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신작수필】 지적 호기심과 자아 성취감
▲ 대전수필문학회에서 매년 발행하는 수필전문 동인지 《수필예술》 제44호가 오늘(2023년 7월 20일) 발행됐습니다. 이 책에는 필자의 수필 2편이 수록됐습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합니다.
♧ ♧ ♧
【수필】
지적 호기심과 자아 성취감
― 손자와 즐기는 ‘한자 게임’
윤승원 수필문학인, 지환이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것은 ‘기운 기(氣)’자 맞지요? 그리고 이건 ‘뫼 산(山)’ 자이고요. 그리고 이건 ‘마음 심(心)’, ‘바다 해(海)’자 맞지요?”
거실 벽에 걸린 액자 글씨를 보고 초등학생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래, 맞다. 어이구, 우리 손자가 어떻게 저런 글자를 다 읽지?”
▲ 태권도(跆拳道)로 심신을 수련하는 것도 ‘기산심해(氣山心海)’의 바탕을 다지는 일이다. 태권도는 대한민국에서 창안되고 발전한 현대 무술로, 대한민국의 국기(國技)이다. 태권도는 단순히 체력을 연마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지·덕·체(智德體)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배우는 무술이다. 지환이 외할아버지는 생시에 태권도 사범(師範)이셨다. (사진출처 = 가족 채팅방, 지환엄마 2023.7.19.)
이제 막 한글을 깨친 초등학교 일학년생이 한문 공부에도 재미를 붙였다면서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기특하다고 칭찬한다. 그러자 손자는 벽에 걸린 또 다른 글씨를 읽었다.
“할아버지 여기 보세요, 이건 ‘마음 심(心)’에 ‘맑을 청(淸)’, 그리고 ‘일사(事)’에 으음, 그리고 이건 뭐더라, 흘려 써서 잘 모르겠어요. ‘다다를 달(達)’자 같기도 한데 할아버지 이게 무슨 자예요?”
▲ 명절날 아침, 갑자기 ‘지적 호기심’이 발동한 손자가 거실 액자 글씨를 읽어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손자의 물음에 “네가 맞았다. ‘다다를 達’ 자, 또는 ‘통달할 達’ 자로도 읽지”라고 맞장구를 쳐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할아버지는 손자가 기특하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자가 읽은 글자를 조합하면 ‘기산심해(氣山心海)’다. ‘기운은 산과 같이 높고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다’라는 의미다. 또 ‘심청사달(心淸事達)’은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라는 뜻이다.
무슨 공부든 유년시절부터 재미를 붙이면 마치 바둑이나 장기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지적 호기심은 자아 성취감으로 발전한다.
거기에 할아버지의 칭찬이 더해지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그래서 학동은 칭찬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지 않는가.
손자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닐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부모가 직장에 나가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외할머니가 돌봄 역할을 이어받았다. 외할머니가 학교 인근에 사시는 까닭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손자와 오붓하게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학교 다니랴, 학원 다니랴, 노상 바쁘게 지내는 손자를 만날 기회가 없으니, 이젠 늘 그리운 대상이 됐다.
손자를 가장 편안하게 만날 기회는 추석과 설 명절이다. 명절이 되면 차례를 서둘러 지내고 충남 청양 선산에 성묘하러 간다. 손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즐겁다.
대전에서 청양까지 승용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지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무수히 많은 질문을 한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자 게임’이다.
운전대는 아들이 잡았으니 손자와 할아버지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즐기면서 ‘한자 놀이’를 주고받는다. 이런 게임은 으레 손자가 먼저 제의해서 이루어진다.
가령 손자가 먼저 ‘배울 학(學)’이라고 하면 할아버지는 ‘익힐 습(習)’이라고 응수한다. 이미 나왔던 한자(漢字)를 다시 꺼내면 안 된다.
