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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5. 전투부대의 지휘체제는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비둘기부대를 파견할 때에는 증파부대를 주월미군사지원사령관의 작전통제하에 두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미국측에 제시하였으나 월남군측이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자기들을 도우러 왔으니 월남군의 작전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강요하다시피 하므로 미군측은 그때의 미ㆍ월간의 정황으로 보아 부득이 동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자 우리에게도 양보하도록 종용하는 것을 당시 이 장군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대안으로서 3자 협의기구인 정책회의제도를 관철시키고 또한, 당초의 한국측의 제안을 수용하지 못한 미군측에 대해 강요하다시피 하여 만일의 사태하에서의 대책까지 포함시킨 비밀협정을 체결한 장본인으로서 또한 그때는 비 전투부대로서 피해복구와 재건사업을 하는 등 비 전술적인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본국으로부터 미군의 작전통제하에 두도록 훈령까지 받았을 뿐만아니라 군수뇌부의 일각에서는 지휘체제를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 지휘는 통일이 되어야지 하며 비판을 받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이번 전투부대를 파견할 때는 상황이 바뀌어 월남군은 침묵을 지키고 미군측은 자기들의 작전통제하에 두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만아니라, 현지에서 순조롭지 않으면 서울로 넘겨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이에 대한 매듭을 지우려고 하였는데 이를 물리치고 비둘기부대 때와 같은 정책회의 제도를 관철시켰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답) 중요한 것을 잘 지적하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만은 사이공으로 파견되는 것을 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합참의장“장창국”대장으로부터 연락장교단과 함께 다시 한번 월남에 가서 군사실무약정을 직접 맡아 주기를 바란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나는 아무런 이의를 내세울 처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전임“김종오 의장”때도 그렇게 해서 두 번이나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약정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는 연속성이 있어서 유리하겠으나 지휘체제 문제만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다섯번에 걸친 대소의 회의와 상대방의 대표가 격상보강되고 궁국에 가서는 주월미군사지원사령관에 의해서 나의 주장을 연락장교단장인“이세호”장군과의 대담을 통하여 확인함으로서 나의 초지가 관철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회의의 협상내용을 중점적으로 핵심이 되는 사항에 대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한ㆍ미양측은 각기 초안을 작성하여 교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월남군측 초안은 하루 늦게 교환되었습니다. 미국측은 지휘체제를「한국군 전투부대와 전투 지원부대는 월남 도착과 동시에 주월미군사원조사령관의 작전통제하에 들어가며 작전 통제권은 미육군야전사령관을 통하여 행사한다.」우리의 안은「한국군에 대한 임무, 작전지역, 부대이동 등 한국군 운용상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은 한ㆍ월ㆍ미 3군대표로 구성된 국제군사원조정책회의에서 결정한다」고 되어있었습니다.
미군측은 우리가 제시한 안을 보고 이 문제는 1)국가의 정책적인 문제이고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고 대사나 정부수준에서 다루어야할 성질의 것이라고 하고 2)한국측은 정책회의제도를 제의하지만 제3국군이 증가됨에 따라 각각 별개의 사령부와 협조는 어려우며 지휘 통일에 지장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당시 전투부대의 지휘체제문제를 정부차원에서 취급하도록 서울로 넘기면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미국측의 요구대로 타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려운“게임”이였으나 월남전의 특수성을 인식시키고 실무적으로 현지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미국측에게 우리 양측은 목표는 같지만 방법에 있어서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이니 우리는 서로 상대편의 의견을 듣고 토의하여 상호간의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미국측 대표에게 한국군전투부대의 파병요청은 누가 했는가? 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미측대표는 월남에서 하였다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소신을 말하였습니다. 한국군의 파병요청은 월남정부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존슨”대통령이“박정희”대통령에게 월남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지요. 미국은 한국전쟁 때 우리를 지켜준 혈맹으로서 공산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자유월남을 구출하자고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우리“박정희”대통령은 남침의 기회만 노리고 있는 적을 앞에 두고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야당의 저항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원수간 합의된 정책과 신의를 지키며 위기에 처해 있는 민주우방을 지원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전투부대의 월남 파병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월남에는 아직 민주우방의 여러나라 군대를 통괄할 수 있는 군사기구 즉 한국의 “UN사령부”나 유럽의 “NATO군사령부”같은 기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참전국의 명예와 위신을 존중하고 효율적인 협조체제를 갖출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도 인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한․월․미 3국의 군사대표로 구성된 정책회의 제도입니다.
