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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방수 1959년 기해년 추석날 사라호 태풍을 만나다.
전국 사망자 924명
하청 고등학교 다닐때의 추억이다. 경북 구룡포에서 사시다가 거제도로 이사 오셨던 양 응연(梁 應年 : 1915년 乙卯年 陰曆 11월 5일 -2000년 庚辰年 음력 4월 26일. 양력 5월 29일) 큰 고모님의 딸이신 李 貞子(이 정자 : 1937년 丁丑年 음력 11월 2일 생)누님께서 오셔서 추석 준비를 하면서, 누님과 둘이서 큰방에서 같이 있으면서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추석 전날 저녁부터 내리던 비바람이 밤새껏 쏟아 붓다싶이 하였다. 추석날 아침 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바다에 닻을 내린 배들이 출렁이면서 뭍으로 비 바람에 밀려들자, 뒷집 김 정용군의 모친께서 김 황수군의 집 앞 바닷가에 서서 떠 밀리는 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 보시기에 같이 보다가 파도가 도로를 덮치자 파도를 피해 집으로 들어 올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산 더미같은 태풍이 동네로 몰아치자 미처 바다로 빠져 나가야할 빗물이 동네로 역류하자 바닷물과 빗물이 합쳐서 온 동네는 물바다가 되었다. 물이 마당에 차올라 마루를 넘고, 방안으로 들어 올려고 물이 넘실 넘실 올라 오는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에 젖지 말아야 하는 물건들은 대충 농위에 올리고, 피난 갈 준비를 하였다.
순식간에 물이 동네를 덮치자, 동네 사람들은 모든것을 포기하고, 산쪽으로 男女老少 가리지 않고, 피난을 간다고 집집 마다 아우성이였다. 우리 집은 올망졸망 딸린 식구가 많았다. 호보가 11살, 선애가 9살. 호덕이가 6살, 영숙이가 4살, 호동이가 갓 태어나, 애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신해야한다고, 새어머님(37살)께서 호동이를 엎고, 나는 영숙이를 엎고, 애들을 데리고, 집을 빠져나가자, 누군가가 물이 빠진다 ~ 하고 소리를 쳐 영숙이를 업고, 도로 집으로 들어 오자 차츰 차츰 물이 빠지기 시작 했지만, 마당에는 흙탕물에 별라별 쓰레기가 둥둥 떠 다녔고, 전날 만든 추석 음식은 모두 떠 내려 가버리고, 마당 곳곳에는 똥떵어리도 둥둥 떠 다니고, 돼지도 꿀꿀대며 살려고 애쓰고, 강아지들도 헤엄을 치고, 살길을 찾았다. 닭들도 물위를 파닥거리며 날아 다니면서, 사투를 벌렸다,
18세 때의 사진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온 동네가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날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시루성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급히 오셔서, 지붕위를 올라 가셔서 새끼줄로 지붕을 얽어 맬려고 올라가시자. 바람이 어찌나 쎈지 날라가 버릴 것 같았지만, 할아버님께서 정말 탄탄하게 지붕을 잘 매시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그때 할아버지(71세)의 모습에서 강인한 의지를 배웠다. 그런데 벌써 내 나이가 71살이다. 참 세월은 유수와 같이 빠르고 빠르다. 그리고 허무하다.
그러나 지붕을 미처 단속 못한 집들은 지붕이 거의 날아가 버렸다. 당시 형님은 부산 대학교 의과대학을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이 없어 포기 하고, 만학의 꿈을 포기 하지 않고,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서울로 가고 없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삼촌은 군에 입대하여 동두천 미 7사단에서 현역으로 근무하였고, 그때 집안 기둥이 돼셔야 할, 아버지께서는 구룡포에서 내려 오셨다고 생각 되지만 어디서 무얼하셨는지 모습을 볼수가 없었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의 관포 주민들은 강씨, 김씨, 박씨, 반씨, 배씨, 서씨 이씨, 양씨, 우씨, 정씨, 조씨. 하씨. 황씨,가 뿌리를 내리고, 살았었다. 이 사라호 태풍으로 전국 태풍 피해 사망자가 924명으로 아버지를 혹은 어머님을 잃은 가족이 너무나 많았다. 평생을 그 아픔으로 살아가는 사람중에 우리 집안에는 장목 청자 고모님의 큰 사위가 가족을 모두 잃었고, 막내 정애 남편의 아버님을 잃었다.
