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42
『몇 살인고?』
『스물이옵니다.』
나이를 물은 노승이 문득 대방에게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온통 인분이 묻어 끈적끈적한 더러운 손이었다.
『삼가 더러운 꼭두(허수아비)가 부처님께 공양하나이다.』
대방이 서슴없이 그 손위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린다는 의미였다. 노승의 눈이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연기(緣起)의 법을 일러라.』
대방이 깊이 허리 숙이고 나서 노래하듯 운율에 맞추어 읊기
시작했다.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공(空) 중에 어디 생(生)이 있으며 멸
(滅)이 있고, 더러움이 있으며 깨끗함이 있고, 늘어남이 있으며
줄어듦이 있을 것인가...』
읊조리는 중에 태연히 걸음을 옮기던 그가 덥석 공지를 부둥켜
안아 버렸다.
『공(空) 가운데 색(色)이 없어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없으니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또한 없구나.』
노래하면서도 노승의 더러운 볼에 볼을 비비고, 부둥켜안은 팔
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니 이제는 대방도 노승과 마찬가지로 더러
운 인분을 온통 나누어 칠한 꼴이 되었다. 그것을 보던 원초가
합장하고 장엄하게 금강경(金剛經) 중의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世尊, 如來不應以具足色身見...』
대방은 이제 노승을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육근(六根), 육진(六塵)이 이미 없으니 안계(眼界) 없이 의식
계(意識界)까지 없어라...』
노래에 도취되어 자신을 잊고 노승을 잊었으며 인분의 더러움
도 벌써 잊은 듯한 대방이었다. 그의 낭랑한 가락이 매화나무 숲
을 흔들고 소실봉 너머의 청청한 가을 하늘을 향해 우르르 달려
올라갔다.
『그러므로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에 있어 무명(無明)이 없으
니 이는 없음(無) 또한 없음이라!』
『......』
노승의 안색이 침중한 중에 은은한 서기를 띄고 빛나기 시작했
다.
도취의 황홀경에서 묘법일여(妙法一如)의 무아독보(無我獨步)
를 거닐던 대방이 문득 무릎을 꿇었다.
『어둡고 더러움을 이미 함께 했으니, 이제 광명(光明) 또한 그
와 같이 하기 원하나이다.』
그것을 바라보던 노승이 길게 탄식하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
다.
『하, 먼저 놈은 너무 미련하더니, 나중 놈은 너무 영악하다.』
지그시 대방을 노려보던 노승이 한참 만에야 씁쓸한 미소를 띄
었다.
『극상품은 아니로되 차상(次上)은 되니... 노납의 인연이 이것
뿐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로다. 방장께서는 이만 돌아가도 좋
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원초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과 함
께 희열이 가득 떠올랐다. 깊이 예를 올리고 돌아서 매화림 속으
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노승이 길게 탄식했다.
『아, 인연을 기다리며 두꺼비처럼 엎드려 있기 이십 사 년. 노
납의 천수 다 되어 열반에 들 때가 된 지금에야 비로소 인연이
이것 밖에 되지 않음을 깨닫다니... 어리석구나, 어리석구나, 공
지여...』
그 날 이후, 노승과 나란히 매화림의 모옥에 든 젊은 승인은
영영 그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듯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
다.
채마밭에서 청무와 호배추는 덧없이 서리를 맞아 시들어 갔고,
눈가에 한 가닥 우수를 띈 아름다운 여인만이 어쩌다 아련한 환
상 속에 하강한 신녀(神女)인 듯 매화 숲을 서성일 뿐이었다.
매화나무 가지에 팔을 얹고, 겨울이 다가오는 먼 하늘을 바라
보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스며 나오곤 했다.
<2>
이틀 전에 첫눈이 내렸다.
산하를 온통 희게 채색한 그것이 석양빛을 받아 더욱 고운 빛
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쳇, 엉터리 땡중놈들. 겁이 나면 겁이 난다고 솔직히 털어놓
을 것이지 뭐? 얼마 전부터 비무를 금하고 있다고?』
텅 빈 소림사의 외원(外園) 한 가운데에 수령이 천 년은 되었
음직한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지마다 흰 눈을 이고 묵묵
히 서 있었다. 그 아래, 나무 둥치를 툭툭 차며 분한 듯 숨을 몰
아 쉬고 있는 거친 사내는 육초량이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소림에 찾아와 비무를 요청했지만 그 때마
다 번번이 거절당하기만 했다. 외부에서 비무를 청해오는 자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받아주던 소림이었다. 일체의 무사(武事)
를 관장하고 있는 나한전(羅漢殿)의 수좌(首座) 원상(元常)은 길
길이 날뛰는 육초량에게 따뜻한 곡차 한 잔을 대접했을 뿐, 끝내
시합을 허락하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난동을 부려?)
