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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적광전 앞 뜰. 눈을 덮고 선 소나무가 법신의 광휘인 듯하다. 낮과 밤. 시간의 두 기둥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기둥이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삶을 이어갑니다.
‘주리면 먹고 졸리면 잔다.’ 출세간의 사람들이 사는 법입니다. 세간 살림 꼴로 바꾸면 이렇게 되겠지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쉰다.’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일이 왜 이리 ‘꿈’같은지요.
▲ 월정산의 상징인 전나무 숲길. 나이 몇백을 헤아리는 우람한 나무들이 800 미터쯤 되는 길가에 늘어서 있다.
산사의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법고 소리를 따라 어둠이 밀려오는 때입니다. 동지와 설 사이인 이맘때가 제격이지요. 더욱이 월정사는 언제 봐도 꽉 찬 달 같은 형국의 둥두렷한 오대산 자락이 감싸고 있어서 밤 풍경은 더욱 그윽합니다.
절집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절로 정갈해집니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몸을 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섬돌의 정갈한 네모가 신발을 제멋대로 벗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든 바깥에서든 신발 하나 제대로 벗어 두지 못하는 우리네 일상의 매무새가 얼마나 구겨져 있는지를 여실히 알게 합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쉰다’는 이 단순한 삶의 원리가 ‘꿈같은 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지요.
따뜻한 온돌 위에 두 다리를 뻗고 시간을 헤아려 봅니다. 오후 7시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느낌은 한밤중 같습니다. 덤으로 하룻밤을 더 얻은 기분입니다. 졸음이 봄볕처럼 다가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나른한 기쁨입니다.
▲ 연꽃잎 모양의 등.
잡것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밤의 정체가 궁금하여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전혀 다른 세상이 태어나 있습니다. 눈입니다.
살금살금 적광전 앞뜰로 나갔습니다. 낮과 밤 혹은 빛과 어둠의 경계가 무너진 대적광(大寂光)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광명의 부처’로 일컬어지는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결코 관념의 세계가 아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봅니다.
▲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나 석굴암 본존불의 형태를 따른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다.
제대로 살려면, 제대로 쉬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런 강박도 없이 그냥 쉬는 공부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결코 요가센터나 피트니스클럽, 스키장, 온천… 같은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겠지요.
산사의 아침은 눈을 치우는 일로 시작됐습니다. 그냥 두면 될 일이지 무슨 법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할 일이 또 있는 법. 눈을 내린 하늘의 뜻과 눈을 치우는 사람의 뜻이 다른 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눈을 치우는 일도 법석(法席)이겠지요.
▲ 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얼굴의 웃음꽃이 선한 마음의 고갱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사실 이번 여행은 그 보살상의 선한 웃음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한국의 얼굴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월정사 보살상을 들 것입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나는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는 쪽으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 얼굴에 어린 웃음은 세계인이 경탄해마지 않는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이나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과도 다릅니다. 월정사 보살상의 얼굴에는 온 마음 온몸으로 자신을 누군가에 바치는 진심이 어려 있습니다. 그 얼굴에 핀 웃음꽃에서 나는 자타(自他) 혹은 주객(主客)이 무너진 마음자리의 향기를 느낍니다.▲ 금강문. 판문 벽화가 익살스럽다. ▲ 눈을 덮고 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 금방이라도 하늘로 오를 듯한 날렵한 상승감을 보여준다.
월정사 보살상의 얼굴에서 나는 이기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선한 마음의 고갱이를 봅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오려면 그 보살상이 탑을 우러러는 딱 그만큼 각도로 고개를 젖혀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절묘하게도 보살상의 키가 180cm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그렇게 됩니다. 키가 큰 사람이라면 약간 무릎을 구부려야 하겠지요.
▲ 월정사의 얼굴격인 금강문. 눈을 덮은 나무들의 산사의 기운을 시리게 한다.
보천과 효명이라는 신라의 두 왕자가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 올라 예를 드렸는데, 이때 동대(東臺)에는 1만의 관음, 남대에는 1만의 지장, 서대에는 1만의 대세지, 북대에는 석가여래를 앞세운 5백의 아라한, 중대에는 1만의 문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다섯 대에는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동대 관음암·서대 수정암·남대 지장암·북대 미륵암·중대 사자암(적멸보궁을 돌보는 암자)이 그것입니다. 어쩌면 오대산의 울창한 수림과 깊은 계곡이 곧 5만 진성(眞聖)의 현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눈치우기 울력을 하는 스님들.
월정사 보살상의 그 선한 얼굴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참으로 닮고 싶은 얼굴입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정정현 차장 rockart@chosun.com">rockart@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