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자 기자의 수도원 산책 ③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하느님을 찾아서
취재|김선자(수산나) 기자
“기도하고 일하라.” 가르친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과 삶을 구현하고자 안드레아스 임라인 신부에 의해 창설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는 북한 원산 교구장이자 덕원 감목대리구 교구장인 덕원 베네딕도 대수도원 아빠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초청으로 4명의 수도자가 1925년 10월 독일 툿찡을 떠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 북한 원산에 도착하며 시작되었다.
그 이후 시련과 고통, 박해 속에 북한 수녀원이 해산되고 남쪽(한국)으로 내려온 한국인 수녀들의 의해 수도생활을 재개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는 국제 수녀회로 현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베네딕도 규칙서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복음선포에 힘쓰고 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시작, 북한에서의 선교활동 그리고 피난
4명의 선교사 수녀들은 한국에 온 지 1년 만인 1926년부터 한국인 지원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원산(지금의 평양)본당과 지경공소, 볼미공소에서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시약소(공방)를 차리고 병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치료하고 대세를 주었다. 또한 6년제 보통학교로 발전한 해성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1927년 4월부터는 해성유치원을 운영했고, ‘호수천신학교’에서 가난한 어린이들과 청각장애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1944년경, 수녀들이 일하는 학교, 유치원과 덕원 신학교를 일본군에게 압수당했고, 해방 후에는 소련군 장교 숙소와 교육관으로 사용되었으며 농토마저 빼앗겼다. 이런 와중에 원산 수녀원에서는 5명의 마지막 수련자들이 첫 서원을 하고, 지원자들과 청원자들을 집으로 보내야만 했다.
1949년 5월, 원산 수녀원과 덕원 수도원이 습격을 당하여 독일인 신부, 수사, 수녀들과 몇몇 한국인 신부와 수녀들이 체포되었다. 한국 수녀들은 감옥에서 심문을 받고 얼마 후 수녀원으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수도복을 벗기우고 강제 해산을 당했다. 그후 인천 상륙작전으로 국군이 들어왔을 때 한국 수녀들은 다시 원산 수녀원에 모여 가난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유치원을 개원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약방을 열었으나 얼마 후 국군의 후퇴로 봇짐을 꾸려 원산 수녀원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함께 잡혀간 독일인 신부, 수사, 수녀들은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수녀들은 툿찡 모원에서 파견될 때 받은 선교사 십자가, 시계, 묵주, 기도서, 성가책을 빼앗겼고 수도복과 머리 수건을 벗고서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때부터 수도자들은 하루 12~1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김을 매야 했고 꽁꽁 얼어붙은 냉혹한 추위에 손발이 얼어터지고 등에는 소처럼 무거운 곡식단을 메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는 중노동을 했고, 굶주림과 모욕, 학대,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질병을 참아내는 극한의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5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살아남은 남녀 수도자들은 1953년 11월 해방되었다. 해방된 날 아침, 그들은 감사미사를 드리고 앞서 하느님 곁으로 간 수도자들의 무덤을 찾아가 기도를 했다. 생사를 함께 한 69명의 남녀 수도자들 중 44명(19명 사망, 6명 행방불명)만이 1954년 1월 고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의 새 출발과 대구 수녀원
1950년 12월 미국항선을 이용해 원산항을 출발한 8명의 수녀와 7명의 수사들은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그후 13명의 수녀가 피난생활을 하며 수도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수녀들은 미군들의 빨래와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는 가운데 1951년 10월 대구교구 최덕홍(요한) 주교의 도움으로 대구 주교관 내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대구에 정착한 수녀들은 디모테오 몬시뇰의 지원으로 대구 공평동에 첫 분원을 설립하고 후배 양성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1953년 봄, 이곳에 무료 시약소 ‘성 안토니오 의원’을 개원하여 전쟁 직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치료하며 전교를 시작했다. 이 시약소는 1956년 7월, 신암동 수녀원 내에 개원된 ‘파티마 의원’이 자리를 잡게 되자 폐쇄되었다.
남한에서 첫 지원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후 공평동 수녀원이 협소해지자 현재 ‘파티마 병원’이 있는 신암동에 대구 수녀원 분원을 건축하고, 경내에 ‘파티마 의원’을 개원한 것이 오늘의 ‘파티마 병원’이다.
1956년 5월 신암동 분원이 대구 수녀원 본원으로 승격되고 지금의 대구시 북구 사수동으로 이전(1985년)되기까지 30년 간 대구 수녀원의 구심점이었다. 한편 휴전협정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독일 수녀들이 1955년부터 다시 한국에 파견되었다.
암흑기와 시련기를 극복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은 수도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1987년 11월 서울 수녀원을 설립하고 분리했다. 이렇게 대구 수녀원과 서울 수녀원은 완전히 분리(1990년 7월) 독립된 국제 수녀회(로마 총원 소속)로 수련원을 각각 따로 가지고 있다.
양성과정
입회 전 성소자들을 위한 ‘다락방 모임’을 통해 인간적, 신앙적 성숙을 도모하며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지원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학습과정과 수도생활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전인적인 응답을 드리기 위해 2년 간 청원기를 가진다. 그리고 2년 동안 수련자로서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회의 삶을 배운다. 수련자는 1년 법정 수련기를 수녀원에서 보낸 다음, 둘째 해에는 가톨릭 신학원(2년 과정)에 다니면서 선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쌓는다.
첫 서원을 한 후 1년은 계속해서 가톨릭신학원을 다니고, 졸업 후 다년간 여러 사도직 분야에 파견되어 실제로 선교사의 삶을 체험한다. 종신서원을 하기까지 유기서원기는 5~6년이며, 2년마다 서원을 갱신하고, 종신서원 전 1년은 본원에서 대수련기를 보낸다. 이 기간은 30일 피정으로 시작하여 오전은 수녀원 내에서 소임을 하고, 오후에는 수업을 갖는다. 종신서원 후 5년 동안에도 정기적인 모임과 교육으로 자신의 성소를 더욱 더 확고히 한다. 그후에도 종신서원 수녀들은 재교육을 위한 기회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사도직 활동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근본적 특징은 규칙과 장상 아래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녀들이 활동하며 살고 있는 공동체들은 대개 큰 공동체들이고, 본당 사도직을 위해서도 최소 4명의 수녀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다.
대구 수녀원의 수녀들은 현재 대구 파티마 병원과 창원 파티마 병원, 경북대학 병원, 영남대학 병원, 순천향 병원에서 원목, 의료 사도직에 종사하고 있으며, 함창 상지여자중·고등학교와 정서장애 특수학교에서 교육 사도직을, 새터민 어린이집, 사회복지시설, 노인재가 복지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이밖에도 군인선교, 성서모임, 어버이 성서학교, 피정의 집, 교구 성소국,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인 교포사목 등으로 교회의 사명인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
문화, 언어, 관습도 다른 머나먼 이국땅에서 오로지 복음을 선포하려는 사명감을 안고 우리나라를 찾아온 독일인 수녀들로부터 시작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한결같이 하느님만을 찾고, 믿으며 걸어 온 그들의 삶의 발자취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또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깨닫게 한다.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성소 문의 : 053) 313-3431~4
[월간빛, 2012년 3월호]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국민학교 4학년때 까지 담임선생님이 수녀님이셨서 그런지, 수녀님에 대한 좋은 향기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게 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