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백제의 흔적을 따라 걷다
공주 고마나루 명승길
장수왕의 계략에 빠진 개로왕은 아차산성 아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웅대했던 한성백제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백제의 문주왕이 새롭게 도읍을 정한 곳이 웅진. 바로 지금의 공주다.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0여 년 동안 백제가 전성기를 누린 곳이다. 공주에는 고마나루, 송산리고분군, 공산성 등 백제의 역사를 차근차근 둘러보며 걸을 수 있는 고마나루 명승길이 있다. 백제의 역사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고마나루 명승길을 걸어보자.
웅신단 뒤편 소나무 숲에 세워진 곰상
공주 역사의 시작, 슬픈 전설을 간직한 고마나루
공주의 금강변에는 곰나루가 있다.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지금은 고마나루로 불리는데 ‘고마’는 ‘곰’의 옛말이며, 공주라는 지명의 유래도 여기서 출발한다. 곰나루에는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곰나루 건너편에 있는 연미산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곰나루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를 납치해 함께 살면서 새끼까지 낳았다. 어느 날 어부가 강을 건너 도망치자 버림받은 암곰은 슬픈 나머지 새끼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그후부터 강에는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사람이 죽는 등 불상사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암곰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낱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1975년 곰나루 부근에서 돌로 만든 곰상이 발견되었다. 곰나루의 송림 사이에 자리한 웅신단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발굴된 곰상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마치 귀를 접고 아양을 떠는 듯 귀여운 모습이다.
1975년 발굴된 돌 곰상.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고마나루 명승길의 출발점이 공주가 태동한 곰나루인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웅신단에는 곰상을 모시고 있어 예부터 내려온 전설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웅신단 뒤편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일품이다. 곰나루의 전설을 상기시키듯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는 암곰의 조형물을 숲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고마나루는 금강이 휘감아 흐르고 연미산과 함께 고운 모래사장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명승 제21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주보가 들어서 모래사장이 유실되면서 예전만 못한 것이 아쉽다. 그래도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붉은 기운을 가득 머금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제멋대로 하늘거린다.
[왼쪽/오른쪽]고마나루에 있는 웅신단 / 고마나루 소나무 숲
고마나루를 나오면 공주한옥마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이 잠들어 있는 송산리고분군을 차례로 만난다. 공주한옥마을은 소나무와 삼나무 집성재를 사용해 만든 전통 한옥으로 구들방 체험이 가능하다. 한옥마을은 다양한 숙박 공간뿐 아니라 백제 유물로 소품 만들기, 백제책 엮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체험공간과 전통한정식, 공주국밥, 밤음식 등을 맛볼 수 있는 음식점까지 갖추고 있다. 공주에서 하루를 머물며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박물관을 거쳐 정지산 유적까지 이어진 박물관길과 무령왕릉길, 고마나루길, 공산성길 등 고마나루 명승길과는 별도로 공주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이어진 둘레길도 걸어볼 만하다. 특히 국립공주박물관 뒷길을 거쳐 만나는 정지산 유적은 백제시대 국가 차원에서 거행된 제사 유적으로 추정된다. 공산성이나 송산리고분군 등 공주의 주요한 유적에 가려졌지만, 사적 제474호로 지정되어 있으니 꼭 한번 찾아볼 만하다. 정지산터널 위에 자리 잡은 정지산 유적에 오르면 공주 구시가지와 함께 백제큰다리, 금강철교와 어우러진 공산성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한옥마을
국립공주박물관과 송산리고분군, 웅진시대 백제를 만나다
국립공주박물관과 송산리고분군은 공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공주를 대표하는 무령왕의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웅진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주역이 바로 무령왕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사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우연한 발견부터 졸속 발굴까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키며 무령왕릉은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났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1971년 7월이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었던 6호분 내부로 물이 스며들자 도랑을 파다가 삽 끝에 걸린 것이 대발견의 시작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위대한 발굴이자 국내 고고학자의 최초 발굴이었지만,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무령왕과 왕비가 받은 세상의 빛은 따사로운 햇빛이 아닌 눈부신 플래시 세례였다. 밤새 유물만 수습해 결국 졸속 발굴이라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1,500년 전 백제의 혼이 담긴 수많은 유물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차분히 감상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송산리고분군으로 가는 길
공주한옥마을을 지나 바로 만날 수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은 웅진시대의 공주를 둘러보기 전에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이다. 박물관은 무령왕릉실과 충남의 고대문화실, 옥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령왕릉실에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4,600여 점의 유물 가운데 석수와 묘지석, 왕과 왕비의 금제관장식과 귀걸이, 뒤꽂이, 팔찌 등 다양한 진품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들을 그냥 훑어보지 말고 유물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도 찬찬히 들여다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말이 가슴속에 찬찬히 다가온다.
