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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족적 기원을 탐사하는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재야사학자로 활동하는 김운회 교수는 우리 한민족의 상고사 고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알타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시간을 건너뛰는 두 개 단어를 살펴보자.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과 카자흐의 수도 ‘아스타나’라는 이름이다. 아사·아스는 ‘불 붙는, 타오르는’이란 뜻의 원시 알타이어 아스(as)에서, 달·타나는 ‘얕은 언덕이나 넓은 초원’이란 뜻의 원시 알타이어 ‘탈라(tala)’에서 왔다. 달은 양달·응달이란 우리말에 살아 있다. ‘황홀한 평원’ ‘고요히 밝아오는 초원’이란 뜻도 되는 아스탈라(As-tala)가 아스달과 아스타나에 살아 있는 것이다. 뿌리에 대한 중요한 시사(단초)가 아닌가.” (일본어 あさ(아사, 朝)에도 이런 원시어가 남아 있다.)
“(기록으로는)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양서, 삼국사기가 있다. 삼국지에는 ‘진한(辰韓·한반도 남부 삼한의 하나)’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길 자기 선조는 진(秦·진시황의 진)나라 부역을 피해 왔는데 마한이 동쪽 국경 땅을 떼 주었다’고 돼 있다. 양서에도 ‘신라의 선조는 진(秦)사람’이라고 썼다. 삼국사기에는 ‘진나라에서 난리가 나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마한 동쪽에 있는 진한과 잡거했다’고 했다. 알타이인 지금의 카자흐와 과거 진나라의 서부 지역에 걸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진나라를 피해 이동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서기 32년)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서기 940년)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嵒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라는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始祖 赫居世居西干)조에서는,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다.(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라고 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9년(서기 32년)조에는,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로 하였다.(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는 기사가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사』 권57 지리2에는,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년)에 경주의 6부명을 고쳤는데, 양부를 중흥부라 하였다.(二十三年 … 改其州六部名 梁部爲中興部)”라는 내용이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의 통치 범위는 현대 카자흐까지 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이 그처럼 중국 서북방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족 사가들은 진나라를 오랑캐 즉, 흉노(匈奴) 혹은 서융(西戎)으로 기록할 정도다. 이후 한무제의 북방 공격도 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민족 기원과 계통을 알 수 있는 두개골 조사가 있다. 2001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의 고기석 교수는 ‘한국과 가장 닮은 이들은 카자흐 민족’이란 연구 결과를 내놨다. 머리뼈의 봉합선, 두개골 하부의 구멍 등 60여 개 항목을 조사했는데 ‘한국·카자흐 민족의 두개골 구조가 가장 닮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현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까운 유형은 중동부 지역의 오르타족 카자흐인이다. 그곳이 알타이다. 어떤 카자흐 부족은 스스로를 케레이라 부른다.”
“편두도 있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 두개골과 신라 금령총에서 발견된 두개골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편두란 이마가 인위적으로 눌리고 머리 주위로 고랑 같은 주름이 둘러 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두개골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진한 사람은 머리를 납작하게 눌러 편두를 한다’고 썼다. 학계에 따르면 편두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 ‘흉노의 자취’처럼 나타난다. 흉노는 중국이 북방 유목민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고 했다. 왜 흉노와 만주족의 편두가 신라에도 나타나는가. 신라가 흉노이기 때문이다.”
“신라 문무왕의 능비에 ‘내 선조는 김일제’라고 써 있다. 김일제는 누구인가. 중국 한무제는 흉노를 공략하면서 흉노의 한 나라인 휴도국 왕을 죽이고 아들을 잡아온다. 이 아들을 무제가 총애해서 김씨 성과 일제라는 이름을 준다. 한서(漢書)의 기록이다. 그런데 한은 왕망의 신(新)나라에 망하는데 15년 뒤(에는) 신(나라)은 망하고 왕망은 역적이 된다. 이 왕망이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의 이모부다. 왕망의 외가였던 김일제 후손은 달아나야 했다. 그 일부가 한반도 남부로 피신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휴도국 옛 땅의 비석으로도 확인된다.”
