’이라고 해야 하는 화장을 beauty를 생략하고 make-up이라고 불러온 전례로 최근 분장과 화장이 혼용되고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이 된다. 화장의 발생은 오래 되어 원시인의 안면 채색은 잘 알려졌고,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도 안료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무대화장으로서 독립하여 무대예술로서 중요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그리스 연극 이래의 가면극(假面劇)의 전통이 쇠퇴되어 무대를 옥내에 설치하게 되면서 르네상스 이후부터 분장의 필요성이 생겼다. 그 후 가스 ·전기에 의한 인공 조명이 발달되면서 무대의 독자적인 화장법이 고안되었고, 다시 19세기 후반이 되자 사실주의 연극이 융성해짐에 따라 각종 안료의 연구 ·진보와 더불어 복잡 정교한 분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오직 3가지 건조 크림?
같㉯?사용되었으나 1870년경에 지방성분인 도란(dohran)이라는 그리스 페인트(greasepaint)가 발명되어(독일의 오페라 가수 L.라이히너가 창안하였다고 한다.) 일대 혁신을 가져와 ‘도란 화장’이 화장술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자유롭고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후 품질이 개량되어 현재는 빛깔의 수도 번호별로 50여 종에 이른다. 또 라이히너(독일), 스타인(미국)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제조업자도 생겼다. 도란이라는 통칭은 독일의 그리스 페인트 제조회사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면을 대신하여 표면적 인물 표시를 하는 ‘변장(變裝)’의 성격으로부터 배우의 외용적(外容的) 특색을 살리며 맡은 역의 외적 특징을 표현하는 ‘화장(化粧)’의 성격으로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도 가무나 중국 고전극에서처럼 표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얼굴에 물감으로 그리는 선처럼 유형적(類型的)으로 인물 표시를 하는 변장적 성격의 것도 있다. 이것들을 근대적인 ‘사실적 메이크업’에 대한 ‘양식적(樣式的) 메이크업’이라고 하여 메이크업의 2대 양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가면과 화장의 중간적 기능을 ?
氷뵉磯鳴玆?할 수 있다. 분장의 특색은 일반 화장처럼 단순히 미화(美化)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희곡과 시나리오가 규정하는 인물상(人物像)에 따라, 그 직업 ·지위 ·연령 ·기질 등에서 오는 외용적인 특색을, 내면적 생활과의 관련에서 파악하여 이것을 자기의 안면적(顔面的) 특징으로 표현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종 안료를 사용하여 얼굴의 빛깔과 형태의 인상을 바꿀 뿐만 아니라, 만든 코, 만든 수염, 만든 눈썹, 가발, 팬 볼을 감추기 위해 어금니 언저리에 넣는 솜 등, 다른 물질을 사용하여 필요한 부분을 실제로 변형시킨다. 또 치열을 바꾸거나, 얇은 고무판을 얼굴에 붙이기도 한다. 분장은 또 무대 전체의 양식에도 지배된다. 연출이 사실적이냐, 양식적이냐, 장치의 형태와 조명의 명암은 어떠한가 등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조명과의 관계는 특히 밀접하여 충분한 고려를 요한다.
▣ 화장
신체의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하거나 위장하는 수단이다. 화장이란 말은 개화 이후부터 널리 사용된 외래어로서 가화(假化) ·가식(假飾) ·꾸밈 등의 뜻을 지닌다. 화장에 해당하는 순수한 한국어는 장식(粧飾/裝飾) ·단장(端粧/丹粧) ·야용(冶容)이고, 화장품은 장식품(粧飾品) ·장렴(粧) ·장구(粧具)였다.
이처럼 다양한 표현이 있는 것은 가리키는 의미가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화장만을 가리킬 때는 야용, 몸단장에까지 이르면 단장, 일반적인 화장일 때는 장식(粧飾)이었고, 장신구까지 치장한 경우에는 장식(裝飾)이었다. 특히 옷차림마저 화사하게 하였을 때는 성장(盛裝)이라고 표현하였다. 화장의 농도에 따라서도 다르게 표현했는데, 엷은 화장인 경우는 담장(淡粧)이라 하였고, 짙은 색조화장인 경우는 농장(濃粧) ·단장(丹粧) 또는 성장(盛粧)이라고 구분하였다. 이는 한국의 옛 화장개념이 현대 개념과 달리 가화 ·가식 등의 미화개념으로만 해석되었던 탓도 있겠지만, 입체화장 ·수정화장을 하지 않고 평면화장에 치중했던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여염집 여성들이 평상시의 화장과 나들이화장을 구분하였고, 그들 자신의 화장과 기생(妓生) ·무녀(舞女) ·악공(樂工) 등의 직업적인 의식화장(儀式化粧)을 애써 구별하려 했던 관습에 기인하기도 한다.