하청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사진으로 하청에서 걸어서 집으로 올때 월광사진관 고모님댁에 인사차 들렸다가 촬영했다.
방과후 한재운 고모부님께서 카메라 사진을 급하게 현상을 해야 하기때문에 필림이 남았다며 촬영해 주신 사진이다.
셋째 고모님부님께서 일찍히 일본으로 건너가 東京(동경) 오리엔탈 사진 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귀국하셔서 큰나큰 배(내가 어렸을때 그 배는 크나큰 화물선으로 기억됨)를 가지고 사업에 뛰어 들었으나, 1950년도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에 사업에 실패후 한동안 손근수 우리동네 어른과 함께 술로 마음을 달래시다가 어떤 영문인지 두분께서 예수교 장로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면서 술도 끓으시고 두분께서 장노로 평생을 봉직하시면서 살았다. 처음 송진포에서 사진관을 경영하시다가 장목 동구로 이전하시고 거제에서 제일 사진 잘 찍는다는 평판이나서 장목국민학교 장목중학교를 다닐때 많이 도와 드렸다. 인화지를 사러 마산 신부름도 많이 다녔다.
그리고 가을 결혼식 사진이 겹치면 카메라를 주시면서 출장 사진 촬영을 부탁하셔서 참으로 많이 도와 드렸던 추억이 생각나면서 그때의 추억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다니는 어린 나이에 고모부님께서 술에 만취가 되어 걸음을 잘 걷지도 못하시는 분을 부축하여 장목에서 송진포까지 같이 가면서 부축하면서 나와함께 길가 고랑텅이에 넘어지기가 일쑤였고, 겨우 겨우 새벽에 송진포 집에 도착하면 고모님께서는 잠도 못 주무시면서 기달리셨다가 얼굴에 상처 투성이셨던 곳에 빨간 아까징끼라는 소독약을 발라 주시던 고모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리고 밤에 귀가 못한 나에게 고모님댁에서 자고 아침 얻어 먹고 오면 하루가 갔다.
그때 부산에서 남성여고를 다니시던 숙자 누님이 두웅(斗雄:1933년 癸酉年(계유년) 7월 5일생]이 아저씨 집 앞에서 쩔쩔매며 걸어 가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생각 난다. 숙자 누님(1940년 庚辰年(경진년) 5월 10일생)은 나보다 한살이 더 많았다. 한살 많은 누님이셨지만 누님 노릇을 톡톡히 해 주셨다. 추석때 연극을 할때의 의상인 원피스와 구두, 시계, 핸드빽, 심지어 모자까지 빌려 주었고, 분장까지 해 주었다.
우리집에 발틀이 고장나면 손 자봉틀을 빌려 주기도 했다. 그때 숙자 누님의 모습이다. 꿈 많던 남성여고 시절의 사진을 주어 지금까지 愛之重之(애지중지) 소중이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누님이 빌려 주어 장소팔, 고춘자, 대역을 하면서 촬영한 사진도 있다. 지금은 秋夕(추석)이라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演劇(연극)따위를 한다해도 아무도 오지를 않겠지만 그때는 이웃 마을 두모, 대금, 율천, 등밑에, 궁농, 농소, 유호마을 사람들도 구경을 하러 왔었다. 그래서 관포 洞舍(동사)는 만원이였다. 그때의 사진을 남긴다.
2020年 9月 4日 金曜日 아들과 孫子의 모습(美國 LA)에서 !!!
2020年 9月 4日 金曜日 孫女의 모습(美國 LA 海邊街 白沙場)에서 !!!
남성여고 시절의 숙자 누님~ 고춘자역을 분장해 주신 숙자 누님의 소품으로 단장하고 연극하던 필자의 모습.
