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과 竹馬故友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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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함께 놀면서 자란 벗, 80여년을 함께 한 불알親舊인 竹馬故友가 幽明을 달리했다. 1950년부터 7년여 중학교 가기전 까지 붙어서 고향에서 뛰놀던 친구다. 새해 벽두부터 날아든 슬픈 소식에 내 가슴이 메어질 듯 아프다. 가난했던 농촌마을에서 함께 성장하며 즐겁게 놀던 추억을 回想해 본다.
우리가 뛰놀던 고향,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쌍용리는 산과 산 가운대 드넓은 벌판이 있고 그 옆으로 푸른 강이 흐른다. 우리집 高村洞 뒷산에 올라보면 용이 살아 꿈틀대며 움직이는 듯한 형상의 地勢의 마을이다. 토양이 기름지고 비옥한 드넓은 들판은 몇몇의 富農만 소유했고 대부분 가난했다.
용정 고촌 월촌 삽둔 무동 산막골 용동 일골등 이름만 들어도 情感있고 愛戀이 넘치는 동네 이름들이다. 그 동네에서 적게는 한 두명 많게는 대여섯 명씩 60여명이 화사한 벚꽃에 둘러 쌓인 교정에서, 학교 파한 후는 꽃피고 새가 울던 아름다운 山川을 누비며 뛰놀던 6년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내가 事物을 보는 눈과 자연을 좋와하는 정서가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사람들은 여러 경로로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혈연 지연 학연을 통해 나와의 관계가 연결되어 살아오는 삶이다. 이런 관계의 축소판이 초등학교 동창들과의 인연이라 생각된다. 한 집안에서(血緣) 한 동네에서(地緣) 한 학교에서(學緣) 모여 합처진 인연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에 같이 놀면서 가까이 지낸 고향친구를 소개할 때 불알親舊라고 하면 그만큼 친하다는 표현이다
소수의 富農이 넓은 농토를 대부분 소유했고 나머지는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 끼니를 걱정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풍광 수려하고 아름다웠던 故鄕山川을 누비며 유년시절을즐겁고 행복하게 보냈다. 竹馬故友란 어릴 때부터 함께 놀면서 자란 벗이니 중고등학교나 대학 사회에서 만난 친구보다 서로가 더 애뜻한 마음을 간직하게 된다.
국어 샘본 사회 3권과 몽당 연필 하나, 책보에 싸서 어께에 둘러메고 학교 다니고 옥수수와 감자가 유일한 간식이였고 보리, 콩서리로 새까만 얼굴을 서로 처다 보고 웃으며 불어서 먹고, 원조 물자인 우유를 쩌서 딱딱해지면 과자삼아 먹다 이빨도 다치고 눈깔 사탕은 귀해도 산에만 가면 머루 딸기 다래가 지천으로 있었다.
하교 후에 강변에서 감자를 굽고 참외를 강물에 띄어 놓고 헤엄치며 놀다가 배고프면 먹었다 강에는 장어 메기 붕어 꺽지등 물고기가 많았다. 추운 겨울에는 얼은 강물 속에 붕어가 보이면 얼음을 깨서 차가운 줄 모르고 손으로 잡기도 했다. 그렇게 놀던 친구들이니 애뜻한 정감은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
자급자족에 만족하며 소유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웃집 것을 따서 먹고 친구들도 우리집 참외 수박 따먹던 시절이였다. 53년도 태백선이 쌍용까지 개통되자 제천에서 장사꾼이 저울을 가지고 동네 사랑방에 자리 잡고 농산물을 수집하면서 인심이 예전 같지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친구들은 중학교 진학은 거의 못했다. 대부분 가사를 돕거나 심지어 여학생 부모들은 입 하나 덜려고 서울에 식모로 보내기도 했다. 어떤 친구는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가 중이 되기도 했다. 한 친구는 머슴으로 가면서 “재극아(나의 兒名) 넌 대학까지 가서 꼭 성공한 친구가 되야한다“며 헤어질 때 친구를 처다보며 눈물만 글썽였다.
그렇게 보내던 유년시절은 중학교 진학할 때는 흘쩍 커 힘든 일도 무리없이 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家事일로는 가난을 탈출할 수 없었다. 가사를 10여년 돕다가 군 복무마치고 집에 왔으나 가난은 여전하고 장래 희망이 없자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가서 고생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고향에 남은 몇몇 친구는 시멘트 공장에 다니며 받은 월급을 착실히 모아 인근에農地를 사서 차근차근 기반을 닦았다.