“한반도엔 동남 아시아와 중국 해안 지역을 거쳐 온 사람(남방계)이 벼농사와 함께 먼저 정착했다. 북방계인 알타이로부터의 이동은 그 뒤다. 제1 경로인 ‘알타이-초원길-몽골―북만주―한반도’와 제2 경로인 ‘알타이-중국 북부-산둥―요동―한반도’ 두 길로 왔다고 추정된다. 북방과 남방계 비율이 7대 3이다.”
“기록은 까오리(gaoli)라는 단어와 관계 있다. 북방 출신 한민족의 고대 명칭으로 ‘쥬신·까오리’가 있다. 까오리가 더 일관성이 있고 변화 과정이 정확하다. ‘골짜기·마을을 뜻하는 골’에서 나온 까오리는 코리, 꼬레, 카레이로 변하며 코리어로 굳어갔다. 까오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은 삼국지 위략이다. ‘부여는 북방의 고리(高離·몽고 발음 까오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이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백제가 나왔다’고 한 북사까지 종합하면 고리는 ‘한반도의 뿌리 국가’가 된다. 고리는 탁리, 삭리, 콜리, 고려, 구려 등으로 변형되지만 모든 발음은 까오리로 수렴된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고려를 까우리(Cauli)로 썼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은 까오리국 금와왕(金蛙王)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라고 돼 있다. 몽골의 대표적 사학자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금와왕의 까오리는 고리국이며 이 부족은 8 세기 몽골의 건국신화에도 등장한다’고 했다. 또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에 따르면 금와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즉 금와왕-까오리-부여로 이어지면서 알타이는 한민족의 뿌리가 된 것이다. 중국 사가들은 알타이 거주 민족도 흉노라 불렀다. 한서는 ‘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면서 (한나라가) ‘흉노를 이기지 못했으므로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고조선도 흉노로 간주한 것이다.”
“흉노를 옛날 현지 유목민 발음대로 하면 슌누(shunnu) 즉, ‘천손족(태양의 아들)’이라는 좋은 뜻이다. 알타이 민족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불렀다. 그런데 중국 사가들이 ‘입심 좋은 노예’라는 나쁜 뜻을 담은 한자로 음차했다. 카자흐에도 흉노를 ‘훙드스’ ‘궁드스’라고 하는데 태양 또는 하늘이라는 뜻이다. 천손족에 대한 기억은 한국의 단군·동명·해모수 신화, 만주·거란족의 천녀 신화, 몽골의 알랑고아 신화, 일본의 아마테라스 신화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요컨대 흉노는 알타이 산맥 동남쪽에 살았던 유목민의 포괄적 총칭이다. 이들은 몽골·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동해가며 나라를 만들었다. 서쪽에선 유럽사를 뒤집었다. 집합체의 핵심 지배집단이 전체 부족들을 이끌었다. 흉노가 북아시아를 제패하자 모든 유목민들은 ‘우리는 흉노’라고 했으며, 선비가 장악하자 ‘우리는 모두 선비’라고 했다. 칭기즈칸 때는 ‘우리는 몽골’이라고 했다.”
“쥬신은 중국 사가들이 동이족에 대해 붙였던 명칭들의 대표 발음이다. 그들은 만리장성 동북방 민족을 조선, 숙신, 여진, 주신 등으로 불렀다. 모두 쥬신과 유사하게 발음된다. 만주실록에 쥬선구룬(Jusen Gurun)이라는 말이 있는데 ‘쥬신의 나라’라는 뜻이다. 쥬신이란 용어를 가장 오래 쓴 민족은 만주족과 한국인이다. 한반도는 조선이란 국호로, 청나라는 초기 공식명으로 ‘대쥬신제국(Yeke Jusin Ulus)’을 썼다. 한자로 대제신제국, 대조선제국, 대숙신제국이다.”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대표가 금(金)·청(淸)이다. 금은 신라인이 건국했다. 금사에 ‘우리 선조는 고려에 살던 신라인 김함보(金函普)’라고 써 있다. 금 태조는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었으며 거란을 대국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공손히 하였다’ 는 문서도 고려에 보냈다. 청은 금을 계승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황족들은 신라에서 왔으며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다’고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고향은 함경도 종성-중국 옌벤·룽징(龍井) 지역이다. 몽골의 원(元)도 있다. 칭기즈칸의 몽골 건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나오는 얘기다. 원(나라) 건국신화의 시조모 알랑고아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유화 부인과 같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말로 고주몽이란 뜻이다. 칭기즈칸이 금나라 황제 알탄 칸의 청으로 타타르를 정벌한 뒤 받은 작호가 ‘자오드 까오리’ 즉, 고려왕이다.”
