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자정(自淨)작용을 기대하고 관여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글을 씁니다. 아까 낮에 올리려다가, 요즘 신경써야 할 일 때문에 바로 올리지 못하고 늦게서야 씁니다.
제가 전대 카페지기님께 처음 카페지기 제안을 받았을 때, 제가 맡게 된다면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지향할 거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무위(無爲)는 다들 아시듯이 『노자』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개념입니다.
이 ‘무위’에 대해 다양한 학설들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각 개체의 자연성이 있는 그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위라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무위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관리를 해줘야 합니다. 카페로 말하자면 스팸글을 지우는 것, 등업 신청하시는 분들을 등업해 드리는 것 등을 들 수 있겠죠.
저는 지금까지 일반회원 제재를 해본 적이 없고, 규정을 작성해 제시해본 적도 없습니다. 할 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것입니다. 이곳이 수만휘처럼 온갖 인간들이 밀려오는 대형 커뮤니티라면 부득이하게 이런저런 규정과 제재 방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 카페는 전체 회원수도 많지 않을 뿐더러 실제 활동 인원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야말로 ‘소국과민’한 사회죠. 저는 웬만하면 명시적인 규정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노자』에 천망(天網)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물[網]이라는 메타포는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지만 카페에 적용하자면 규정, 규칙 같은 것을 유비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대형 커뮤니티가 복잡한 규정으로 회원들을 통제하는 것이 인망(人網)이라면, 소형 커뮤니티에서 구성원들이 자체적으로 문제없이 지내는 것이 천망(天網)이라 하겠습니다.
대형 커뮤니티에 가보면, 잊을만하면 올라오는 글이 규정 해석에 대한 불만 토로입니다. 이는 명시적 규정 가지고는 무한대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전부 커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명시적 규정이 생기기 시작하면 규정의 틈새를 비집고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출몰하게 됩니다. 규정이 언어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반면 명시적인 규정 없이 각자 자정작용을 하는 식으로 돌아간다면 애초에 빠져나갈 규정 자체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놓치는 것이 없는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걸 ‘천망’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천망’의 체제는 현실성이 약하고 이상론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천망의 체제가 실현되려면 기본적으로 구성원들 각자가 알아서 잘 처신하는 의식수준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정도 양식은 최소한 사범대 출신들이라면 대체로 갖추고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규정 없는 천망의 무위지치로 카페를 관리해 왔던 것입니다.
『노자』는 대도(大道)가 손상되면 인의(仁義)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최근 카페 게시판을 보니 그동안 그럭저럭 보존되어 온 大道가 손상될까 우려가 드는데, 저는 앞으로 제 손으로 규범[仁義]을 시시콜콜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노자는 大道를 손상시킬 수 있는 요소가 나타날 때 어떻게 하는가? 무위한다고 하는데 그런 요소는 제재하지 않는가? 물론 아닙니다. 『노자』는 도를 해치는 요소가 발견되면 진압하겠다[鎭]고도 하고, 없애버리겠다[殺]고도 합니다.(37장, 74장)
제가 카페 회원이나 게시물을 진압(?)하는 경우는 여태껏 딱 하나뿐이었습니다. 카페 운영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입니다. 해커가 회원의 계정을 해킹하여 음란물, 스팸글을 올리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경우 해당 게시물을 삭제 처리하고 업로더는 일정 기간 활동 정지 처리합니다. 단 계정의 원래 소유자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잘못은 해커에게 있죠) 보통 한 달 정도 지나면 자동으로 풀려 준회원으로 전환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카페를 맡은 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이런 스팸글 외로는 회원을 제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카페에 피해를 끼친 회원이 해킹당한 계정 외로는 없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최근에 보니 해킹당하지 않은 정상 계정이 카페 운영에 피해를 끼치는 사례가 자꾸 눈에 보입니다. 