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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의 시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막이 오르면 한 시인이 무대에 올라 ‘천년의 대성당 시대와 필연적인 몰락’을 노래한다. 작게 보면 15세기 말 파리, 한 집시 여인(에스메랄다)을 두고, 그 여인을 지배하려는 부주교(프롤로)와 그의 보살핌으로 자라난 꼽추(콰지모도) 사이에 벌어지는 치정 이야기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대성당 시대의 추악한 권위와 이에 대별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대성당 권위의 추락은 역설적으로 대성당 시대 천년으로 인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숭배와 절대화는 그 자체로 모순
권위에 부여된 본 취지 되새겨야
법도 인권·존엄성 해쳐선 안 돼
신의 명령에 의해 모든 것이 생겨났음은 물론 해를 멈추게도 하고 달과 별이 저 허공에 떠서 빛나게 하는 것도 모두 신의 의지였다. 끔찍한 외모의 꼽추와 부랑자들이 어울려 다니며 신심을 어지럽히는 것은 추방돼야 마땅한 일들이었다. 자신을 속일지언정 거룩한 신의 섭리를 대리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저항하는 일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우주는 신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무대로,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 것은 신이 지정한 진리였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망원경으로 금성의 모양이 달처럼 변하는 것과, 목성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한 갈릴레이는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 우리가 아닌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 지구도 다른 행성들과 같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일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이었을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조차 사제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의 섭리는 무엇이었을까. 대성당의 시대가 몰락한 것은 결국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사제들의 부패와 타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신심이 열렬하던 사제들까지 타락하게 한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권위에 대한 ‘숭배’와 ‘절대화’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정작 그만한 권위가 부여된 근본적인 취지와 동기에 대해서 근원적인 주객의 전도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유대 사제들의 율법 절대화에 죽기까지 저항한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저주와 단죄 심지어 전쟁까지도 서슴지 않은 교회가 있었다.
절대적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물리학 법칙도 예외가 아니다. 과학 자체가 철석같이 믿던 진리에 대한 도전으로 성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상을 법칙에 맞추려는 일은 빈번하다.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난 현상을 보면서도 어떤 ‘법칙’의 권위에 의존하여 그 현상을 부정하는 일이 일어난다. 아인슈타인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팽창하는 우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시작’이 있어야 하는 ‘비상식적’인 결론을 초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우주항’이라고 하는 특별한 가설까지 도입했다. 자연이 물리학 법칙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물리학 법칙이 자연을 기술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너무나도 자명한 일을 놓고도 우리는 ‘법칙’이라는 기존의 권위에 집착하기에 십상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진리’와 ‘비진리’ 그리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진리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지만, ‘이것만이 진리’라는 절대적인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비진리’임이 명백하다.
대성당의 시대가 그러했듯 그것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취지와 동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법과 원칙’ 위에 군림하는 그 어떤 특정인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나, 혹시라도 정작 그것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인권’과 ‘존엄성’이라는 대의가 위협받게 된다면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무엇이든 독점되고 절대화할수록 몰락한 대성당의 전철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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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의 꼽추 - 대성당들의 시대, 욕망과 폭력
작성자jamesha|작성시간23.04.05|조회수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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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파리.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 인간의 추악하고 잔인한 본성이 가감 없이 드러나던 시대. 대성당의 주교지만 괴물의 내면을 지닌 프롤로와 미천한 종지기에 꼽추지만 진실한 내면을 지닌 콰지모도의 극명한 대비는 인간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는 15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사랑과 구원의 문제를 그러낸다. 콰지모도를 떠올릴 때 누군가는 안소니 퀸을 떠올릴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 몇몇 독자들은 붉은 곱슬머리로 노래를 하는 뮤지컬 속 배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콰지모도(Quasimodo)’라는 말은 대개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부활절 다음의 첫 일요일’이라는 뜻도 있고, ‘대충 생기다 만 것’이라는 뜻도 있다. 콰지모도가 성당 앞에 버려진 날이 부활절 다음의 첫 주일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보면서 ‘반만 인간’이라는 뜻을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콰지모도는 척추 기형으로 허리가 많이 굽었을 뿐만 아니라 무사마귀가 눈을 뒤덮고 있어 애꾸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성당의 종지기로 일하면서 고막이 터져 바깥 세계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해 혀까지 아둔해졌다. 그러면서 외부 출입을 꺼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괴물’이라고 한 것은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다. 근엄한 프롤로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모습은, 그래서 빛과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실은 누가 빛이고 누가 그림자인지 다시 물을 수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프롤로의 양면일 수도 있으리라.
