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매월 발간하는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4년 마지막 호(Vol. 12, 2024년 12월 1일자, https://ruscis.hufs.ac.kr)에서 러시아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돕기 위해 인민군을 파병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하 김정은)의 의도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이종길씨(석사, 러시아CIS 정치 전공)가 쓴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김정은의 숨겨진 셈법은?'이다. 소개한다/편집자
**본 칼럼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학과와 바이러시아(www.buyruaaia21.com)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조선인민군은 왜 러시아 땅으로 갔을까?
2018년 김정은-트럼프 (미 대통령)의 '하노이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난 뒤 북한은 다시 '자력갱생'을 외치며 문을 걸어잠갔다. '타력의존'을 누구보다 강하게 희망하고 있는 북한에게 '자력갱생'의 구호는 의존 대상이 사라지면 외쳐온 강요된 의지다. 북한이 또다시 타의적 '자력갱생'식 생존 투쟁에 들어간 사이, 뜻밖의 사태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022년 발발했다.
단 사흘이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리라고 예측됐던 전쟁은 우크라이나의 예상 밖 선전과 서방의 군사 지원으로 장기화했고, 러시아는 전투에 쓸 폭탄마저 바닥을 보였다. 수심이 깊어지는 러시아의 필요를 채울 비장의 카드는 의외로 한반도에 있었다.
북한은 한국과의 긴 대치 속에 비록 낡고 구식이지만 소련의 무기 체제를 이어받아 러시아와 호환되는 포탄을 잔뜩 쌓아두었고, 대규모 상비 병력을 운영하고 있다. 러시아의 눈에는 이런 북한이 상황을 개선할 '조커 카드'였다. '타력의존'이 절실한 북한과, 포탄및 병력이 부족한 러시아 간의 '니즈'는 맞아떨어졌고, 평양과 모스크바의 관계는 급격한 상향 곡선을 타게 된다. 양 정상의 상호 방문에 이어 급기야 2024년 6월 군사동맹에 준하는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관계 조약'을 맺게 되었다. 곧이어 그해 10월에는 북한이 러시아 쿠르스크주(州)로 병력의 파병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토록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강하게 밀착하며 자국 젊은이들의 생명까지 전장으로 밀어넣는 김정은의 셈법은 무엇일까?
◇'백두'에 섞인 '후지산' 혈통과 4대 세습
'유일적 령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하 10대 원칙)은 북한 헌법 위의 헌법으로 전 국민이 따라야 할 최고강령이다. 10대 원칙의 마지막 10번째 원칙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시고 김정일 동지께서 이끌어 오신 주체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에서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이 핵심 대목이며, 이는 수령의 자격 요건에서 '백두의 혈통' 자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김정은의 친모인 고영희는 김정일의 본처가 아닌 세 번째 여인이다. 즉, 김정은은 첩의 아들이다. 고영희는 또 일본 조선총련계로 재일교포 출신이다. 이른바 '후지산 혈통'의 절반을 이어받은 김정은은 10대 원칙에 비추어 보면 온전하계 '대를 이을'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이를 스스로 잘 아는 김정은은 미흡한 자신의 세습 정당성을, '핵 무력 완성'을 통한 성과적 정당성으로 대체하고 공고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집권 이후 네 차례 핵실험, ICBM-SLBM의 전략 발사체 실험을 수없이 진행했고, 그 결과 북한은 현재 30개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정은은 또 2022년 '핵 무력 정책' 법령을 채택하고, 이듬해에는 헌법을 개정해 핵 무력에 대한 상세한 목표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 '핵 무력을 완성한 수령'으로서 부족한 세습 정당성을 성과 정당성으로 어렵게 보충해왔다. 동시에 김일성을 기리는 기념일인 '태양절'의 명칭을 '4·15절'로 바꾸는 등 선대 지우기를 통해 세습 정당성에 대한 공격을 피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했다.
그렇다면 4대 세습의 미래는 어떠할까? 김정은의 자녀 중 어느 누가 권력을 이어받든 4대 수령으로서의 정당성은 더더욱 없을 전망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묘책은 있을까?
◇김정은과 4대 세습의 안전망, 친러 엘리트 양성
북한의 인구는 약 2,600만 명이다. 수천만 명의 인민을 김정은 혼자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굉장히 순진하다. 당연히 독재자에게는 그를 충실히 도울 '핵심 엘리트'들이 필요하고, 이들의 충성심을 계속 유지시키려면 충분한 양의 비자금이 불가피하다. 김정은의 안전망 구축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김일성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끝없이 정적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중국 연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로 구성된) 연안파와 소련파를, 1966년에는 '반당 반혁명 종파 사건'으로 (마지막 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인) 갑산파를 숙청하면서 '1인 독재'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김정은도 집권 초기인 2014년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며 북한 내 상당수의 친중 엘리트를 숙청했다. 장성택은 김정일 시대부터 규모가 큰 종파를 이끌며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의 숙청으로 냉랭한 북중 관계는 일찌감치 예견됐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중국이 북한의 주요 후견 세력인 것은 분명하나, 생존을 넘어서는 대북 지원에 인색했다.