이런 사례는 제가 이 카페를 맡은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고 또 제 위치가 카페의 최고권한자이기 때문에 가급적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간 과감한 조치를 하지 않고 일단 자정능력을 믿어보기로 하고 지켜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례를 반복적으로 목도한 이상, 이제는 신중을 기할 시기가 거의 끝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문제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건 예전에도 어디서 한번 말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언어에 관대한 편입니다. 이는 학부생 때 경험했던 윤리교육 관련 다른 커뮤니티들의 사례를 보고서 형성한 입장입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제가 경험한 윤리교육 커뮤니티들은 하나같이 자유로운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아무 영양가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나 뻔한 이야기만 오가지, 치열한 다툼이 조금이라도 이루어지려 하면 사방에서 제재하는 것입니다. 반대의견을 조금만 주고받으면 꼭 누가 개입해서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식으로 김빠지게 만들어 버리고, 너무나 따분한 일반론으로만 귀결되곤 했습니다. 일상 대화에서 서로를 모욕하기 위해 말다툼하는 것과 학문적 대화에서 발전을 위해 말다툼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제가 목격해 온 윤리교육 커뮤니티들은 하나같이 이걸 분간을 못하고 그저 말다툼이기만 하면 무조건 틀어막으려고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저는 카페지기가 되고 나서 각자의 언어 스타일을 두루 관용하기로 했습니다. 이게 보장되어야 비로소 학적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툼이 일어나도 당사자들끼리 대화해서 해결하도록 할 뿐 제가 나서서 말리지 않는 건 이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설령 사감(私感)이 섞여들어간다 해도 철저하게 당사자들끼리 풀라는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저는 거칠더라도 속내를 깨끗하게 다 꺼낼 수 있는 이런 곳이 있어야 터놓고 토론하는 문화가 생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비록 지금 자유를 보장해놓아도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긴 하지만, 환경이라도 구축해 놓은 것과 이마저도 없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용은 주로 부정의나 오류 같은 걸 향한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가원이나 EBS에서 명백한 오류를 인정 안 하고 배째라식으로 나오는 것은 완벽하게 부정의한 일이죠. 비속어까지 관용한다는 건 바로 그런 것에 대해 속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도록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교육부에까지 끌고 가야 했던 EBS 오류 대응 사태를 예로 들면, 그때 ‘겸허’라는 분이 ‘시-벌놈들 저 답변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네’라고 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걸 관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논쟁을 가능케 하거나 부조리에 분노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에서 관용하는 것이지, 무슨 회원들 간에 분란을 일으키고 카페 운영에 피해를 끼치라고 관용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사실 굳이 글로 설명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더 이상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히 이야기가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大道가 廢하여 人爲가 有하지 않도록, 모두의 이해와 협조를 바랍니다.
-
(+부기) 아까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윤틀딱들 서로 삐진 거 보니 귀엽네요. 10대들 같아요!’라는 댓글의 경우, 어떤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는 내용도 아니고, 대화 당사자로서 논쟁 중 감정이 격해진 것도 아니고, 단지 대화 나누던 사람들을 약올리는 내용일 뿐인데 그들이 문제될 만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죠. 회원 간 갈등을 유발하여 일반회원의 정상적 카페 이용에 피해를 입힌 사례입니다. (만약 명백하게 부조리를 도모하는 대화에 대고 알맞은 속어를 쓴 것이었다면 정상 참작을 어느 정도 해줄 수도 있겠지만, 이번 사례는 전혀 경우가 다릅니다.) 힉스님은 비속어를 제재 사유로 말하셨는데 좀더 디테일한 설명이 필요할 듯해 여기 덧붙여둡니다. 어차피 지금은 댓글 삭제 조치만 하고 계정은 그대로 둔 듯하니 일단 넘어가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언어 표현의 관용에 대해 공감하는 바입니다.
표현이 부드러워도, 내용이 헛된 것보다, 표현이 거칠더라도, 내용이 참된 것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렇죠. 그런 저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걸 잘 잡아내셨네요.
@한삶 저는 밤샘 작업중입니다 ㅠㅠ. 한삶 선생님 편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