“몽골 할흐골솜 설화엔 ‘고리(코리)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으로 가 고구려 칸이 됐다’는 게 몽골에선 정설로 통한다. 즉 ‘고리’라는 한 뿌리에서 한반도에는 부여·고구려가, 만주·요동에선 금·청·원이 나왔다는 얘기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의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옛날 동으로 가 부여·고구려의 뿌리가 됐다. 몽골·부리야트 모두 몽골족이다. 고조선을 계승한 거란족의 요나라도 있다. 요사(遼史)에는 ‘요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다’고 썼다.”
“성리학이 조선의 중심 사상이 된 뒤 한국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사상·역사를 지배했다. 이를 시정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한족과 한국인을 제외하면 모두 오랑캐’라는 인식은 스스로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대응 못한다. 한민족 역사에서 사라진 만주와 북방 초원지대를 돌아봐야 한다. 알타이는 그래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옛날 태양의 아들인 슌누는 유럽-중앙아시아-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였다. 중개무역을 주관했고 금속의 제조와 가공에 능했다.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의 소유자이자 무역업자였다. 세계 역사에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해본 경험이 가장 많은 DNA가 우리가 공유하는 슌누 DNA다. 우리는 잃어버린 그 역사와 DNA를 되찾아야 한다. 그 힘찬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스스로를 ‘비제도권 사학자’로 칭하는 김운회 교수의 경력은 특이합니다. 원래 전공은 역사가 아닙니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디지털 재화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관심을 가진 역사 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2004년부터 자연스럽게 표출됐습니다. ‘삼국지 해제’ ‘삼국지 바로 읽기’를 썼고 2006년엔 『대쥬신을 찾아서』를 출판했습니다. 한민족의 슌누 DNA를 주장하는 이책은 5만 권이나 팔리면서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자극했습니다. 또한 민족 기원에 관한 그의 탐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상고사의 논란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은 영어로 만들어낸 "pseudohistory"를 어디서 찾아내 무리하게 연결하여 재야사학을 굳이 의사역사학(擬似歷史學), 유사역사학(類似歷史學), 사이비역사학(似而非歷史學)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통(正統)과 비정통(非正統)의 논란이 되겠지요.
즉, 누구를 통하여 배워 이어온 것이 바른 계통이고, 바르지 않은 계통인가의 논란이라는 것입니다. 매국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이들은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 ‘가짜’의 유혹이 계속되고 있다고 오히려 주장하는데 재야사학을 유사역사학으로 매도하는 사람들 중에 어김없이 '식민사학자 이병도'나 '조선사편수회' 계통 등을 잇고 있는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은 과연 바른 계통일까요? 일제시대의 조선사편수회가 연구해 만들어낸 역사를 진짜 역사로 여기면서 신봉하는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이야말로 ‘가짜 한국인’은 아닐까요?
원래 전공이 사학이었지만 게임스토리 작가로 활동하던 자가 책을 펴냈습니다.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 책입니다. 그는 책에서 유사역사학이 무엇인지, 그 연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환단고기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이며 왜 유사역사가들이 그렇게 떠받들고 있는지, 엉터리 사료비판으로 왜곡하는 한국 고대사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담아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이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 자체를 오도하면서 역사 연구의 목적이 자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라 현혹하고, 현재 시점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는 은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도한다. 또한 한민족이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생각을 퍼뜨려 다른 나라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게 만든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던 이들이 나치와 일본제국주의였다. 그들이 행한 일들을 우리가 또 답습해야 하는가?" (잊혀진 상고사를 찾는 일이 '일제'나 '나치'와 같다는 주장입니다.)
"인터넷의 발달은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급속도로 증가시켰다. 고급 정보도 많지만 무분별하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 또한 많다. 가짜 뉴스의 범람은 이미 세계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학문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제법 그럴싸한 논리이고, 게다가 이것저것 근거라면서 갖다 붙이고 억지스럽게 밀어붙이면 쉽게 믿어버릴 수밖에 없다. 특히 고대사의 영역은 더욱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홍산문화로 대표되는 요하문명은 남의 나라 얘기인 것입니다.)