[왼쪽/오른쪽]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석수 /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
국립공주박물관 뒷길로 접어들면 송산리고분군으로 이어진다. 송산리고분군은 모두 7기의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7기의 무덤 가운데 무령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무령왕릉도 함께 만날 수 있다. 고분군 입구에서 앞쪽에 있는 2기의 고분 사이로 보이는 봉분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일제강점기 가루베 지온이라는 일본인이 무령왕릉 앞의 6호분을 발굴했다. 다행히 그는 뒤편의 봉분을 왕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오판이 무령왕릉의 도굴과 약탈을 막은 셈이니 천만다행이다. 그 덕분에 1,500년 전 백제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송산리고분군은 먼저 모형전시관부터 둘러봐야 한다. 송산리고분군의 내부를 실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령왕릉 역시 내부를 개방해오다가 고분 보호를 위해 지난 1997년에 영구 비공개 결정이 내려졌다. 모형관 내부에는 무령왕릉뿐 아니라 사신도 벽화가 발견된 6호분의 내부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모형관을 둘러봤다면 고분군도 한 바퀴 돌아보자. 완만한 오르막에 아래쪽 3기, 위쪽 4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분군 끝자락에 있는 전망대에 서면 공산성이 한눈에 바라다보이고, 봉긋봉긋 솟아 있는 고분 너머로 채죽산과 금강이 내려다보인다.
[왼쪽/오른쪽]송산리고분군 전경 / 모형관에서 만나는 무령왕릉 내부
공산성, 백제에서 조선까지 켜켜이 쌓인 역사를 만나다
송산리고분군을 나오면 황새바위성지, 제민천, 산성시장을 거쳐 공산성에 이른다. 공산성은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왕성이었고,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며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이다. 금강을 천연 해자로 삼아 백제 때는 토성으로 쌓았으며, 지금의 모습은 조선시대에 쌓은 석성이다.
공산성의 금서루가 바라다보인다.
공산성을 돌아보는 방법은 금서루를 시작해 진남루, 광복루, 만하루, 공북루를 거쳐 다시 금서루로 되돌아오는 완주 코스가 있고, 금서루를 시작해 쌍수정과 추정왕궁지, 만하루, 공북루를 거쳐 금서루로 되돌아오는 코스도 있다. 대부분 후자를 많이 이용한다. 판관, 관찰사, 목사 등 조선시대 공주를 거쳐 간 관리들의 선정비를 지나면 금세 금서루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짧은 오르막을 오르면 추정왕궁지와 쌍수정을 만날 수 있는데, 경사가 완만한 성벽길이 S자로 휘어져 제법 그림 좋은 풍경이 된다.
쌍수정은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내려와 머물렀던 곳으로, 난이 진압되자 기뻐하며 쌍수정을 호위하듯 서 있던 두 그루 큰 나무에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봄에는 벚꽃과 신록이 화사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쌍수정 앞 넓은 공간은 백제의 추정왕궁지로 건물터와 연못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추정왕궁지 주변 벚꽃을 즐기는 연인
공산성 내에는 쌍수정 앞 연못처럼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금강변과 맞닿아 있는 만하루에 있는 연지가 바로 그것. 계단식으로 독특하게 조성된 이 연지는 만하루와 제법 잘 어울린다. 광복루나 공북루로 가는 오르막 정상에서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된다. 만하루에서 공북루를 거쳐 전망대에 올라서면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공주 신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망대에서 금서루까지는 가파른 내리막 계단길이지만 공산성에서 마지막으로 펼쳐지는 전망 포인트다.
공북루 가는 길에서 본 만하루와 연지
고마나루 명승길은 고마나루에서 출발해 송산리고분군, 공산성, 연미산을 거쳐 고마나루로 되돌아오는 23km의 길이지만 전 구간을 다 걷지 않아도 좋다. 공산성 주차장 한편에 있는 자전거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공산성부터 정안천, 금강변, 공주보를 지나 고마나루로 되돌아오는 자전거 코스를 이용해 고마나루 명승길을 즐길 수도 있다. 휴대폰 인증을 통해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으며, 1회 2시간까지 탈 수 있다(공주시 자전거 콜센터 041-856-1027).
공산성 주차장에 마련된 무료 자전거대여소
글, 사진 : 문일식(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