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유함에 대하여
늘푸른언덕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딩동! 딩동!’
익숙한 SNS 알림 신호음과 함께 멀리 남미에서 문자와 사진이 도착했습니다.
무려 40일간 트래킹으로 남미 대장정을 떠난 친구에게서 보내온 안부 문자와 현장 사진입니다.
작년 말 크리스마스 즈음에 또다시 새로운 삶의 도전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친구의 멋지고 색다른 계획을 부러움으로 들었었는데 어느덧 40일간의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번 40일간의 여정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문자 속에 담겨있는 사진으로 유추해 볼 때 남미 대장정의 관문인 페루를 시작으로 볼리비아, 칠레를 지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유명한 트래킹 코스와 잉카문명의 흔적들을 밟아보는 일정으로 여겨집니다.
저와 삶의 코드가 통하는 이 친구를 저는 언제부턴가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나이 60세를 맞이하던 해인 2020년, 이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들을 부추겨 부산 해운대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르는 장장 77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토대장정을 기획하여 꼬박 한 달 동안을 종주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제 블로그에 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어서 그 이듬해에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40여 일간 홀로 걷더니 작년에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미 대장정을 새롭게 도전한 것입니다.
친구의 이러한 기행(?)을 보며 귀한 삶의 모티브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자유함’입니다.
친구는 여의도에서 음악과 공연 등 문화콘텐츠를 기획하여 마케팅하는 사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 방면에 타고난 남다른 재주와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마음만 먹으면 큰 수익을 거머쥘 수도 있어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단지 먹고 즐길만한 규모까지만 일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삶을 위하여 자유롭게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친구의 이러한 특별한 삶의 방식을 보면서 배우게 되는 삶의 교훈 하나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하는 목적이 시간의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자유로운 영혼인 친구가 전한 남미 대장정 소식과 그 친구만의 남다른 삶의 방정식을 생각하면서 언젠가 제 블로그에 인용했던 한 사업가와 어부의 이야기를 소환합니다.
조그만 항구 도시에 한 어부가 보트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곳을 지나던 사업가가 어부에게 말을 건넵니다.
사업가 : 하루에 몇 번이나 출어(出漁) 하시오?
어부 : 한 번이요. 나머지는 이렇게 쉬지요.
사업가 : 왜 두 번 이상 하지 않소? 그럼 몇 배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게 아니요?
어부 : 그러면요?
사업가 : 그러면?? 그러면 2년 뒤에는 모터 보트를 두 척 살 수 있고, 3~4년 뒤에는 두 세척의 보트로 훨씬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지요. 그럼 작은 냉동창고에 훈제 생선 공장, 커다란 생선 처리공장까지 지을 수 있고, 잘만 하면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다니며 물고기 떼의 위치를 미리 어선에 알려줄 수도 있소.
어부 : 그런 다음에는?
사업가 : 그런 다음에는 여기 이 항구에 편안하게 앉아 햇살 아래 달콤한 낮잠을 즐기는 거요. 저 멋진 바다를 감상하면서…
어부 : 내가 지금 그러고 있잖소!
블로그글
언젠가 지인이 보내 준 이 글을 읽으며 큰 울림이 있었던 짧은 이 이야기는 오늘 시간의 자유함을 누리기 위하여 떠난 친구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어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나를 비롯하여 삶의 시간에 구속당하여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자유를 주제로 한 대표적인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영화 ‘빠삐용’입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화 '빠삐용'은 세계적인 연기파 배우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한 1973년도 개봉작입니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강렬한 장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감옥의 독방에 갇힌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극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잡아 날것으로 먹는 장면입니다. 배고픔으로 죽을 상황이 되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게 된다는 극한 상황을 깨닫게 한 명장면이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주인공은 억울하게 살인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악명 높은 프랑스령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모든 것이 구속되고 억압받는 감옥 생활을 통하여 무죄한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탈옥을 감행하게 되면서 생기는 수많은 어려움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탈옥을 하다가 잡히게 되면 더 가혹한 중형이 내려지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갈수록 탈옥에 대한 가능성이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며 마지막으로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는 악마의 섬으로 보내집니다. 그곳에서 삶의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겠다는 그의 집념은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빠삐용을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야자나무 열매껍질을 모아 만든 포대자루를 수백 미터가 넘는 낭떠러지 밑의 넘실대는 검은 파도 위에 던져놓고 그 아래로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어렵사리 그 포대자루를 붙잡고 망망대해를 향해 헤엄쳐 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면에서 세상을 향한 그의 외침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Hey you Bastards, I’m still here!
(야! 이 놈들아! 나 여기 살아있다!)
영화 '빠삐용'중에서
세상은 비록 그의 몸은 가둘 수 있었어도 그의 자유를 향한 집념과 의지만은 결코 가둘 수 없었음을 전한 영화의 강렬한 메시지가 관객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서두에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의 삶과 연결하였을 때 우선 돈을 벌어 얻을 수 있는 경제의 자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장 각광받은 총아(寵兒)로서의 돈의 위력은 가히 신의 영역까지 넘볼 수 있는 무소불위의 존재입니다. 돈이 제공하는 자유의 영역은 실로 큽니다.
그런데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건강입니다.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건강의 자유함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돈으로도 건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특별한 자유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으로부터의 자유함일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024년이 시작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가버렸다'고…
우리는 세월이 빠름을 실감하고 때론 그 시간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단지 빠른 세월 탓으로 돌리기 일쑤입니다. 빠른 시간을 한탄만 하지 정작 그 빠른 시간을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에는 다소 게으른 편입니다. 빠른 시간 속에서 자유함을 얻는 길은 바로 그 시간을 지배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서두에서 전한 친구의 이야기처럼....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삶에서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는 돈도, 건강도 시간의 자유도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누려야 할 가장 의미 있는 자유함은 바로 진리의 자유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유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처음 이 말씀을 접했을 때 멋진 말처럼 들리긴했지만 사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사용하였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이 말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요한복음의 이 말씀들을 정리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가 바로 구원의 주요 독생자 예수님임을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또한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을 통하여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이야기하시며 이러한 진리 곧 말씀을 알고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소식입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며 살아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재물과 건강과 시간의 자유함의 차원을 넘어선 거룩한 영적 자유함입니다.
첫댓글 우리가 사는 동안 삶의 목적을 자유함에 둘 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경제의 자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건강과 시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자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원한 진리와 함께 하는 자유함일 것입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