이 정책회의에서는 부대의 임무, 작전지역 및 부대이동 등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것을 합의결정하며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의 상황에 따라 한국군의 임무를 단계적으로 결정할 수도 있고 몇 개 단계를 통합해서 협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군사작전에 있어서 지휘의 통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월남전의 특수성과 한국의 국내사정을 고려할 때 참전군의 명분과 실리를 추구할 수도 있도록 융통성 있는 지휘체제를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이제도가 실현되다면 참전국의 위상과 명분이 명료해질뿐만아니라 베트콩과의 싸움에서 더욱 떳떳하게 한․ 미간에 우의와 협조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의 설명을 듣고 미측 참석자들은 부정적인 자세에서 긍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3국군 담단처장이며 미국측 실무대표인“쿡크”대령의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 이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정책회의를 통해서 미군의 작전통제하에 둔다는 조항을 삽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상황에 따라 그럴 경우도 생길 수 있겠지만 미리부터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정책회의를 설치하는 목적과 본래의 의도가 상실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질문은 끈질기게 계속되었습니다. 정책회의에서는 3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이 상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작전상 영향이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측을 계속 의혹에 눈으로 살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다시 점잖게 충고를 하였습니다.
「한국군의 파병 자체가 한ㆍ미간의 돈독한 우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러한 협력관계를 의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본문제는 상호신뢰와 협동정신입니다. 작전통제권을 위임하고 안하고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고 하였습니다.
“쿡크”대령이 긍정적인 태토를 보이면서 한국측 안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웨스트모얼랜드”장군의 지침도 있고 하니 사령관을 납득시켜보고 그의 결심을 이날 밤 안으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 하였으나 그날 밤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뜻밖에도 월남군측 수석대표인 월남군 작전참모부장“탕”장군이 나의 수소인 엠베서터호텔로 찾아왔습니다.“탕”장군은 비둘기부대 파병 문제로 한ㆍ월ㆍ미 3개국대표들이 모인 연석회의 석상에서 비둘기부대를 월남군의 작전통제하에 두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밤중에 나를 찾아와 한국측이 제시한 지휘체제에 대한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뜻밖이고 기습적인 방문을 받고 나는 약간 당황하였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지휘체제에 대하여 미국측과 사전에 합의한 바도 없고 월남 정부가 요청한 전투부대를 파병하는데 있어서 월남대표가 모르게 한국과 미국이 단독으로 처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구군 전투부대를 파병과 동시에 제3국군의 작전통제하에 두도록 한다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으므로 새로 부임하는 한국군사령관과 관계 당사국 대표들이 모여서 협의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비둘기부대의 파견 때 이미 설치된 국제 군사원조정책회의를 존속시키고 이를 운용하도록 제시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구를 존속 운영하게되면 앞으로 이 기구를 통하여 주월한국군의 운용에 관한 중요한 상황이 검토되고 작전상황에 따라서는 한국군부대가 미군이나 월남군의 작전통제하에 들아갈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지상황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이며 주월한국군사령관의 재량에 속하는 상황입니다. 약 두시간에 걸쳐“탕”장군과 약정서 초안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구체적인 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탕”장군은「이 장군이 왜 비둘기부대 선발대장으로 파견되어 3자협의체제를 주장하였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하면서 한국군 제의에 대해서 전적으로 찬성한다고 하고 밝은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월남의 정치 정세는 많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월남군총사령부 작전참모부장이긴 하였으나“탕”장군도 이 문제에 대하여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이날 밤에 나를 찾아온“탕”장군이 오랜시간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의 참 뜻을 이해하고 구면의 우의를 다지면서 한ㆍ미간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미국의 일방적으로 추종하기만 하는 굴욕적인 관계로 보는 것 같은 어이없는 잘못된 시각을 바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더욱이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한국과 월남 사이의 참된 우의와 유대를 굳게 다지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한편 흐뭇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5일 후에 한ㆍ월간의 군사실무약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다시 만났습니다. 월남군과의 약정 내용 중에는 미국측과 달리 월남은 주권국가이므로 1)군사요원의 법적 지위 2)전투부대가 전술책임지역을 할당받았을 때 한국군부대장의 권한 3)포로 취급 4)피해보상 문제 5)정보교환, 정보활동 지원 6)연락단의 배치등 까다로운 문제가 많았으나 한국측의 의견을 중심으로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한편 지휘체제 문제는 한ㆍ미 두 나라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며칠 전 3차 회의에서“쿡크”대령은“웨스트모얼랜드”사령관에게 납득시켜보고 그의 결심을 그날 밤 안으로 알려주겠다고 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9월 5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사지원사령부 참모부장인“애비(abbey)"장군이 새로 참석한 가운데 4차회의를 갖게되었습니다.