1958년 양력 9월 27일 (음력 추석날)
뒷줄:강양명,김정용,김호근,양방수(필자).황수복, ~ 앞줄:황상근,양학윤,양종아,황광용.추복부.
秋夕(추석)演劇(연극)公演(공연)
http://blog.daum.net/bangyang/3566
참고문헌~해일(海溢)은 바다에서 높은 파도태풍이나 저기압 등에 의해 생기는 것을 폭풍 해일, 지진이나 화산 활동 등에 의해 생기는 것을 지진 해일얼음 해일검조의1088년에 처음으로 《증보문헌비고》에 해일이 기록되어있고, 《조선왕조실록》
태풍이 일어나기전의 관포 어업조합 앞의 선창으로 사진은 장목에서 월광 사진관을 하시던 한 재운 고숙부님께서 촬영한 사진이다..
怒濤(노도)와 같이 불던 사라호 颱風이 사그라들때 冠浦 漁業組合 밖앗 선창을 촬영한 長木 月光 寫眞館 韓載雲 姑叔父님의 寫眞.
가운데 검은 양복을 입은 양 종식 아저씨가 걸어 오고있고, 황 광용군의 부친 황 경구 아저씨도 검은 옷을 입고 보인다.
재주가 많았고, 꿈이 많았고 야망이 많으셨던 종식이 아저씨가 살았더라면 우리도 많은 발전을 했으리라 생각하면서 평생
아쉬움이 지금도 남는다. 부산대학교 정치외교과를 다니셨던 거제에서 총망받으시던 인물이셨다. 아쉽기만하다.
관포 어업조합앞 선창, ~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중 ! 제일 앞쪽이 지금 뉴욕에 사는 양 두분이 고모님 세째 아들 김 인수 같다.
좌측 건물이 관포 어업조합의 모습이다. 우측은 어업조합 관사.
쓰레기장으로 변한 관포마을 바닷가의 모습.
어업조합 사택이 전부 날아가 버린 모습.
여기 하 원택씨 집 뿐만 아니라, 김 황수군, 김 윤조씨(김 호근)댁도 담이 무너져,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렸다. 바닷가에 위치한 집들은이렇게 난장판이 되어 버렸고,심지어 아랫동네는 먹을 곡식을 꺼내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 죽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 시대에 있었던 뼈아픈 옛 추억이다.
관포나 두모실이나 어디를 가더래도 땔감으로 나무를 베어 산천초목은 헐벗었고 땔감을 하러 이목 도청골까지 가서 하루종일 땔감을 줏든지 끌어 모우든지 하여 지개에 매고 어깨가 빠지도록 땔감을 저 날랐던 우리 시절의 추억이고 삶이였다.아래 관포 어업조합이 있었던 뒷산은 벌거벗은 민둥산이다. 지금은 수풀이 우거져 재넘어 공동묘지에 산소를 찾을길이 없을 정도로 수풀이 우거졌지만 그 당시에는 벌거숭이 민둥산이였다.
비가 오면 온 동네가 뻘판이되어 고무신이나 나막신을 신고 뻘투성이 길을 겨우 겨우 피해 이웃이나 바닷가를 왕래 하였던 추억이 사라지기는 박 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사업으로 농촌에도 연탄이 배달되고 보일러가 설치되어 모처럼 고향을 가게되면 겨울철 추위를 잊고 살았다. 사립문이 없던 민심은 이제는 영영 찾아 볼수없고 일가간의 우애나 화합도 기대하기가 힘든 각박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미국에 이웃 흑인 보다도 못한 민심으로 변해버린 고향은 잊어 버리고 내가 사는곳이 조국이되고 죽어 묻힐 산소가 있어 永眠(영면)하리라 ~
1962년에 필자가 촬영한 장목에서 관포로 넘어가는 마을 풍경
1988년에 필자가 촬영한 장목에서 관포로 넘어가는 마을 풍경
2008년 장목에서 관포로 넘어가는 마을 풍경
자녀들에게는 正體性(정체성)을 잃지 않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뿌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故鄕(고향)을 자주 방문 하였다. 西小門(서소문) 양씨중앙종친회에서 行列(항렬)을 모르고 조상 이름 석자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者(자)를 보고, 부산 동래출신 국회의원 양극필 宗親(종친)은 만날때마다 하도 답답해서 돌파리 양가 왔냐?!고 조롱하다 싶이 해서 이것은 아니다 싶어 뒤늦게 문양공 후손 중에 實學(실학)을 제대로 공부 하신 80대의 老人(노인)의 實力(실력)에 感動(감동)하여 實學(실학)을 공부 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가슴이 저미는 嗚咽(오열)을 느끼면서, 우리는 조국과 부모를 선택할 권리나 자유가 분명히 없다는 眞理(진리) 앞에 무름을 꿇고 晝耕夜讀(주경야독)하면서 살아 오면서 오늘 이 자료를 정리 해본다.
