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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3일 주일 [(녹) 연중 제19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기념 없음 ▦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십니다. 호수에서 파도에 시달리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인생과 역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어떠한 시련에도 의연하게 맞서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에서,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한다(복음).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9ㄱ.11-13ㄱ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9,1-5 형제 여러분,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2-33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산 호렙 동굴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그는 강한 바람과 지진, 불길이 지난 다음에야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들어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는 엘리야는 부드러운 미풍과 같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찬 바람에 맞서 배를 몰고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신적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동포인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몰라보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영광을 받았음에도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을 믿게 할 요란한 표징과 기적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역경 중에 헤맬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존재 자체이신 그분께서는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침묵 중에 믿고 기다릴 때,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잔잔한 미풍처럼 그분께서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실존을 감싸 안고 위로해 주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새벽 4시에도 우리를 위해 달려오시는 주님 주님께서 역풍을 만나 ‘쌩고생’하고 있는 ‘12제자호’를 구조하기 위해 다가오시는 장면은 언제 묵상해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자신들을 도와주시려 긴급출동하신 스승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큰 실수를 범합니다. 알아보지 못하기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제자들은 스승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소리를 질러댔으니, 그분 입장에서 참으로 씁쓸하셨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스승님이심을 확인한 제자들의 마음도 참으로 송구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일상 안에서 자주 겪는 체험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순간, 다양한 모습,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희망과 설렘, 기쁨과 성공, 승승장구와 만사형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분께서는 혹독한 시련과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굴욕적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풋풋한 어린 시절, 꽃 같은 청춘의 시절, 따뜻한 봄바람 같은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분께서는 끔찍한 병고의 순간, 아니면 고독한 노년기, 혹독한 겨울바람 같은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분께서는 나와 철저하게 맞지 않는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순간, 다양한 모습, 다양한 존재를 통해, 다시 말해서 천개의 얼굴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언제나, 늘, 거듭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도 폭풍속의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너무나 세상 것에 사로잡혀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너무 지나치게 아래를 향해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누군가가 아픈 나를 위해 만사 제쳐놓고 새벽 4시에 달려와 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항상 노심초사하시는 주님, 곤경에 빠져있는 우리를 위해 새벽 4시에도 달려오시는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우러르는 사람과 닮으려는 사람
‘건축학개론’이란 영화는 한 사람이 속한, 혹은 속하고 싶어 하는 공간을 소재로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표현한 영화라고 합니다. 사소한 오해로 스무 살 대학생 때의 첫 사랑은 깨졌습니다. 그렇지만 15년 뒤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합니다. 남자는 대학생 때 자신이 지어주겠다던 여자가 원했던 집의 모양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하는 척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직 그 지어주고 싶은 집에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바람을 기억하고 그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둘의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냥 “아직도 나 좋아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도 되는데 왜 두 사람은 ‘아직도 내가 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라는 방식으로 접근할까요? 왜냐하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저 바라봐서 좋은 것을 넘어서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감정이라 합니다. 감정은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은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사진을 보며 혼자서도 젖어들 수 있는 것이 감정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혼자서는 생길 수 없는 무엇입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서 힘들어 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감정인지 사랑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감성적으로 당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도 사랑 받고 싶으실 것입니다.
만약 어떤 두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 중에서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가끔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사람도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보다 더 나를 좋아하는 높은 단계의 어떤 특징을 찾아내야합니다. 감정이 아닌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분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바라보는 부류이고, 하나는 그분을 따라하려고 하는 베드로와 같은 부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류를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을까요?
저도 이제 어디 가서 강의를 하면 팬이라고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러다보니 교만하게도 그런 영광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어떤 때는 그렇게 환호해 주시는 분들에게 큰 기쁨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많이 받다보면 무감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후배 신부가 “저는 형님처럼 되는 게 목표에요. 형님을 넘어서겠어. 전 삼융이 될 거예요 ㅎㅎ”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올 해 들은 말 중에 이 말이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닮고 싶다는 말이 더 행복합니다. 만약 아이가 엄마 아빠가 좋다고 하면서 닮기는 싫다고 말한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좋아하는 것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닮고 싶은 마음은 사랑해야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마음이지 않으셨을까요? 당신이 굳이 물 위를 걸으신다면 그저 박수만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박수는 이미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셔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하였기에 예수님은 산으로 홀로 피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런 우러름은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저 감정적으로만 그분을 경외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면 분명 더 큰 무언가를 바라고 계신데도 말합니다. 다행히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이 얼마나 기다리던 말입니까? 두려워 떨며 당신께로는 오기를 원치 않는 제자들 가운데 당신이 걷는 그 모습대로 걷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교회의 수장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찬양만 하는 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한 대로 자신들도 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예수님은 “그분은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지. 우리는 약한 인간이라 안 돼!”라는 말을 가장 가슴아파하십니다. 말로는 좋아한다고 하며 닮기는 원하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오기를 주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닮으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너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분이 하는 것을 하게 되고 그분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그분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려고 하다가도 한계에 부딪히며 ‘나는 그분처럼은 될 수 없는 거구나!’라고 말한다면 베드로처럼 물속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면 항상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다시 손을 내밀면 약한 믿음을 다시 굳건하게 하여 걷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예수님은 병자도 고치시고 물 위도 걸으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심지어 당신이 죽으셨다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닮으려고만 하면 당신께서 아버지께 청하여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하게 해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저도 저를 뛰어넘겠다는 후배에게 약간은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 주어 만약 제가 앞서있는 게 사실이라면 진정으로 저를 뛰어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저 나를 좋다고만 하며 나를 만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보다 훨씬 사랑스럽습니다.
구약의 스승과 제자 중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무엄하게도 스승 엘리야보다 두 배나 큰 성령의 힘을 원합니다.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8-9)
스승을 뛰어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스승 영의 두 몫을 받습니다. 참 스승은 자신을 뛰어넘겠다는 제자가 밉지 않습니다. 닮지 않으려는 제자가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와 같은 정신으로, 베드로와 같은 정신으로 그분께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날 닮았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분을 닮으려는 마음보다 더 큰 찬미는 없습니다. 닮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가까워지려는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참 찬미를 바라시며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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