“뒷받침하는 증거나 개연성이 없는데도 주로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목적으로 제시되는 주장”
저자는 먼저 의사역사학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인 'pseudohistory'에서 'pseudo'를 의도적으로 굳이 '유사'라 번역하여 유사(類似), 즉 ‘서로 비슷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 영어의 본래적 뜻인 ‘가짜의’, ‘거짓의’, ‘사이비’ 뜻으로 정의하는 것이 맞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이 ‘진짜 역사’이고 어떤 것들이 ‘가짜 역사’라는 말인가요? 일제시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들어낸 상고사가 ‘진짜 역사’라는 말인가요?
서구에서 대표적 유사역사로 꼽히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은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지 않았다는 '가짜 역사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누가 믿겠냐고 하겠지만, 지금도 나치의 부활을 꿈꾸는 이들 속에서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있다고 황당하게도 비유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환단고기를 필두로 상고시대에 위대한 한민족이 아시아를 지배했다는 유사역사가 대중을 매혹시킨다고 매도합니다. 오늘날 한민족은 한반도의 작은 땅덩이에 살고 있지만, 먼 상고시대, 고대에 전 아시아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말에 그 기록의 진위 여부는 따져보지도 않고 놀라워하면서 아무런 비판의식도 가지지 못한 채 빠져든다는 논리입니다.
"누가 싫어하겠는가? 우리가 4대 문명보다 더 위대하고 더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으며 아시아를 호령하며 광대한 제국을 이룩했다는데!"
그는 출판사를 앞세워 이렇게 왜곡하면서 국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유사역사의 역설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며, 부지불식간에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해 배타적으로 바라보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애국심에 기댄 민족주의, 역사적 사실과 다른 주장을 내세워 민족주의와 결합하는 극단적 국수주의, 나와 다른 남을 배척하고 자민족 우선주의를 강조하며 독재와 전체주의까지 용인하는 파시즘의 씨앗을 유사역사에서 발견한다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은 환단고기를 오래된 우리 민족의 바램으로 만들어진 한국사라고 하면서 민족주의의 탈을 쓰고 유사역사를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나라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오니즘(Zionism, 시온주의)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의하면 애굽 즉, 이집트에 살고 있던 히브리 소년 모세는 이집트 왕가에서 이집트인으로 성장했으나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고 히브리인들이 겪던 학대를 깨닫게 되자, 서기전 1250년 모세는 자신의 민족을 구속에서 해방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으로 히브리인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상고사 사건으로 발전하여 이스라엘 여러 부족이 형성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서기전 1020년경,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로부터 사무엘 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판관기(判官記, 옛 성서명 사사기(士師記), The Book of Judges)의 내용처럼 예언자 사무엘의 지도하에 이스라엘 여러 부족이 베냐민족 출신의 사울을 왕으로 뽑고, 가까운 지역 여러 민족의 왕정을 모방해서 세운 왕국이 이스라엘왕국입니다.
사울은 치세 초기에 왕국 방위에 성공하였지만 그때까지의 형성되어온 느슨한 부족연합으로는 해안지대에서 내륙을 향해서 세력을 확대해 오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항할 수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결국은 종교적 지도자 사무엘과 충돌해서 우수한 무장 다윗을 추방해서 스스로를 약화시켰고 사울이 팔레스타인인과 싸우면서 전사하자, 이스라엘 여러 부족의 장로는 사울의 아들 아스보셋을 이스라엘왕으로 옹립해서 대항했습니다.
