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인지 오래전 꾼 꿈인지 알 수 없어요
고선경
무슨 영화를 볼지 고르는 오후에
아무것도 아닌 오후에
영화를 고르는 일은 좋지
두툼한 이불에 파묻혀서
나는 계속해서 틀리고 싶다
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 또한 아무것도 아니니까
봄비
하품
봄잠
버스
나는 자국을 남기는 것들이 좋더라
그런데 취향도 낡아 갈까
빗물의 농도랄지 잠의 깊이랄지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을 에워싸고 울타리를 친다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누구라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과 모두가 망했으면 하는 마음이 같다는 게
실은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빌려 쓴 마음
왜 안 갚아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갔다
봄비
하품
봄잠
버스
누비던
나비의 날갯짓
짓이기던 눈짓
나는 나를 밀려 써서
늙거나 죽지 않고
무엇을 물어내야 할지 모르면서
꿈과 기억의 값을 매기고 있어
꿈과 기억의 바깥에서
이 감기는 일 년째 낫지 않네
나는 오직 한 사람만 기다렸지만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테니 저를 거둬 가세요”
아무도 원한 적 없는 한 문장을 우체통에 넣었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머리에 탱자를 이고 가는 고양이 한 마리를 봤다
감기 기운인지 봄기운인지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일 년도 가고 십 년도 갔다
텅 빈 우편함에서 탱자 냄새 희미하게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