1980년11월23일 거제도 고향 거남사(巨南祀) 처해당(處海堂)준공식 참석.
1983년 8월 1일-2-3-4-5일 거제도 고향방문.
1983년11월20일 거제도 거남사 時祭(시제) 참석.
1987년 1월 4일 6촌 동생 양 진생 부산 파레스 호텔에서 결혼을 마치고, 1월 5-6일 고향방문.
1988년 11월22-25일 거제도 거남사 時祭(시제) 참석,
2008년 3월 말경 어머님과 여동생이 묻인 관포 공동묘지와 조부모님이 묻힌 장목 공동묘지 참배
이제는 고향을 찾아 간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 SNS를 통해 잠시 고향산천을 정리해 본다.
새마을 사업 운동으로 변한 2008년경의 관포 마을 바닷가의 풍경
등밑 위에 있던 양기생이네 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진 모습으로 변했다. 산에는 숲이 우거져 관포 공동산으로 석묘하러 가기가 힘들어 수년동안 주민들을 설득하여 양명생 형님의 노력으로 자동차가 들어 가도록 길을 만들어 두어 2008년 3월에는 어머님 산소를 자동차로 쉽게 갈수가 있었다. 거가대교가 생겨 이제는 거제도가 관광지로 변했다. 땅값도 덩달아 치솟았다. 거제군이 7만의 인구가 255,828 명으로 거제시로 탈바꿈했다.
거제시는 서쪽으로 통영시와 신거제대교로 연결되어 있고, 북동쪽으로 부산광역시 가덕도와 거가대로로 연결되며, 북쪽 해안은 진해만과 접한다. 1971년 거제대교가 개통되어 육지와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등 대기업의 조선소가 입주해 조선업이 발달하였다.
새마을 운동(新鄕村 運動, 영어: Saemaul Undong, New Community Movement, New Village Movement, Saemaul Movement)으로 1970년 초부터 대한민국 농어촌이 현대화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박정희 대통령 정부 주도로 시행된 범국가적 운동) 지역사회 개발운동으로 관포 마을도 변해 가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 계획자는 농업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이다.
이 운동은 박정희 정부에 의해 1969년 새마을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1973년 1월 16일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1972년 1월 31일 경기도 고양의 농협대학 부설 독농가연수원에 각 지역에서 선발한 140명이 입교했다. 새마을지도자 교육과정의 출발이었다. 2주 간의 교육과정은 가나안농군학교(교장 김용기)와 안양 농민교육원(원장 김일주)의 훈련 과정을 참고해 만들었다. 농협대 김준 교수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교육 받을 사람이 늘면서 그해 경기도 수원의 농민회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교육은 성공한 새마을지도자의 경험을 듣고 그 사례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975년에는 새마을지도자와 사회 지도층, 공무원이 함께 합숙교육을 받으면서 상승 효과가 났다.
저 멀리 내고향 거제섬이 보인다
鎭海쪽에서 바라본 巨濟島 全景
진해구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은 부산광역시 강서구와 북쪽은 성산구 · 김해시와 접하고, 서쪽은 마산만을 사이에 두고 마산합포구와 마주하며, 남쪽은 진해만을 사이에 두고 거제시와 마주한다. 한국 전쟁 당시 1950년부터 한국군과 UN군의 해군기지로 사용되면서 대한민국 해군의 중심기지로 자리잡았다. 진해항은 대한민국 해군의 모항이고, 해군사관학교와 여러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으며, 군항도시와 벚꽃축제로 유명하다.위키백과
저 멀리 거제섬이 까마득히 보인다.
