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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있거라 황진이 (가요 제목) 조선중기(중종~명종)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기록 된 여성중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오고 있는 인물입니다 황진이를 소재로 한 여러 문학작품 들과 대중가요들이 지금까지도 발표되며 회자되고 있음이 이를 뒷바침 해주고 있다하겠습니다 본래 반가의 규수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천인이였기에 신분상의 결함으로 인해 스스로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황진이 나이 15세가 됬을 무렵 이웃집 총각이 그녀의 출중한 미모에 반해 청혼을 한 일이 있었는데 황진이 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상사병으로 그만 세상을 등지게 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황진이는 스스로 자신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기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찌됬건 황진이는 비록 천민인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지만 예절이 바르고 기품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비교적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있습니다 천자문을 익혔고 여덟살 때에는 한학과 고전을 읽고 한시를 지었으며 시와 서예, 그림, 거문고, 춤, 노래등 다방면의 장르를 두루 섭렵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출중한 외모까지 겸했으니 그녀의 명성은 이내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황진이의 외모는 평소에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모든 기녀들 중 군계일학처럼 가장 뛰어났다는 것이며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천하절색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황진이는 동료 기녀들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죠 황진이는 당대 최고라 하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매력을 시험해 보는 일도 서슴치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마산에서 30년 동안 면벽수도하고 있었던 지족암의 지족선사를 유혹해서 파계시킨 일도 있었고 조선 최고의 훈남이자 풍류라 자타가 공인했던 벽계수라는 사람을 시조 한 수로 무너뜨린 일화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벽계수라는 사람은 왕실의 종친인데 평소에 황진이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는 말을 자주 해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황진이를 직접 대면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호언해 온 터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황진이는 벽계수를 한번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고 그가 자주 다닌다는 만월대에서 소복차림으로 기다리며 거문고를 뜯고 있었던 것이죠 때마침 나귀를 타고 지나던 벽계수는 소복차림의 여인네가 정자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시조를 읊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그 싯귀의 내용이 마치 자신을 두고 조롱하는 듯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달 빛 아래 비쳐진 그녀의 자태와 절묘한 시조 한 수에 당대 최고의 풍류라 자처해 왔던 천하의 벽계수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벽계수란 본래 계곡을 흐르는 맑고 푸른 물을 뜻하는 말이지만 공교롭게도 한 사내의 이름이기도 했으며 명월이라는 표현은 황진이의 기명(기생으로서의 이름)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명월이 만공산 할적에 쉬어감이 어떠리"라는 표현은 황진이 자신의 존재가 지금 이렇게 환하게 빛나고 있으니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지않겠느냐고 조롱하듯 던진 말입니다 벽계수는 결국 자신이 풍류남아 로서 호기롭게 언급한 표현들이 쓸데없는 객기에서 비롯된 잘못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밖에 소세양이라는 사람과 30일 간의 동침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소세양이라는 사람이, 자신은 황진이와 한 달 동안만 동침한다면 후에 능히 헤어질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황진이의 봉별 소세양이라는 시에 마음을 빼앗겨 결국 떠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봉별 소판서 세양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우리역사에서는 황진이, 박연폭포, 서경덕을 두고 송도삼절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황진이가 수많은 사내들을 무너뜨렸어도 단 한사람, 요지부동이었던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대 최고의 석학이라 불리워졌던 화담 서경덕 선생입니다 서경덕은 정계를 떠나 은둔하고 있었는데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된 황진이가 평생 마음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기다리는 마음으로 쓴 시조입니다 어리다ㅡ어리석다 내 언제 무신하여 이 글은 황진이가 서경덕의 시조에 답을 했던 답시입니다 해설 황진이가 죽은 후에도 고인의 기예와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조선 선조때 임제라는 사람이 평안도 도사직을 제수받고 임지로 가는 길에 송도(개성)에 들러 황진이의 무덤에 찾아가 고인을 추모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조가 있어 한 수 소개해 봅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해설 임제의 이러한 행동이 그후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중신들이 벼슬에 있는 사람이 일개 기생의 무덤에 찾아가 슬픔의 눈물을 보이고 글을 지어 올린 행동은 위신과 체통을 저버리고 추태를 보인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이는 그대로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라고 하여 탄핵을 올렸고 결국 파직되어 벼슬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황진이ㅡ cafeapp, 황진이 노래ㅡ cafeapp KBS드라마ㅡ 황진이ㅡ
1회~관람 https://youtu.be/EfahE-1sal0 가락지ㅡ cafeapp 가락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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