억척스레 살면서 자식들 교육이 끝나고 생활기반이 잡혀 여유가 생기자 서울과 경기 일원의친구들이 모여 동창회를 결성했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는 한사코 만나기를 피해 난감했다. 연락이 두절되거나 고향에 사는 친구 재외하고 40 대 중반에 10여명이 30여년 만에 만나 동창회를 결성하고 부부동반으로 일년에 한 번 전국 유명 관광지를 다니며 우정을 나누었다
년초에 幽明을 달리한 친구가 청주에서 돈을 벌어 고향과 같은 동내가 있다며 6년전 5월 괴산으로 초대했다. 넓은 들판을 없지만 프른 괴江이 흐르고 산세 좋고 벛꽃이 만발하고 풍광이 옛날 고향과 비슷하다. 고향 쌍용의 강을 연상하며 강변에 쏘가리탕과 민물고기 회를 먹으며 고향의 어릴적 追憶談을 풀어놓는다.
술이 몇순배 돌아가고 취기가 오르니 부끄러움이나 점잖음은 없다. 열일곱 살에 동내 형과 바람이 난 미자는 내 나이에 남자 맛 본 친 구 있으면 나와 보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다른 친구가 제는 어릴 때부터 꼬리치는 백여시란 별명이 있었다고 하니 모두들 박장대소하였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어머니가 개가하니 의붓 아버지와 어머니께 반항하고 끝내 가출해서 타향에서 존나게 고생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래도 반갑게 맞히한 부모께 효도한 친구도 있다.
소장수 따라다니며 장사술을 익힌 승동이는 후에 소장수가 되어 돈을 왕창 벌었는대 놀음으로 다 털어먹고 빛 독촉에 자살했는대 그가 돈 많이 가지고 있을 때 찌질이 남편 버리고 승동이 꼬드겨 도망갔으면 내 팔자가 어떻게 됐을까? 야 너희들 알다시피 나는 독한 년이 잔아, 음식솜씨 하나는 끝내주니 식당을 차려 돈 벌었으면 강남에 그렇싸한 빌딩을 가지고 있었을껄 하는 말이 허풍으로 들리지만 그렇게 얌전하던 애가 저렇게 변하다니 인생은 모를 일이다.
그 말을 듣고 초지가 말하길 내가 예쁘다고 소문났잔아. 그 덕에 방구께나 뀐다는 양반 집안에 시집을 갔더니 가방끈 짧다고 무시하고 가풍을 따지고 시부모 모시기를 하늘같이 해야했고 시누이들 등살에 힘들고 세상만사 귀찮아 양잿물을 마셨는대 그때 죽었으면 얼마나 억울 했겠냐며 이렇게 살아 너희들 만나니 좋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시집살이가 삶의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할 때 숙연한 분위기였다.
술에 취한 친구가 명희야 ‘너 학교다닐 때 휘부 좋와했지“라고 물으니 명희는 ”그렇다“고 하니 동화에 나오는 산골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야기 같다. 지금도 명희는 곱고 예쁘게 늙었다.나는 개면적은 표정으로 명희 남편을 보고 내가 옛날에 명희 애인이었다고 하니 이 양반 말하기를 아내가 유독 신지점장 얘기를 많이하여 수상하게 생각 했다며 한바탕 웃었다.
우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흔히 향수라고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개으른 울음을 우는 곳... 노랫말 처럼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뛰놀던 동무들이 지금 여기에 모여 봄의 정취와 함께 고향의 자연과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렇게 동창을 주도한 친구가 年初 하늘나라로 갔다. 언변이 좋고 훤칠한 용모로 학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군에서 운전기술을 배워 부산의 정치 거물 P의원의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종자 돈을 마련하고 그 후 청주에서 자리잡고 기름장사로 큰 돈을 벌은 친구다. 너희들 죽을때 까 지 먹고 마시는 돈은 걱정 말라고 豪氣를 부렸다. 실제 그는 친구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썼다.
친구는 마누라의 疑夫症 때문에 맘고생 많았고 결국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60대 중반에 자식한태 사업을 물려주고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회사를 물려받은 아들은 방만한 경영으로 부도내고 감옥으로 간후 실사해 보니 엄청난 부채 때문에 경영복귀를 포기하고 자식과는 절연하고 살았다. 두 딸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비참한 말년을 보낸 섹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처럼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다. 친구는 심장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다
고향이란 나에게 어떤 곳인가? 어릴적 뛰놀던 故鄕山川과 그 속에서 놀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다 같으리라. 각자의 추억이 달콤하고 좋왔던 일, 기쁜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슬프고 서러운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가슴에 묻어 버리고 아름답고 즐거운 곳으로 만 기억 되었으면 한다. 사랑하는 친구야! 넌 먼저 떠날을 뿐이야. 우리도 곧 너의 곁으로 갈 거야. 그때 만나서 못다한 예기를 하자. <신휘부 고촌당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