거가대교 의 전경
故鄕(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란곳으로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곳이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고향이라면 또 다른 마음속에 숨길수 없는 葛藤(갈등)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고향은 우리와 끓을수 없는 相互間(상호간) 깊은 因緣(인연)이 여기에 있다.
故鄕山川(고향산천)에는 祖上(조상)의 얼과 뼈가 묻힌 先山(선산)이 있고 또한 精神文化(정신문화) 遺産(유산)의 根幹(근간)을 이루는 삶의 根本(근본)이 고향에 있어 고향에서 그것을 배우고 자랐기 때문이다.
巨加大橋(거가대교) 全景(전경)
거가대교(巨加大橋)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에서 가덕도와 죽도, 저도를 거쳐 거제시 장목면을 잇는 다리이다. 2010년 12월 13일에 개통되었으며, 총길이 3.5km의 2개의 사장교 와 3.7km의 침매터널, 총길이 1km의 2개의 육상터널로 이루어져 총 길이는 8.2km에 달한다.
구조는 사장교로 길이는 3.5Km로 길이3.5km, 너비 4차로, 20.5m,이며, 2004년 12월 10일에 착공하여 2010년 12월 13일 완공하고 2010년 12월 13일에 개통했다. 위치는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으로 연결된다. 1994년에 김영삼 대통령 당시 공약으로 사업계획 실시하여 사업명은 '거제~부산 간 연결도로' 2010년 12월 14일 부터 일반에 대해 무료통행 개시하다가 2011년 1월 1일부터 통행요금을 10,000원으로 책정 하였다.
거가 대교를 따라 "동백 아가씨"를 들으며 거제도를 달려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XSA5wNCgo
<동백아가씨〉는 1964년 이미자가 부른 대한민국의 트로트 곡이다. 발표 당시의 기록적인 인기와 함께 금지곡으로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사연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작곡자는 백영호, 작사자는 한산도(한종명)이다. 1964년 제작된 엄앵란과 신성일 주연의 동명 영화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져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했다. 당시 이미자는 〈열아홉 순정〉으로 이름을 알린 신인급 가수였는데, 이 곡이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어 ‘엘레지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미자의 수백 곡에 달하는 히트곡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인기를 누린 대표곡이 되었다. 나중에 작곡가 백영호선생이 죽고나서 아들 백경권 씨는 "음반 제작 당시 '동백아가씨'라는 제목이 촌스럽다고 레코드사에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부친께서는 직접 레코드판을 들고 다방이나 음악감상실을 찾아 홍보활동을 벌였다"고 백영호 추모 강연회에서 동백아가씨의 비밀 이야기를 밝혔다.
영화 《동백아가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인연을 맺은 섬처녀가 버림받고 술집에서 일하게 된다는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내용이다. 동백아가씨라는 제목은 여주인공이 ‘동백빠아’에서 일하는 여급이 된데서 유래했다. 주제가 음반 뒷면에 첫 번째로 실린 이 노래의 가사는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칠 때까지’ 연인을 기다리는 여성 화자의 서글픈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여인의 깊은 한과 애상적인 느낌을 잘 표현한 이미자의 노래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100만장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공전의 인기를 끌었으나, 이후 노래가 일본풍이라는문제 제기와 함께 금지곡으로 전격 지정되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으로 묶인데 대해서는 당시 일각의 반대 속에 강행된 한일기본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정치적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주류이다. 독재 정권(박정희) 시대였기에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의 빨갛다는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른 이미자는 후에 경쟁 음반회사의 입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던 동안에도 입에서 입으로 널리 불린 노래였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되어 20여 년 만에 다시 공식적으로 부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2006년 문화방송이 《2006 대한민국 가요대제전》을 위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최신 히트곡이었던 장윤정의 〈어머나〉의 뒤를 이어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요 100선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巨加大橋(거가대교)
이곳에서 부산 46Km 가덕까지는 8Km 里程標(이정표)가 있는 곳이다.