이 같은 ‘꼬리물기 식 한자’를 주고받으면 목적지에 금세 도착한다. 손자와 나누는 한자 수(數)가 왕복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천자(千字)에는 이르지는 못해도 얼추 몇백 자는 되지 않을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할아버지가 매번 지고 만다. 할아버지의 한자 공부가 몇 해인데 어린 손자에게 지는가.
유년시절부터 붓과 벼루를 가까이했다. 서당에 다녔던 형님들 덕분이다. 한문투성이 책이 다락방에 가득했다. 성장해서도 한자와 함께 살았다.
30년 넘는 공직 생활 동안 한자 섞인 문서 작성 경력까지 합하면 무려 60여 년 넘게 한자와 함께 살아온 할아버지다. 매일같이 읽는 조간신문도 한자가 더 많았다.
그에 비하면 손자는 어떤가. 초등학교 일학년생이다. 손자가 한자를 접한 햇수는 고작 1~2년 정도다. 아이 아빠가 도깨비 그림이 들어간 『마법 천자문』 을 사다 준 게 전부다.
▲ 지환아빠가 사다 준 천자문(千字文)
과거 할아버지 시대 서당 교과서였던 『千字文』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한자 학습서다. 이와 함께 태블릿 PC를 통한 한자학습도 아이의 호기심을 부추기는데 한몫했다.
성묫길 차 안에서 벌이는 한자 게임에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번번이 지는 이유를 분석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 두뇌 회전이 느리다. 어린 손자의 반짝반짝 빛나는 재치를 따라가지 못한다. 순발력도 당해 내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한자문화권이다. 일상의 언어가 대부분 한자로 구성돼 있다. 한때 ‘심심한 사과’로 촉발된 젊은이들의 문해력(文解力)이 웃음거리가 됐다.
‘심심(甚深)한’을 ‘심심하다’로 알거나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고지식’을 ‘높은 [高] 지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언론에서는 연일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크게 부각했고, 웃지 못할 오독(誤讀) 사례가 봇물 터지듯 흥밋거리로 보도됐다.
지난 설 명절이었다. 원로 문학평론가인 송하섭 교수(전 단국대 부총장)로부터 신년 휘호를 받았다. ‘세한송백(歲寒松柏)’이다.
▲ 원로 문인 송하섭 교수(문학평론가, 전 단국대 부총장)가 보내준 신년 휘호 ‘歲寒松柏’(위 사진). 이와 관련 필자가 공직 일화와 체험담을 기초로 재 해석한 ‘경우신문’ 칼럼(아래 사진)
뜻이 좋아 이 글귀를 소재로 칼럼을 썼다. 전 현직 경찰 가족이 애독하는 경우신문(警友新聞)에 실렸다. 뜻밖의 독자 반응에 놀랐다. ‘시대정신’에 걸맞은 의미 있는 글귀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깊은 의미가 담긴 ‘사자성어’를 좋아하는 독자가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흔들리고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시대라서 그런가.
올곧은 선비정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 신년 휘호뿐만이 아니다. 원로 문인은 내게 추석 명절 휘호도 보내주시고, 한시 서예작품도 우편으로 보내주신다.
▲ 一松 송하섭 교수(문학평론가)가 매년 새해와 중추절에 필자에게 보내주신 신년휘호와 명절 휘호 - 팔순 원로 학자는 내게 글씨를 주시면서 “글씨는 보지 말고 뜻만 보세요.”라고 말씀하신다. 전문 서예가가 아니라 글씨는 부끄러우니 글뜻만 보라는 말씀이다. 뜻을 공부하고 음미하면서 원로 문인의 겸손을 배운다. 고매한 인품을 배운다.
팔순 원로 문인이 정성스럽게 보내주시는 서예작품을 받으면 나는 다시 글에 담긴 뜻을 공부한다. 좋은 글귀에 담긴 뜻을 재해석하면서 인생의 가치와 멋을 발견하는 일은 즐거움이다.
내 생활의 부족한 부분을 벽에 걸린 액자 글씨가 채워준다. 때론 각성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힘을 ‘사자성어 붓글씨’가 발휘하기도 한다.