얼마되지 않아 이스라엘 여러 부족의 장로는 다윗과 계약을 맺고, 그에게 이스라엘의 왕위를 제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왕 다윗이 이스라엘왕을 겸임한 결과, 유대ㆍ이스라엘 복합 형태의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복합왕국을 대표하는 명칭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울과 다윗, 솔로몬이 지배한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 이스라엘 왕국', 솔로몬의 사후 다윗가의 지배를 벗어나서 남쪽의 유대 왕국과 대립한 이스라엘 왕국을 '북이스라엘 왕국'이라고 불러서 양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에는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느헤미야,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등의 기록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기전 926년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져 내리고,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유다와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분열되고 나서 북이스라엘 왕국은 205년만에 멸망을 당하였고 남유대 왕국은 340년만에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곧, 시오니즘은 서기전 721년 앗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한 북이스라엘 왕국과 서기전 586년 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당한 남유다 왕국으로 고대 유대인들이 잃었던 땅을 고구려의 국시 ‘다물(多勿)’ 정신처럼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온주의는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곧,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습니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습니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습니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습니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습니다. 그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습니다.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은 이상스럽게도 한결같이 잊혀진 상고사를 찾는 일이 파시즘, 나치즘, 일본 제국주의라고 매도합니다. 시온주의는 침략이 아닌 고토회복에 목적을 두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상고사를 찾는 일이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적 발상입니까? 오히려 잊혀진 역사회복에 뜻을 두고 있으니 무려 2천 여년 전에 잃었던 고토회복에 두고 끝내 목적을 이룩한 시온주의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대한민국의 유사역사학은 일제강점기에 고조선과 만주에 주목하여 만주와 조선은 하나라는 만선사관이나 일본 민족과 한민족은 같은 조상 아래 나왔다는 일선동조론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파시즘이나 일본 제국주의에 연결지어 자의적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파시즘(fascism)은 1919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 권위주의적, 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파시즘’은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의 의미는 '묶음’이었으나, '결속’ 또는 ‘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 되었다가 20세기로의 전환 이후, 특히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각지에 등장한 일종의 정치이데올로기와 운동입니다. 즉, 1919년 3월 23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새로운 파시스트당을 결성하면서 국가의 절대 권력과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당의 상징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국수주의가 재야사학으로 연결해 재야사학이 곧,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매국식민사학 추종자 중에는 한술 더 떠서 재야사학을 흑룡회(黑龍會)로도 몰아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룡회라는 것은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국가주의 우익 조직으로, 1901년에 결성되었습니다. 1901년 2월 23일, 한반도를 주 무대로 하는 천우협(天佑俠)의 일원인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 등이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 일대의 낭인들을 모아 '흑룡회'라는 우익단체를 결성하였던 것입니다. 근대일본의 아시아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국가주의와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일본의 극우 단체입니다. 제국 일본이 아시아민족 중흥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천황주의를 표방하고 국수주의적 국민교육을 이루는데 그 목적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은 상고사 등을 찾고 있는 재야사학을 황당하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로 몰아대면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친일과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해방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놓여 있었다고 하면서 해방 이후 1960~1970년대에 이르면 유사역사학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제2부에서는 유사역사학의 토대를 다지고 발전시킨, 유사역사학의 대표적 선구자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최동은 세브란스 병원 의사이면서 조선 민족과 야마토 민족이 동종동근이라고 주장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또한 식민사학자로 불리던 문정창을 앞세워 일제강점기 군수 출신으로 중국, 수메르, 이집트 문명이 모두 한민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 것을 적었습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을 하였던 일민 안호상을 일민주의 주장이라고 폄훼하면서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족 주체성 확립을 목표로 국정교과서 추진하였다고 열거합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은 이유립에게는 환단고기를 몰래 숨겨왔다가 세상에 알렸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조작해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 단단학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했으며, 이를 통해 환단고기를 정교하게 위조하여 소개했다고 매도합니다. 그리고 임승국을 가르켜 환단고기의 번역자로 민족주의와 반공을 동일한 개념으로 보면서 역사를 국가체제철학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혹평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보여준 행동들을 열거하였는데 특히 문정창은 1932년 ‘조선 쇼와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고, 1942년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 1942년 황해도 은율군수, 1945년 이사관 승진,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을 지냈던, 그야말로 일제의 정책 등을 수행했던 고위 공직자 문정창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임을 강조합니다.