미측 실무대표가 격상된 셈입니다. “애비”장군은 새로운 안이라고 제시하였으나 작전통제권을 위임한다는 것을 사전에 약속하던가 비밀각서를 교환하자는 것을 표현만 바꾸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한국군사령관이 도착 후에 임무 수행 상 필요에 따라 협의하고 처리할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애비”장군은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면서 한국군이 현지에 도착하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1)한국군 단독작전 2)미군사지원사령부의 작전통제 3)월남군의 작전통제의 3가지가 있습니다.
미군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겠다면 월남의 작전통제를 받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작전수행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까? 다분히 위협적인 말이었습니다. 나는“애비”장군에게“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을 하기 위해서 월남에 파견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군과 미군은 다년간 연합작전을 해온 경험이 있으므로 약정서에 미군의 작전통제하에 둔다고 하지 않아도 임무수행을 위한 협조는 잘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더니 “애비”장군은 “그렇다면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이겠느냐고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으나, 새로운 안이라는 것도 표현을 바꾸었을 뿐 대동소이한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월남 사람들과의 경우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을 되도록 자제해 왔으나 미국측이 나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편리한 주장만을 앞세워 말하므로“애비”장군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서두를 꺼내고“월남군은 미군의 작전 통제하에 두고 있지않지만 미ㆍ월간의 협조는 잘 되고 있지 않은가”그런데 미국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증파되는 동맹국인 한국군은 미군의 작전 통제하에 두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월남의 국민 감정과 베트콩에 대한 월남의 입장은 배려할 줄 알면서 한국의 국내 사정과“미국의 용병”이라는 묘략을 받아가며 참전하고 있는 한국군의 입장은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말인가? 나의 이 제의는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월남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차원 높은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아직도 월남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한국군이 기여할 수 있는 특수한 위치를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월남은 과거의 쓰라린 역사 속에서 외세 특히 백인들에 대한 증오와 피해의식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민족감정과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있는 공산세력 특히 베트콩으로부터 그 병적인 심리를 고쳐주고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한국군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우리의 과거역사는 그들과 너무 비슷한 점이 많았고 직접 공산침략으로 우리가 격은 체험은 바로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이러한 특수성을 감안하여 서로가 권위와 위상을 존중하며 상호 보완하는 차원 높은 한ㆍ미간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월남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보다 큰 기여를 하게될 것으로 본다고 충고하였습니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미국도 월남전이 단순한 무력전이 아니라 정치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자기들에게 협력하기 위하여 파병된 피로 맺아진 한국군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만을 앞세우려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그들의 사고 방식이 역사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웨스트모얼랜드”장군이 월남에 부임하기에 앞서 뉴욕에 있는 “맥아더”장군을 예방하였을 때 월남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사람들을 많이 참전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한 회고 담이 생각납니다.