인간이 언제부터 화장을 시작했는지를 밝히는 일은 고대와 현대의 화장 형태가 다른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통설(通說)에 의하면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필요성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신분 ·계급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태고적부터 치장했다는 이유를 들어 학자들은 화장의 기원을 인류의 생존과 같은 시기라고 가정(假定)한다.
한국
북방에 거주했던 읍루인(婁人)들이 겨울에 돼지기름을 바른 것은 동상 예방 등 피부의 연화(軟化)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돼지기름은 동상 ·해그을음 ·눈그을음의 예방 및 피부의 연화작용이 뛰어나 유럽에서도 크림의 원료로 오랜 기간 이용하였다), 남방에 거주한 변한인(弁韓人)들이 새긴 문신(文身)도 원시치장의 한 형태이다. 또한 선사시대의 조개더미[貝塚]에서 가공한 조개껍데기, 짐승의 어금니, 미석(美石)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도 원시 장신구로서 목걸이 ·팔찌 ·가락지로 이용되었다.
단군신화에도 원시화장의 흔적이 엿보인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곰[熊族]과 호랑이[虎族]에게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기휘(忌諱)하도록 한 것은 고대사회의 지배층이 흰 사람(백색피부:지금도 흰 피부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관습이 남아 있으며, 알타이 계통의 최초 인간은 흰 사람이라는 신화가 있다)이었으므로, 흰 피부로 변신하기 위한 주술(呪術)이라 해석된다. 쑥과 마늘이 미백(美白) 효과가 우수한 미용재료임을 감안한다면 고대의 한국인들이 겨울에 피부를 보호할 줄 알았고, 계급과 신분에 따라 치장[文身]을 달리 하였으며, 돌 ·조개껍데기 ·짐승의 뼈로 장신구를 만들어 패용하면서 흰 피부로 가꾸기도 했던 것 같다.
1) 삼국시대
삼국시대부터는 당시의 화장과 화장품을 살필 만한 기록과 유물이 뚜렷한 편인데, 예를 들면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그중의 하나이다. 수산리와 쌍영총 고분 벽화에서 고구려인의 화장을 추출하면, 수산리 벽화의 주인공은 귀부인이고, 쌍영총 벽화의 주인공은 여관(女官) 또는 시녀로 보이는 데도 모두 머리를 곱게 빗고, 눈썹을 짧고 뭉툭하게 다듬었으며, 뺨에 연지화장을 하고 있다. 또한 무인(舞人)들은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연지를 이마에 바르고 금당(金)으로 머리를 꾸몄으니(《三國史記》 志一樂) 신분 ·빈부의 구별이 없이 치장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인들의 화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일본측 사서(史書) 및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일본이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법을 배워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진보된 화장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백제인들이 엷은 화장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고도의 화장기술의 표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신라는 백제 ·고구려보다 다소 늦게 문화를 발전시켰으면서도 화장면에서는 두 나라보다 앞섰다.
신라인들은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에서 남성인 화랑(花郞)들도 여성들 못지 않은 화장을 하고, 귀고리 ·가락지 ·팔찌 ·목걸이 등 갖가지 장신구로 장식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귀천에 관계없이 여성들이 향낭(香囊)을 차고, 귓불을 뚫어 귀고리를 달고, 장도(粧刀)를 지녔다. 또한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白粉) 외에 산단(山丹:백합꽃의 붉은 수술)으로 색분(色粉)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692년에 한 승려가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어 주고 상을 받은 일이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화장품 제조기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7세기경에 신라에서 이미 연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세계화장품 발달사에 유례없는 대발명이었다. 신라를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에 4∼6세기경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신봉됨으로써 청정 ·청결이 강조되고 목욕이 대중화되었다. 목욕의 대중화는 목욕용품의 발달을 촉진시켰는데, 쌀겨 목욕으로 피부미용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서민층에서는 팥 ·녹두 ·콩껍질 등으로 만든 원시비누, 즉 조두(豆)를 사용한 결과 날비린!