해방 후 그는 군국일본 조선점령(강점) 36년사를 펴내면서 스스로 농촌 발전을 위해 민족주의 활동을 했던 것처럼 기술했다고 하면서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가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후에는 일본의 망언에 대항하고자,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책을 썼다고 주장했다고 적어 놓았고 문정창이 1976년 10월 8일 이유립(李裕岦), 안호상(安浩相), 유봉영(劉鳳榮)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해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찾아내어 어이없게도 유사역사학의 중심인 것처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곧, 문정창은 조선총독부가 꾸며낸 조선상세사(朝鮮上世史)를 한국 역사학계가 답습한다며 식민사학자라고 매도했다면서 조선 민족의 고향이 중앙아시아라고 주장한 최동의 주장에 깊이 감명한 문정창은 이스라엘과 한민족이 깊은 연관성이 있다면서, 그 근거로 성서에 ‘Chosen people’이라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고 주장합니다. choose의 과거분사 ‘chosen’을 우리식 발음대로 읽어 ‘조선 사람’이라 제멋대로 해석해버린 것이라는 얘기이고 발음의 유사성을 가지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수법은 오늘날 유사역사가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안호상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가의 권의와 의사에 절대적 우위를 두고 국민은 그에 기반한 공통된 국가의식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주장합니다. 영광스러운 한국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날조도 서슴지 않았다고 매도합니다. 대한민국의 상고사를 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 정말일까? 거짓과 허상과 환상으로 오도하는 유사역사의 함정"이라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의적인 외침을 출판사 서평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환단고기란 대체 어떤 책일까? 유사역사학 쪽에서는 한국 상고사가 기록된 아주 위대한 기록이라고 떠받들리는 책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는 단군조선 때 만주와 시베리아, 중국 하북성 일대와 산둥반도까지 차지한 대제국의 영토였다. 이런 말이 ‘고서’에 적혀 있다고 하니 실로 믿을 만하지 않은가? 왠지 모를 뿌듯함, 자존감, 애국심이 솟아난다. 환단고기가 만들어낸 달콤한 환상이고, 유사역사학에서 퍼뜨리는 허구이다. 저자는 환단고기의 출현에 얽힌 수수께끼뿐 아니라 이유립이 발행했던 단단학회의 기관지 커발한을 통해 환단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했다. 환단고기에 담겨 있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내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환단고기를 일그러진 고대사로 매도하고 있는 그의 네거티브가 오히려 가련합니다.)
"그 밖에 한국 고대사에서 엉터리 이야기로 사람들을 잘못 이끄는 23가지를 뽑아, 그것의 맹점과 허구를 파헤쳤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환국’이라는 유사역사학 쪽의 주장을 그동안 역사학계가 축척한 연구 성과를 소개하며 ‘환국’이 얼토당토하지 않음을 논박했다. 단종실록, 제왕운기, 삼국유사(석남본, 파른본) 등을 통해 환국의 ‘국’ 자가 원래 ‘인’ 자임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렇게 매국식민사학 추종자의 주장은 닫혀진 편협된 시각인 것입니다.)
"이병도가 내놓은 학설이라면서 중국 진나라가 쌓은 만리장성이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한다는 주장(지금도 인터넷상에서 이와 관련된 지도를 쉽게 볼 수 있다)도 터무니없음을 논증했다.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엉터리 이야기가 어떻게 신화로 둔갑하고 역사화되는지, 또 그것을 오늘날 역사적 사실로 기려지는 현상까지 거침없이 비판했다." (조상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처럼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저자는 유사역사학에서 퍼뜨리는 위대한 조상, 광대한 영토에 사로잡혀 자랑스러운 고대사에 현혹되지 말 것을 몇 번씩 거듭하여 강조한다. 역사를 통해 시민에게 국수주의를 주입하고 환상의 역사를 믿게 하는 행동은 유사역사가들도 주장했듯이 독일과 일본이 저질렀던 일이며, 그 결과는 참혹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출판사의 서평을 가장하여 이렇게 제멋대로 결론을 짓고 마지막에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 조상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걸 알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풍부해질 수 있도록 인간과 삶에 대해 배우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다." (잊혀진 상고사를 찾아 민족의 뿌리를 밝혀내는 것을 끝내 자의적으로 흑룡회를 들먹이며 일제의 침략주의나 나치식 '국수 우월주의'라 폄훼하고 매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같이 상고사를 비롯하여 한국사 연구에서 이병도가 차지하는 몫은 간단치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병도는 1925년 3·1운동 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편수회는 일본, 조선 만주 등에 흩어져 있는 조선사 관련 사료를 광범위하게 모았고 자료 수집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를 조선인의 의타성, 사대성을 부각시켜 당시에 조선의 식민지화가 불가피했다는 것을 내세우고 그것을 체계적, 학술적으로 정립하는 것으로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참여를 친일행적이라고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료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를 따르지 못합니다. 일본인들이 감추고자 했던 자료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경성제국대학에서 출발한 서울대 국사학과는 그의 아성이었습니다. 곧, 일본제국 통치시대의 조선사편수회가 경성제대였고 경성제대에서 나온 연구가 조선사편수회의 자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면면히 이어지는 계통이었기에 패망의 일제가 항복해 광복이 되었고 조선사편수회의 해체 후에도 그를 벗어나는 연구는 학문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례로 이병도로부터 군계일학이라는 찬사를 받은 천관우의 졸업논문인 ‘반계 유형원 연구’는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 성과가 되었습니다. 