‘괴물’의 사랑, 그리고 구원
때는 바야흐로 1482년, 백년전쟁과 페스트까지 거치면서 흉흉해진 민심을 축제와 마녀사냥으로 메우며 성당이 권위를 이어가던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성가극을 뒤로 한채 ‘광인의 교황’을 뽑아보자는 즉흥적인 놀이를 했는데 축제의 분위기가 익어갈수록 점점 쾌활함을 가장한 채 잔악하고 가학적인 욕망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축제 구경을 나온 콰지모도가 ‘광인의 교황’으로 뽑힌다. 누군가는 ‘난생처음 보는 괴물’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귀머거리’라고 거들기까지 했으며 ‘교황’으로 손색이 없다고 조롱에 조롱을 잇대었다. 콰지모도를 향한 조롱인지, 교황의 권력을 향한 분노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콰지모도는 어찌됐든 희생양이 돼 뭇사람들의 조롱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축제에서 ‘광인의 교황’보다 더한 시선을 끄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집트의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였다. 시인 그렝구와르가 에스메랄다를 본 순간 여신의 재림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에스메랄다를 본 이들은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다. 심지어 노트르담 성당의 신부인 프롤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롤로는 자기 욕망이 사탄의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콰지모도를 대동한 채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실패해서 현장에서 발각된 콰지모도에게 죄를 모두 뒤집어씌웠으며, 또 페뷔스 대장을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 있던 에스메랄다가 혐의를 뒤집어쓴 채 감옥에 갇히게 한다. 프롤로가 자기 욕망을 사랑이라고 우기는 순간,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 모두 파괴됐다. 폭력, 그 이상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첫 만남은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조차 흔히 보기 어려운 장면을 연출했다. 콰지모도가 모진 형벌 속에 지쳐 가면서 ‘물 한 모금’을 외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선뜻 물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군중들 사이에서 에스메랄다는 안타까운 듯 물을 건네주었다. 콰지모도가 유일하게 선의를 느낀 순간이었다. 자신의 흉측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준 유일한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중세시대가 부패할 대로 부패한 모습을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서사화한다. 하늘을 찌를 듯 드높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 안에서는 어떤 기괴한 욕망이 싹트고 있는가. 아마도 그 속에는 반만 인간인 괴물과 괴물이 돼 가는 신부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썩어 가는 ‘대성당들의 시대’가 수많은 이교도들을 양산한 채 대립하는 시대, 그 속에서 결국 ‘마녀’라는 희생양을 버팀목 삼아 연명하던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이 속에서 시민들은 강퍅해질 대로 강퍅해져서 혐오와 증오의 가학적 표현이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괴물과 광인들의 시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외모가 흉측한 콰지모도가 괴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프롤로가 품고 있는 루시퍼의 모습은 누가 괴물인지 되묻게 한다. 노트르담 성당이 품고 있는 괴물은 그러므로 프롤로일지도 모르겠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부르고 있는 것처럼, ‘대성당들의 시대’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위고는 이를 카니발 형식으로 재연한다. 성스러운 것과 비속한 것, 괴물과 괴물이 아닌 것이 뒤섞이는 난장이다. 그 속에서 누가 괴물이고 누가 성스러운지, 누가 이교도이고 누가 신의 뜻을 따르는지에 대한 문제까지 드러낸다. 이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바로 이들의 구원받고 싶은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로 기능한다.
‘노트르담’이라는 말이 ‘성모’라는 것은 감안하면, 에스메랄다의 등장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실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는 출생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원래 집시의 아이로 태어난 자가 콰지모도지만, 그 흉측함으로 집시들은 에스메랄다와 뒤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노트르담 성당 안쪽에 각인된 ‘운명’이라는 글자는 이들의 뒤바뀐 삶, 그리고 성스러움과 비속함이 그 경계를 잃은 사건을 암시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프롤로, 콰지모도, 에스메랄다 모두 죽음을 맞는다. 또 이 속에서 또 다른 세기를 맞이하는 위해 수많은 난장과 카니발의 시간이 도래하게 된다. 이 시간들을 관통하는 가운데, 누군가는 ‘마녀’ 사냥으로 죽어 가는 권력을 붙드는 이가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새벽의 빛을 맞이하기 위해 다른 ‘말’과 ‘감성’을 찾으려는 이가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꼽추’와 ‘마녀’로 지목됐지만, ‘구원’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 바로 이들이 또 다른 시대의 길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