아래를 크릭하면 가덕도에서 바라보는 거제섬이 아련히 나타난다.
巨加大橋가 생겨 이제 배타고 故鄕가는 일 없어졌다. 꿈이 현실로 돌아왔다. 故鄕 山川에서 자란 이야기 아래 파란 영문자를 크릭 하세요~
http://blog.daum.net/bangyang/647
1980년 관포리 마을 전경
2008년 관포리 마을 전경
진달래 축제가 한창인 봄날 대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관포마을 앞바다의 시원한 모습 巨濟市 長木面 冠浦里 마을 梁 芳秀 提供
2008년 관포리 마을 전경
어릴때에 수영하던 관포 바다로 등밑을 지나 신촌 쪽에서 바라본 관포 마을 전경
어릴때에 수영하며 놀던 추억 어린 곳으로 닭섬 입구쪽에서 달섬을 바라본 닭섬전경
어릴때 수영하던 닭섬에서 바라본 옛 어업조합이 있던 장소에 세워진 거제수협의 전경
어릴때에 수영하던 곳이다. 신촌쪽에서 바라본 관포 등밑에의 전경으로 1960년경에는 이렇게 많은 숲이 없었다.
거제도는 삼한시대는 변한의 12개국 중 독로국이라고 불리었다고 茶山 丁若鏞의 기록은 있다고 하나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 못하고 있고, 史學家 李丙燾는 아니라고 한다. 그 실례로 거제 장목진 객사 설치년도를 두고도 너무 엉뚱한 주장을 해서 필자가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 크릭 하면 그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다음 크릭 - http://blog.daum.net/bangyang/2087
신라 법흥왕 7년에 소가야국으로 개칭하였고. 532년 법흥왕 19년에는 금관가야의 일부가 되었고, 677년 문무왕 17년에 상군(裳郡)이라고 칭했다가 757년 경덕왕 16년에 이르러 巨濟郡(거제군)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983년 고려 성종 2년에는 기성현으로 칭해졌다. 고려 의종은 정중부의 난으로 인해 현 둔덕면 거림리 산 95번지 일대의 둔덕기성(폐왕성)에 유폐되었으며, 이 유적지는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8월 24일에는 사적 509호로 지정되었다. 1271년(고려 원종 12년) 왜구의 침탈로 거제현민들이 북쪽의 진주와 거창 등지로 옮기고, 거제현의 치소(治所)도 거창현 동부의 가조(加祚)로 피난하였다.
1414년(조선 태종 14년)에는 거창현과 거제현을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으로 하였다가 1년 후에 다시 쪼개었고, 1422년(조선 세종 4년)에 현이 거제도로 돌아와 거제읍성(현 고현성) 등을 축성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고현성이 함락되었고, 한산해전과 칠천량해전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1663년(조선 현종 4년)에 현청을 현재의 거제면으로 이전하였고, 1895년 고종 때 거제군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거제는 유배지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 이행, 이유원 등이 유배되었고 이행(李荇)은 29세 때 거제도 고절령(고자산치) 아래에 위리안치 되어 관노의 신분으로 120여수의 시를 지어 거제유배 역사상 가장 많은 시를 남겼다.
1914년 4월 1일 거제군과 용남군이 통영군으로 통합되었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에 의해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 장평동,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포로수용소가 지어졌다. 이들 전쟁 포로는 1953년 5월 3일 이후 송환되거나 같은 해 6월 18일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으로 탈출하였다. 수용소는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폐쇄되었다. 한편 흥남 철수로 인해 많은 피난민이 들어왔다.
전설의 고향
http://www.dailymotion.com/video/x3kxjsk
영상실록 - 1978년 1979년
https://www.youtube.com/watch?v=Z8kh-14guA4
https://www.youtube.com/watch?v=Fuaz15IarSg
KBS광복60주년특별기획영상실록,
https://www.youtube.com/watch?v=-E-rH4pyoek
남원양씨 병부공파 거제문중 30세손 양 방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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