이 빈 공간을 채워줄 김정은의 '메시아'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등장한다. 북한은 러-우크라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에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면서 '피로 맺어진 신혈맹' 관계를 노렸고, 그의 기대(?)대로 북-러 관계는 급격하게 격상됐다. 푸틴 대통령은 북한의 소위 '39호실' 비자금 창고를 파병 인민군의 목숨값에 보은하여 넉넉히 채워줄 것이다. 또 한 달에도 여러 번 모스크바를 오가며 북-러 밀착의 실무적 업무를 담당하는 엘리트들은 김정은을 비호하고, 모스크바 엘리트층(크렘린)과 네트워킹을 유지할 '친러 엘리트' 그룹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넉넉해진 '비자금 창고'는 현금 다발과 호화 사치품의 형태로 다시 진러 엘리트 그룹의 당·군·정 관료들의 안방으로 들어가 그들의 충성심을 돋굴 것이다. 그들은 충실한 김정은의 보호자이자 4대 세습의 옹호자로 굳건해 질 것이고, 북한의 친러 정권 확립은 러시아의 대동북아 영향력 확장에도 실익이 있기에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북한을 지원해 줄 요인이 된다.
◇옐친-푸틴식 신변 안전 보장과 '정상 사회주의'
정당성 없는 4대 세습의 완성, 그리고 김정은과 그 가족 안위의 보장은 러시아와 진러 엘리트 그룹을 통해 어떻게 진행될까? 옐친과 푸틴의 권력 교체에서 작동 '기믹'(gimmick)을 찾을 수 있다. 옐친은 자신의 가족과 충성 엘리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후임자에 대해 고민하다 푸틴 당시 총리를 낙점했다. 권력을 이어받은 푸틴은 옐친의 기대대로 그의 가족과 엘리트 그룹을 보호했다.
5선에 성공한 푸틴도 20여년 전 옐친처럼 퇴임 후 자신을 보호해줄 후계자를 찾고, 비호 엘리트 그룹을 만들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 김정은에게 적용하려면, '정상 사회주의화'가 가미되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상 사회주의'란 시진핑 현 국가주석겸 당총서기 이전의 중국 권력 체제에서 10년 단위로 당 총서기(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서기장)가 교체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의 집단지도 체제가 작동하던 방식이다. 주기적으로 서기장이 교체되는 베트남 공산당과 라오스 인민혁명당에서도 그 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김정은은 자신과 가족의 후견 그룹이 될 '신 러시아 엘리트층'의 지원으로 4대 세습은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4대 수령의 정당성은 당연히 인정되지 않는다. 살아남는 비법은 '정상 사회주의'를 겨냥한 정치 개혁이 거론된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국방위원회 중심의 국정운영을 당 중심으로 환원시키고, 수십 년간 열리지 않던 당대회를 5년에 한 번씩 당 규약대로 개최하는 등 '정상 당-국가 체제' 운영을 도모한 바 있다.
◇김정은의 개혁 군주 꿈?
4대 세습은 이미 종결된 '백두 혈통'의 마지막 세습이자 북한의 정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이 '정상 사회주의'를 추진한다면, 4대 세습은 5년~10년 간 이어지고, 그 기간은 '정상 사회주의'를 준비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또 북한의 당-국가 체제는 정치국 중심으로 새롭게 바뀌고, '신 러시아 엘리트 '그룹에서 주기적으로 당 총서기가 배출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김정은은 정치 개혁과 함께 북한의 '상왕'으로 남아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담보받고, 지금까지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북한 역사에는 '개혁 정치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 김정은은 자신의 3대 세습의 취약한 정당성과 함께 이어지는 4대 세습이 얼마나 더 정당성이 없을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건강을 해치는 폭음과 줄담배 습관도 자신의 안위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나쁜 습관이라는 분석에서 미뤄보면, 김정은도 계속 생존의 묘책을 고민할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이 전쟁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인지, 상호 지속적인 필요가 맞아떨어진 장기적 현상인지는 추적 연구가 필요하다. 세습과 생존을 고민하는 김정은과 러시아의 대북 셈법이 의외의 '외부 효과'를 일으킨다면? 북한의 변화 가능성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전례 없이 긴밀해진 러시아와의 관계가 김정은의 생존 전략에도 영향을 미쳐 북한의 권력 구조 개편을 촉발할 수도 있다. 김정은이 생존을 위해 친러 엘리트층과 함께 정치 혁신 카드를 꺼내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