내가 몸에 배어, 이를 가시게 하기 위하여 향수 ·향료를 애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측 기록(《新唐書》)에 신라 여성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눈썹 그리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이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삼국유사》)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앞서의 설명과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우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의 여성들이 불교의 영향으로 엷은 화장을 했으며, 평면화장에 그쳤던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2) 고려시대
삼국시대에는 화장품 제조기술이 뛰어나 일본과 중국에 그 기술을 전하였고, 화장기술 역시 고도의 수준에 도달했었다. 화장뿐 아니라 옷 ·장신구 등 모든 생활이 사치에 흘러, 고려시대의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패망이 사치풍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사치금압(奢侈禁壓)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신라의 정치 ·경제 ·군사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다가 문화와 생활관습마저 계승하였으므로 신라의 화장경향 역시 계승 ·진보하였다. 고려인의 화장을 중국측의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부인은 귀밑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내려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 댕기로 매고 비녀를 꽂았다’(《宋史》)고 하였으며, ‘짙은 화장을 즐기지 않아 분은 사용하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으며(不喜塗澤 施粉無朱),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다. 또한 비단향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高麗圖經》)고 했는데, 이들 기록만으로 고찰한다면 고려인의 화장이 담장(淡粧)에 그쳤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이 기록자들이 송(宋)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우 짙은 화장을 했던 송나라 여인들보다 엷다고 표현한 것뿐이다. 고려인들의 화장이 결코 엷었거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짙은 화장을 금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佛家 八戒齊 중에 不著華瓔洛 不香塗身 不著香董衣 등의 조항이 있다). 또, 고려시대 초에 제도화된 기생(妓生) 중심으로 짙은 화장, 즉 분대화장(粉黛化粧)이 성행하였다. 분대화장은 반지르한 머리, 눈썹과 연지화장 외에 백분을 많이 펴 바른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짙은 화장이었는데, 기생을 분대라고 부를 만큼 기생의 상징적인 치장이었다.
분대화장 역시 평면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생들의 직업적인 의식화장이 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여염집 여성들은 엷은 화장을 고수하여 고려시대부터 화장경향이 2원화되고, 기생들의 분대화장으로 인하여 화장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향을 애용한 나머지 조정향(助情香)을 먹기까지 하였는데, 기생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고려가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가 그러한 예로, 향을 먹은 기생의 노래이다. 이처럼 기생들의 분대화장은 화장에 대한 기피성향 ·경멸감을 발생시킨 반면에 화장의 보급과 화장품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기생양성소인 교방(敎坊)에서 기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고, 이들이 사용할 화장품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수은(水銀)을 수입하여 거울을 만들게 하고 빗도 만들게 하였다(宮中에 鏡匠, 梳匠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후기에는 치졸하나마 머리염색도 유행했던 것 같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의하면, “백발에 화냥노는 년이……센(흰)머리에 흑칠하고……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다 희거다.…”란 속요(俗謠)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각종 화장도구와 화장품 용기가 있다.
삼국시대의 화장용기는 주로 토기 ·목제로서 파손되기 쉬워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나 고려시대에는 금 ·은 ·청동 등 금속제 외에 청자로 대량 제조되어, 화려하고 견고한 화장품 그릇이 많이 남아 있다. 유병 ·향수병 및 연지합 ·분합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특히 화장합[粧]인 청자상감모자합(靑瓷象嵌母子盒)은 신라의 토기화장합(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청자 ·백자 등의 화장품 용기는 화장품의 안전도를 고려할 때 어떤 재질(材質)의 용기보다 가장 적합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이 높고 관심이 높았던 사실은 삼국시대, 조선시대보다 고려시대에 청동거울이 가장 많이, 그리고 정교하게 제조된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화장문화는 중국 특히 원(元)나라에 크게 전파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고려와 원은 왕실끼리의 혼인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우위(優位)였던 고려의 문화가 대량으로 원에 전파되어 고려양(高麗樣:고려풍속)의 유행을 이루기도 했기 때문이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 전기의 지배층은 고려시대 초기의 지배층이 하였던 것처럼 검약(儉約)을 강조하였다. 이와 아울러 유교윤리를 생활의 기본으로 삼아 내외법이 강조된 나머지 자유연애와 외출이 금지되었다.