더 무서운 것은 호기심 많은 어린 손자의 눈이다. 벽에 걸린 글씨 한자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끝없이 던지는 손자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진땀이 난다. 하지만 즐겁다.
옛 어르신들도 그랬을 것이다. 손자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개구쟁이 천진무구한 동심(童心)은 할아버지가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멈칫거리면 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는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손자의 질문에 언제나 성실하게 답할 의무를 느낀다. ■
■ 필자 윤승원 ysw2350@hanmail.net 『한국문학』 공모전 당선(1990), KBS와 『한국수필』 공동 공모 수필 당선(1991),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전 금강일보 논설위원, 『한국문학시대』 문학 대상 수상,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 사연 공모 최우수상, 대전문학관 중견 작가전 초대작가, 저서 『문학관에서 만난 나의 수필』 외 8권
|
♧ ♧ ♧
첫댓글 ♧ 페이스북에서
◆ 김명아(시인, 교육자, ‘한국문학시대’ 발행인, 대전문총 회장) 23.7.20.
할아버지 선생님!
▲답글 / 윤승원(필자)
존경하는 김 회장님으로부터 ‘선생님’이란 말씀 들으니
마치 충남 청양 깊은 산골 동네 서당의 ‘훈장님’이라도 된 기분입니다.
▲ 답글 / 김명아(시인)
늙은이는 어린이한테 배워야 합니다.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손자가 할아버지의 선생님이 되기도 합니다.
▲ 답글 / 윤승원(필자)
공감합니다. 어린 손자가 한마디 하는 것을 글로 옮기면 동시가 되고,
이야기로 쓰면 동화가 됩니다.
손자와 함께 하는 시간은 수필 한 편 잉태하는 시간입니다.
♧ ‘청촌수필’ 카페에서
◆ 원경애(수필문학 독자) 23.7.20.
손자와 할아버지가 성묫길 차내에서 주고받는 한자 게임,
할아버지에게는 기쁨의 에너지가 솟고,
어린 손자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는
아름답고 유익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 답글 / 윤승원(필자)
한자 학습 경력 60년 할아버지가
초등학생 손자에게 배웁니다.
편집진에서 제작한 책갈피 문구
■ 이정웅 대전수필문학회장님이 제작한 ‘책갈피’ 문구 -
《수필예술 44호》에 참여한 전 회원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한 대목을 뽑았다고 합니다. 전 회원의 작품을 정밀하게 읽고, 각각의 작품마다 한 대목을 가려 뽑는다는 것은 대단한 성의입니다. 이러한 특별 기획과 참신한 ‘책갈피 제작 아이디어’는 이정웅 회장님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까지 그 어느 동인지에서도 볼 수 없었던 회원 각각의 작품에 대한 존중과 특별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윤승원 소감
언급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이 담긴 글입니다. 그러나 단연 돋보이는 것은 지환이 이야기입니다. 지환이의 건강한 모습, 조손간의 대화를 통해 문화의 전승. 송하섭 교수의 액자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참으로 대전의 문단의 멋진 굿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족 이야기나 고향 이야기를 글로 쓰면 심적 부담이 적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은퇴한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손자 이야기’가 생활의 중심에 있습니다. 세상사 관심이 온통 손자와 연관되기도 합니다. 가령 학교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마약 문제 등으로 세상이 시끄러우면 ‘우리 손자는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나?’ 걱정하고, 교육 정책이 바뀌면 ‘우리 손자는…’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옵니다. 젊은이들의 독해력 문제와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언론에서 거론할 때면 ‘우리 손자도 중단없이 한자 학습을 이어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런 할아버지의 걱정과 사랑의 마음이 이런 졸고 수필을 쓰게 만듭니다. 낙암 교수님의 따뜻한 격려 말씀은 그래서 제게 금은보화보다도 값집니다. 감사합니다. (윤승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