그렇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것은 무도를 좇는 수행자로서 할
바가 못 되었다. 또한 난동을 부려 보아야 소림의 무승 전체를
상대로 해서는 득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겨
우 가라앉혀 주었다.
『에잇!』
분한 생각에 눈앞의 은행나무를 세게 내찼다. 쿵, 하는 울림과
함께 그것이 마치 육초량을 꾸짖기라도 하듯, 가득 이고 있던 눈
덩이들을 와르르 쏟아 부었다. 이 놈의 나무 마저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엉뚱한 오기가 불끈 솟구쳤다.
『좋아!』
외친 순간, 육초량은 벼락같이 검을 뽑아 쏟아져 내리는 눈덩
이들을 베기 시작했다. 분수의 보를 밟으며 현란하게 방위를 바
꾸고, 촘촘한 그물을 펼치듯 물샐 틈 없이 치밀한 검기를 번개처
럼 뿌렸다. 그를 향해 덮쳐들던 눈덩이들이 머리카락 하나에도
와 닿지 못하고 잘게 쪼개져 안개처럼 흩날렸다.
엄밀한 수비의 검인 풍벽지검(風壁之劍)을 칠백 이십 방위를
일시에 베어 가는 천라지망의 공격검세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부동심을 엿본 뒤에 새로이 만들어 낸
이 일식의 검은, 또 한 단계 훌쩍 뛰어 오른 육초량의 모습을 보
여 주는 질풍검이었다. 육초량은 일기만변(一氣萬變), 만변일여
(萬變一如)의 검의를 담고 있는 그것에 출운산격(出雲散擊)이라
는 이름을 붙여 주고 스스로 만족해했다.
육초량의 산격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퍽-!
느닷없이 그의 검세를 뚫고 날아든 눈뭉치 하나가 등줄기를 호
되게 때렸다. 육초량이 경악의 외침을 토해 냈다.
바람 한 점 빠져나가지 못할 치밀함이라고 스스로 대단한 자부
심을 갖고 있던 풍벽지검이었고, 출운산격이었다. 그리고 그 증
거가 머리 위에서 안개처럼 잘게 부서져 흩날리고 있는 눈송이들
에게 있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가볍게 날
아든 눈뭉치가 등을 때린 것이다.
육초량이 질풍처럼 돌아섰다. 대여섯 장쯤 떨어진 곳에서 꾀죄
죄하기 짝이 없는 노승 한 명이 술 호로를 지저분한 입에 처박듯
기울이고 있었다. 한 손에 든 것은 큼직한 고깃덩이였다. 육초량
은 기가 막혔다. 설마 소림사 안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는
화상이 있을 줄이야...
이 놈의 소림도 드디어 망할 때가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어
이없어 하는데, 노승이 자랑이라도 하듯 커다랗게 트림을 해댔다.
『꺽- 끄르르... 어, 좋다.』
술 호로를 떼고 고깃점을 덥석 떼어 우물우물 씹어대던 노승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힐끗 육초량을 흘겨보았다.
『미련한 놈이로다. 위를 치면 아래가 비고, 앞을 치면 뒤가 비
는 간단한 이치조차 모르다니.... 쯧쯧, 작대기나 부지깽이나 휘
두르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이 노인네가!)
육초량이 사나워진 눈으로 곧 달려들 듯 노승을 노려보았다.
『신실(身實)이면 심허(心虛)하고, 심실(心實)이면 신허(身虛)
한 것이 세상사의 도리니라. 허나, 허와 실이 그렇게 나뉘고서야
범속지경(凡俗之境)을 언제 벗어날꼬?』
육초량의 전신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노승이 술주정하듯
던진 그 한 마디가 문득 머리 속을 거대한 충격으로 때리며 석화
(石火)처럼 찰라간에 번쩍였다.
부동심의 묘의를 엿본 이래 마음을 가라앉히면 몸이 무거워지
고, 몸을 가볍게 하면 마음이 들뜨는 심신의 상충(相衝) 현상을
느낀 것은 최근이었다. 그 일로 육초량은 내심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것을 풀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길이 있습니까?』
그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노승이 던지듯 대답했다.
『운심여수심(雲心如水心)!』
히히 웃은 노승이 다시 술 호로를 기울였다. 그 한 마디가 뇌
성벽력처럼 머리 속을 울리고 가슴을 뒤집어 놓았다. 앗! 하고
비명을 지른 육초량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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