여성은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 부덕(婦德)이 강조되어 부용(婦容)은 깨끗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의 표현이라고까지 정의되었다. 따라서 여성의 화장이 부덕(不德)한 행위로 간주되기조차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화장품생산이 위축되거나 화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장개념의 세분화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여염집 여성들의 생활화장과 기생·궁녀 등 특수층 여성의 의식화장이 더욱 뚜렷해지고, 여염집 여성들의 생활화장도 평상시의 청결위주와 혼인·연회·외출시의 화장으로 세분되었다. 이는 남성들의 2원화된 여성관에도 기인한다. 조선시대의 남성들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여인상이 달랐는데, 소실(小室)이나 기생으로는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한 눈썹, 복숭아빛 뺨, 앵도같이 붉은 입술, 구름을 연상하게 하는 머리, 가는 허리를 소유한 팔등신 미인을 으뜸으로 여기고, 며느리나 아내로는 건강하고 성격이 원만하며 성실한 여성을 추구하였다.
전자에 해당하는 여성은 미인이나 박명(薄命)하고, 후자의 여성은 유자상(有子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소실과 기생 중심으로 분대화장이 보급되었고, 여염집 여성들은 깨끗하고 맑은 피부를 간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대부분 담장에 그쳤다.
그러나 의인소설(擬人小說)인 《여용국전(女容國傳)》이 여성의 화장을 국가정치에 비유하여 권장하고 있고, 화장품과 화장도구가 18종이나 등장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또 숙종(肅宗:재위 1674∼1720) 연간에 화장품 행상인 매분구(賣粉)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화장품의 생산·판매가 산업화할 조짐을 보일 정도로 다양하게 대량소비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더욱이 일시적이긴 하나 궁중에 화장품 생산을 전담하는 관청인 보염서(補署)가 설치된 적이 있고,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宣祖) 때 일본에서 발매한 '아사노쓰유(朝の露:아침이슬)'라는 화장수(化粧水) 광고문안 가운데 '조선의 최신제법(最新製法)으로 제조한…'이라는 구절이 있고 보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장품 제조기술은 높은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수공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산업화가 늦어져 외국의 화장품 기술에 비해 뒤떨어졌다.
1922년에 제조허가 1호로 출범한 박가분(朴家粉)의 경우를 들어 보면, 인기를 얻어 하루에 5만 갑이나 팔렸다고 하지만 생산방식이 재래식에 머물렀고, 납성분의 부작용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이 무렵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수입되었던 백분은 납부작용이 적어 국산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그 결과 국산화장품 불신감을 낳기도 하였다.
외제화장품과 아울러 입체화장기법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는데, 사회적 물의가 적지 않았던 신여성과 기생 중심으로 신식 화장이 신속히 보급되어 화장에 대한 경원감정(敬遠感情)이 확대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용하기 간편한 신식 화장품과 색채화장이 도입·보급되는 과정에서 다소 마찰이 있었던 것이다.
◇ 개화기 이후의 메이크업
강화도 조약(1876년)에 따른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는 신식 메이크업 테크닉과 화장법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주로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1920년대에는 수입선이 프랑스를 주로 한 유럽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수입화장품은 주로 크림, 백분, 비누, 향수 등이었는데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여 여성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에는 하얀 얼굴에 반듯한 이마의 잔털을 제거하고 박가분을 물에 개어서 하얗게 발랐다.
그 후 일본 유학생 오엽주가 종로 화신 백화점에 처음으로 미장원을 개업하고 새로운 메이크업 테크닉과 바니싱 크림 등의 신식 화장품을 소개하였다. 또 그는 입술 연지를 아랫입술에만 빨갛게 바르고 눈썹을 초승달 모양으로 그리는 화장법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은 일시적으로 퇴보를 보였으며, 6.25 이후 수입 화장품, 밀수 화장품, 미군 PX 유출품이 범람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다시 국산 화장품 생산이 본격화되고 메이크업 테크닉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60년 이후에는 바니싱 타입의 크림과 백분의 소비량이 격감한 가운데 액상색분(파운데이션)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또 입술연지가 고형(스틱)으로 바뀌었으며 아이섀도우가 등장해 색채 화장법이 시작되었다.
◇ 1900~1930년대
복식 경향은 한복과 양장이 혼동되었으며 신여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외국 유학생이나 외교관의 부인 등 극소수의 여성에게 양장이 착용되기 시작했다.