천관우와 더불어 쌍벽인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이병도의 '국사대관'에 이은 한국사 통사의 결정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사학계가 자랑스러운 치적처럼 말하듯이 '조선사편수회'나 '이병도'를 어쩔 수 없이 추종하면서 오염된 씨앗같이 매국식민사학의 추종자들은 바로 이들의 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장하는 것들마다 그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한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매국적 역사관은 과연 정통이 될 수 있을까요? 이제는 그러한 물줄기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재학사학의 출발은 바로 여기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이지만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처럼 이상한 방향으로 매도하거나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 이렇게 곳곳에 은밀하게 활약하는 매국식민사학 추종자들은 책까지 내놓으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난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상고사의 원형을 찾아 증거를 제시하여 신문 보도, 책자 발간, 고서를 참고하여 탐구하고 논문이나 문서를 발표, 편찬하여 주장을 하여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신라이거나 신화속의 일웅일호(一熊一虎)의 웅녀가 환웅과 결혼하여 낳은 단군 왕검이 조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21세기에 들어 탐구했던 자료를 토대로 최근에야 간접표현을 직접표현으로 바꾸면서 고대국가의 단군조선(Dangun Josun, 檀君朝鮮)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적나라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다음은 그래도 과거보다 진보된 서술로 설명된 내용입니다.
단군조선은 이칭 또는 별칭으로 왕검조선(王儉朝鮮), 전조선(前朝鮮)으로 부릅니다. 시대는 고대로 분류, 초기국가로써 고조선으로도 호칭합니다. 분류하는 성격으로 국가 중에 초기국가로 분류합니다. 곧, 단군조선에 관한 연구 동향으로 정의하길 단군이 개국한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로 되어 있습니다. 개설하는 도해로 역사적 실체로서 등장한 고조선은 단군조선(檀君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대별된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사에서 최초로 역사에 나오는 국가이며, 개국시조는 단군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들어낸 식민사학 상고사에서 수정되거나 탐구해 나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명칭 유래로 『삼국유사(三國遺事)』고조선조(古朝鮮條)에 인용된 중국의『위서(魏書)』에 의하면,『위서』가 찬술되던 당시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시기는 요(堯)임금 때와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위서』는 서기 250년 전후 인물인 왕침(王沈)이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입니다. 또한,『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환웅(桓雄)과 웅녀(熊女) 사이에 태어난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이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에 의한 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에 의한 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고 위만조선을 후속시켜 고조선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이라는 이름 아래 단군조선·기자조선을 포괄하고 있어 앞의 것과 차이를 보입니다.
대한민국 사학계의 단군조선에 관한 연구 동향을 참고될 듯하여 내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더구나 중도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학술 단체가 서술한 내용입니다.
"단군조선의 실상에 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으나, 그 역사적 성격을 고고학적 시기 구분과 연결시키면 우리 나라의 신석기문화 및 일부 청동기문화와 관련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성격은 국가 형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회이며, 우리 민족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의의가 크다.
고조선을 종래 단군 1,000년, 기자 1,000년의 역사로 언급해 왔듯이, 고조선을 곧 단군조선만으로 보는 견해는 무리이며, 찬성이든 반대이든 간에 기자를 역사의 공백으로 남기는 것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흔히 고조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단군신화를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설명하지만, 단군조선이나 왕검조선의 건국신화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의 무진년(戊辰年)을 따라 서기전 2333년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연대가 한 치도 틀림없는 연대라고 확신할 수 없으나 그 비슷한 언저리는 항상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삼국유사』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라는 표현도 단군조선의 시작이 오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나라를 열고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開國號朝鮮)”는 것은 새로운 지도자 단군이 한 집단, 한 사회를 열었다는 의미이고 규모를 더 확대해서 나라를 열었다고 해도 인구수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되어온 이른바 기자조선의 출현(서기전 12세기)은 우리 역사에서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거의 일치하며, 이는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의 변화가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아닌 대규모의 문화·종족적 변화를 반영한 것임을 보여준다.