그 참뜻을 헤아릴 수 없으나 다시 한번 음미하게 됩니다. 장내의 무거운 분위기를 조정해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우리와 함께 온 합참수석고문“블레웨트”대령이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합의를 보았으니 작전통제권에 대한 문제는 별도의 약정을 체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제의를 하였습니다.“애비”장군은 작전 통제문제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양국군 대표가 비밀각서를 교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한국군을 미군의 작전통제하에 두는 것을 기정사실로 확정 지으려는 의도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미국측이 제의하는 비밀약정은 내가 비둘기부대 파병에 앞서 선발대장으로 파견되었을 때 월남 정세가 불안정하여 만일의 사태를 염려해서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한 선례를 따르자는 것인데. 이번에는 미국과 한국이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참 열띤 논쟁을 펴고 있는데 연락장교단장 “이세호”장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 단장은 그 동안의 상황을 묻고 나서 일이 잘 안 풀리면 자꾸 연기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할 수 없는 것 같으니 적당히 양보해 버리고 빨리 일을 종결짓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지휘체제문제를 서울로 넘기도록 하고 합의된 사항만을 가지고 약정서를 교환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노력하였으니 좀더 설득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자리에 돌아오니까“블레웨트”대령이 비밀각서에 미련을 두며 본국에 연락하여 이쪽 사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지침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국의 지침을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화를 끊은지 10분 후에“이세호”장군으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우리는 내일 먼저 떠나겠으니 이 장군이 남아서 처리하고 귀국하도록 하십시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지휘체제에 관해서도 최선을 다 하였으며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는 완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락장교단은 귀국할 차비를 서두러고 있었던 것입니다.
10분 간격을 두고 연락장교단 단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보고 미국측은 무엇인가 다급한 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는지 이번에는 “쿡크”대령이 나섰습니다.「지휘체제에 대한 것은 일단 수용하여 5항의 전항을 살리고 국제 군사원조정책회의(IMA)의 기능문제는 별도로 비밀협전에서 언급하자」고 하였습니다. 미측은 근본적으로 3자 합의제도를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내가 주장하는“국제군사원조정책회의”제도는 받아들이되 이 기구의 기능에 대해서만은 별도의 비밀약정에서 규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크게 양보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미군지역사령관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월미군사지원사령관과 월남군 총참모장으로 구성되는 상설기구의 일원으로서 한국군을 대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애비”장군은 또다시「작전통제문제는 별도로 비밀약정을 체결해 해결하기로 하자」고 제의를 하였습니다.
나는 비밀협정을 체결할 권한은 나에게 없으며「한국군 사령관의 권한을 제한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미군측의 결정권자인“웨스트모얼랜드”사령관과의 단판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지금까지 우리 수준에서는 최선을 다 했으나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말대로 이제는 높은 수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다」“애비”장군은 약간 당황하였으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이 장군의 뜻을 “웨스트모얼랜드”장군에게 보고하겠습니다.」양측대표들은 다른 모든 문제들이 원만하게 타협을 보았으면서도 지휘체제만은 해결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쉽게 여기면서 회의를 마친 것이 13시20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5시간 후인 오후 7시에“웨스트모얼랜드”장군과의 면담이 이루어 졌으며 그 동안 나의 일관된 주장의 진의를 연락장교단장인 이세호 장군과의 회담을 통하여 확인하고 한국측의 안에 동의함으로서 나의 초지가 관철될 수가 있었습니다. “웨스트모얼랜드”장군은 한ㆍ미 양측 실무자들에게 “주월미군사지원사령관과 주월한국군사령관은 독립된 존제이며 예속되어 있지 않습니다.”마치 주월 미군사지원사령관과 월남군총참모장의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한국군이 월남에 도착한 후에 적절히 지원할 것을 다짐합니다. 전에 비둘기부대 때에도 3국 대표가 관심을 가지고 이 부대에 관련된 문제를「국제군사원조정책회의」에 회부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면은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며 앞으로 한국군사령관 “채명신”장군이 현지에 도착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과 한국은 오랜 우방국가 이고 월남에서도 계속 맹방으로서 우의를 돈독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지휘체제가 나의 주장대로 마무리 된 것은 주월한국군을 지휘 운용함에 있어서실로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지휘 체제는 많은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으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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