신식화장품과 함께 도입된 신식 화장법은 입술연지의 색깔이 진해지고 향내가 강렬해졌다.
치마의 길이는 짧아졌으며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든 차림이 신여성을 대표하였다. 하지만 이런 신여성의 화장과 옷차림이 접대부에서 먼저 유행되었고 일부 신여성의 자유연애 예찬으로 빚어진 비난 때문에 어염집 여인들은 종전보다 더욱 엷은 화장을 선호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 1940년대
화장에서 현대식 화장법이 도입된 것은 1940년대 직후이다. 화장 패턴은 얼굴을 희게 하고 눈썹은 반달 모양, 볼연지와 붉은 입술을 하는 것이다. 해방 후의 화장 기법은 번들거리고 눈화장(마스카라와 아이라인으로 강조함)을 강조한 부분 화장에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1945년의 8.15 광복을 계기로 한국의 화장품 산업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제 화장품의 범람과 일제 화장품 광고의 홍수는 일본의 패망으로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에 에레나 크림, 바니싱 크림, 모나미 크림, 스타 화장품 등의 구산 화장품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8.15 직후에 원료의 부족이 심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장품 제조 회사의 규모가 영세하였기 때문이며 그나마 1950년 6.25 동란으로 또 다시 화장을 하지 않는 경향을 낳았다.
◇ 1950년대
이 시기에는 수입 화장품, 밀수 화장품, PX 유출품의 범람이 가속되다가 1956년 처음으로 블란서 '코디'사와 기술 제휴로 신제품을 개발하면서 코디분이 국산화되어 품질을 혁신했고,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화장품 시장은 성숙기를 맞이하게 된다. 영국 영화의 상영으로 오드리 햅번 등 영화 스타의 모방이 헤어, 화장, 복식에 유행했다.
◇ 1960년대
정부의 국산 화장품 보호정책에 따라 화장품 산업은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색조화장품을 생산했다. 부자연스러운 하얀분 화장에서 자연스런 피부표현으로 바뀌고, 기초 화장을 중심으로 한 피부 표현에 역점을 두고 수정 화장이 더해져 세련된 느낌을 주긴 했으나 인조 속눈썹의 사용으로 꾸민 듯한 느낌을 주었다.
◇ 1970년대
화장품 회사의 주도하에 메이크업 캠페인으로 색채 화장에 대한 거부인식을 불식시키고 입체 화장이 생활화되었다.
샴푸, 보디제품, 팩제품 등 화장품 시장의 급성장, 의상에 맞추어 화장하는 토털코디네이션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부터 의상의 유행이 화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1972년에 복고풍의 의복이 유행하게 되자 화장에 있어서도 복고풍이 나타났다.
1976년에는 패션과 함께 동양무드가 가미된 화장이 선보였고, 색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침착한 색조 올리브 그린, 크림 베이지, 브라운, 오렌지, 블루, 더블, 핑크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8년부터 미용 캠페인의 영향으로 메이크업이 토탈패션의 한 부분으로 조화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으며 계절별로 봄의 입술화장, 여름은 자외선 차단, 가을은 눈 화장, 겨울은 기초 피부손질에 중점을 둔 T.O.P 미용법이 정착되었다.
◇ 1980년대
1980년대에는 컬러 TV의 방영으로 색채에 대한 수요가 복식과 화장에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부분적으로 수입 자유화된 선진국의 다양한 색채화장품 수입으로 소비자가 자신의 개성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선택하는 지적 소비자 시대가 되었다.
해외동포의 귀국과 해외와의 교류도 빈번하여 세계의 패턴 소식이 동시에 한국에도 유입되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브룩실즈로 대표되는 자연적인 굵은 눈썹으로 자신감 있고 활동적인 여성상을 표현했다. 색조 화장은 더욱 세련되어지고 다양해졌으며 동양인의 오클계 피부에 잘 조화되는 코랄색상(핑크와 오렌지의 중간)이 유행하고 갈색을 주조색으로 황금색펄과 벽돌색의 조화로 세련되고 매혹적인 분위기의 색조화장이 유행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교복 자율화와 88올림픽을 기점으로 더욱 개성적인 자기표현과 과감한 연출이 두드러졌고, 컬러 TV의 대량보급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색상 사용이 다양해지고 뚜렷해졌다.