단군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사 인식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강역 문제이다. 여기에는 대동강중심설(大同江中心說)·요동중심설(遼東中心說)·이동설(移動說)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이동설은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이동되었다는 주장으로 근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각각의 관점과 고조선을 인식하는 기본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난 것인데, 단군조선보다는 이를 계승한 이른바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의 지리 고증 등의 측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들 견해는 관련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의 재검토가 필요한 바, 일반적으로 정치적 변화 추세에 따른 강역의 변화를 상정하게 된다."
* 위의 기록은 분명히 이전의 신시배달국이나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이라는 삼조선의 형태로 존재했던 대조선을 무시한 내용입니다. 초기 조선은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입니다. 대(大)단군이 중앙의 진한(眞韓, 지금의 만주)을 다스리면서 두 명의 부(副)단군을 통솔했습니다. 부단군들은 번한(番韓, 지금의 중국 요령성 서부와 하북성 북부를 비롯한 산동성에서 양자강 유역)과 마한(馬韓, 지금의 한반도)을 각기 맡아 다스렸습니다. 이것이 대륙을 경영하였던 시대의 북삼한(北三韓)입니다. 나중에 제후국 70여 나라를 통치할 때가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과는 전혀 관계없이 삼조선(眞朝鮮, 番朝鮮, 莫朝鮮)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 제도권의 사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문사학자라 할 것같으면 비전문, 비전공의 학자나 교수들이 나서기전에 주변나라의 역사들을 살펴보고 우리와 관련된 상고사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 찾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더구나 왜 금나라, 청나라의 사가(史家)들은 자국의 뿌리 등을 신라에서 찾았는지 그 사실이 정말이라면 제대로 연구하여 관심있는 국민은 물론이고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단사학'은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들어낸 식민사학 상고사를 실증사학으로 포장하여 일제의 하수인 역할에만 충실했던 일제 사학자 이병도 계열의 상고사에만 침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강단사학' 그들에게 자극을 주고자 이곳에 상고사에 대한 얘기를 옮겨와 전하는 것입니다. 이 글도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직도 존재하는 '식민사학'이라는 병균의 오염은 반드시 치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광복을 한지 70년이 넘었건만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상고사, 잃어버린 상고사의 독립은 언제나 될까요?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한말씀 드립니다.
한사람이 쓴 작품이 아닌데 진서가 어디 있고 위서가 어디 있습니까? 위서니 진서니 하는 말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역사에 관련 된 책들을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위작, 위품, 진품으로 구별하는 것은 소설, 그림 같이 작가가 분명한 것은 그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시각에 따라 씌여진 글들을 위서라는 해괴한 말로 구분하려고 하니 논란이 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신라, 고려 시기에 그 옛날부터 전해지던 역사에 대한 기록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이유립이나 계연수는 후대에 역사서를 모아 편찬한 사람들입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견해가 나올 수는 있지만 위서로 매도 해서는 안됩니다. 성서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기록물이었듯 오직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기록물로 보면 됩니다. 특히 구약성서는 상고사 이전부터 전해지던 역사 얘기들을 어느 시점에서 파피루스라는 종이 대용품에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단고기도 상고사 이전의 전해지던 역사 얘기를 신라와 고려시대에 기록하여 남겨졌고 근세에 와서 우연히 발견되어 이 시대에 맞게 편찬한 기록물중에 하나입니다.
참고 문서 :
중국 홍산문화의 진실 : ( https://cafe.naver.com/novel2011/7065 )
부여의자 김춘추 그리고 연개소문 : ( http://cafe.naver.com/novel2011/7177 )
성한왕을 신라 김씨 시조로 추정하는 이유 : ( https://cafe.naver.com/novel2011/7225 )
출처:cafe.naver.com/novel2011/9035
윷놀이에서 발견되는 우리의 상고사 원형문화 : ( https://cafe.naver.com/novel2011/79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