정부의 화장품 산업 보호정책 중의 하나로 1980년대 초까지는 우리나라 화장품이 외국제품과 비교하여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제 화장품 수입을 금지시켰으며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기술 제휴를 하도록 하였으나 우리나라 화장품도 품질이 향상되어 1983년 이후 화장품의 수입자유화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1986년까지는 전면 수입 자유화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의 메이크업 관련 정보가 많이 유입되어 일본보다는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하였는데 아이섀도우 화장의 더블패턴(아이홀 화장)으로 평면적인 동양인의 얼굴에 입체감을 주고자 했다.
◇ 1990년대
1990년대에도 패션의 흐름과 더불어 메이크업도 유행을 창출하고 선도하는가 하면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패션성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에콜로지의 경향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과 자연보호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면서 베이지, 오렌지, 브라운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자연스러운 색조가 강세를 보였다.
이 시기에 특히 특이한 현상은 각 브랜드에서 시즌마다 컬러를 제시하여 소비자로 하여금 유행을 선도해 나가는 현상을 들 수 있다.
각자의 개성이 강조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특징이 화장품 회사 주도하에서 소비자가 선택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혼합되는 색의 강약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무수한 색감을 참조하여 다양한 색채 예술의 감각으로 눈, 볼, 입술 화장을 표현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 패션경향은 어두운 무채색 계열로 몸의 곡선을 가린 미스틱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와 함께 국내에서 오리엔탈리즘과 결합되어 풍부하고 깊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오리엔탈 패션테마에 맞추어 한국적인 것을 모던하게 표현하게 되었는데 의상과 함께 창백한 피부톤, 가는 아치형의 검은 눈썹, 붉은 립스틱 메이크업도 나타났다.
또한 다른 한편의 메이크업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깊은 컬러의 주류가 예상된다. 우주공간의 어두운 색채들은 금이나 구리 등의 금속적인 광택과 혼합되어 깊이감을 더해주거나 스모키한 느낌의 다소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우더를 뿌려놓은 투명한 피부 표현으로 어두운 색조화장과 병행될 때 냉철하고 지적인 세련미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화장 연령이 저하되어 젊은이 대상의 화장품 시장이 점차 확대되어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3. 현대
기초화장과 메이크업(마무리화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메이크업은 목적·시간·장소에 따라 분류된다. ① 내추럴(natural) 메이크업(자연스러운 화장):데이타임 메이크업(주간)·애프터눈 메이크업(오후)·나이트타임 메이크업·포인트 메이크업(부분을 강조하는 방법) 등이 있다. ② 엑스트림(extreme) 메이크업(극단적인 화장):포토 메이크업(사진촬영용)·무비 메이크업(영화촬영용)·스테이지 메이크업(무대용)·캐릭터리스틱 메이크업(특수한 개성을 내기 위한 것)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화장은 내추럴 메이크업을 말한다. 메이크업하기 전에 피부손질도 함께 한다. 기초화장은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화장은 예전에 비해 품질면뿐만 아니라 메이크업 방법면에서의 변화도 뚜렷하다. 그것은 과거에 있어서의 화장이 단지 단순한 건강미 또는 퇴폐미(頹廢美) 등을 목표로 한 데 대하여 현대의 화장은 피부색과의 전체미에 바탕을 둔 색의 조화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있어서의 분은 흰색, 루즈는 빨강, 눈썹은 검은색이었던 것이 각각 단일색에서 벗어나 십수 색에서 수십 색이라는 다채로운 상품구성이 되었다. 특히 아이섀도 등은 눈꺼풀에 음영(陰影)을 만들기 위한 화장이었던 것이 기성관념을 벗어나 옷의 빛깔과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도 다채롭게 빛깔을 선택하게 되어 아이 컬러라고 불리게 되었다.
머리염색도 예전에는 흰머리를 염색하기 위해 검정 또는 흑갈색이었던 것이 십수 색이 되고, 그 중에는 청색·자색·적색·백색·은색·금색 등도 쓰일 정도로 다채롭게 되었으므로 헤어 컬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메이크업은 패션의 일부가 되고 분위기에 따라 색조를 변화하게 되었다. 이들 화장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피부는 맨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파운데이션이나 분류도 모두 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의 화장은 화장품의 발달과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의하여 예전과 같은 화장술의 격차가 없어지고, 화장으로 짐작할 수 있었던 직업이나 지역차, 계층이나 연령 등을 알 수 있는 의미의 표현이 없어지고 개성표현의 요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지성·교양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