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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계 1장 4- 6)
성경본문: 요한계시록 1: 4-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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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한 이웃 여러분,
옛날이나 지금이나 격식을 갖춘 편지 첫 문장에는 문안이 나옵니다.
그러나 옛날 문안과 지금의 문안의 차이점은 누구의 이름으로 그 문안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헬라인이든 로마인이든 혹 유대인이든 모두 그들이 섬기는 신들, 혹 신의 이름으로 문안했습니다.
각기 부르는 신의 이름은 다를 수 있지만 자기 신의 이름을 불러 문안하는 방식은 꼭 같았습니다. 여기에 고대인과 현대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옛 사람은 그 의식 속에 항상 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과 행동의 반경 속에 항상 신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참된 신 대신에 거짓된 신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하긴 했지만 신 의식이 없는, 신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편지 한 통을 써도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문안을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 신의 이름을 불러 그분의 축복을 기원했습니다.
반면에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에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신을 의식하지 않고 결혼을 하고 편지도 씁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 사회는 세속화된 사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생각과 행동의 반경 속에 신이 사라졌습니다. 그 중심에 신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편지 형식으로 전달된 계시를 읽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우리가 읽는 편지는 현대인이 쓴 편지가 아닙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문안과 축복을 하는 현대인이 쓴 편지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대하는 편지는 옛 사람이 쓴 편지입니다.
그들 삶의 방식대로 그들의 신의 이름을 불러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편지입니다.
요한이 기원하는 은혜와 평강은 요한이 사도로서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나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요한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문안을 하면서 성부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구절은 성부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한 번역에 불과합니다. 대강 뜻이 통하도록 시도한 번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무지 우리말이나 영어나 그 어떤 말이라도 요한이 헬라어로 기록한 형식으로 번역할 수 없습니다.
아마 요한이 출애굽기 3장 14절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표현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에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도다 하라.”
영어로 표현하면 ‘그’는 ‘He’라고 합니다. ‘그로부터’는 ‘from Him’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어떤 때는 ‘He’라고 했다가 또 다른 때는 ‘Him’이라고 할 수 없다고 고지식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를 ‘from the H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영존하신 분이기 때문에 까짓 헬라어 문법쯤 바꾸면 바꾸었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바꿀 수는 없다고 요한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때는 사람 대신에 하나님을 숭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요한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불변한 분이고 하나님만이 신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느냐는 긍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헬라어 문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련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그분께서 모든 역사의 주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 속에서 그 진로를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계실 분’이라고 해도 되었을 텐데 왜 마지막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물론 이 말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 하나님의 오심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지만 장차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장차 오실 주님에 대해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노래만 부르고 아기 예수님만 노래하면서 옛날 생각만 해서는 안 됩니다.
곧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역사의 진로 속에서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그분의 오심을 알고 계십니까?
미래 역사의 가장 큰 사건으로서 주의 재림을, 다시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지금부터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가장 엄청난 미래의 사건 - 그의 오심을 의식하며 살아가십시오.
혹 교회 일 하느라 바빠서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잊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소홀히 하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가 왜 바빠야 하는 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그때, 은혜와 평강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보좌 앞의 일곱 영
자, 그러면 은혜와 평강의 제2의 출처로서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 . . 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란 표현은 특이한 표현입니다. 성령은 한 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일곱 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성령’이란 표현을 쓰는 대신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영을 지칭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곱 영’이 일곱 교회에 보낸 일곱 천사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처음에 성부 하나님이 등장하고 마지막에 성자 예수님이 나오는데 중간에 성령이 빠져 버리고 대신 천사가 등장한다면 흐름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줍니까?
천사는 구원 받을 우리를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이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평강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성령’을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세상과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역사하시는 충만한 영을 가리킵니다.
완전수 일곱이 의미하는 바대로 그의 역할과 기능이 다양함을 나타내고 또한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충만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전달됩니다.
은혜와 평강은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충만한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축복입니다.
충성된 증인
끝으로 하나님에 관한 묘사를 살펴봅시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5절)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증인으로서 오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었던 것을 전해 주는 것이 그의 사명의 일부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모든 예언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인을 쳤고,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든 진리에 대해서, 그것이 신실하다고 예수님이 증거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자기소개를 들어 봅시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또한 복음서에서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도 같은 면모를 강조합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네가 왕이냐?”라는 질문을 하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비웃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너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예수님을 무시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입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온 천하를 지으신 분이신데 그분이 한낱 세상의 통치자 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임명을 받아 다스리고 있는, 황제의 푸들, 애완견에 지나지 않는 총독 빌라도 앞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라는 사실로 인해 무시를 당할 때, 여러분이 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멸시를 받을 때, 이런 예수의 삶을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세상의 창조주로서, 이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로마 제국의 한낱 벽지, 유대의 총독 앞에서도 이처럼 무시를 당하면서 사셨는데,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끔 당하게 되는 무시야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동시에 하나님은 그런 무시를 겪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겪는 멸시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우리도 동참하는 것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당신이 우리의 무시와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기에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도록 정하셨습니다.
나이 서른을 갓넘긴 어떤 자매가 암에 걸려 두 아이를 남겨 두고 곧 세상을 떠날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동안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처럼 불쌍한 인생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기도하는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는, 거기 자기보다 훨씬 고통을 당하고 사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는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병이 치유될 만한 소망이 없지만 그 병이 마치 남의 것인 양 담담히 여기면서 넉넉히 이기는 자로서 남은 날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우리의 삶에 나타나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찬송합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속목적과 사역에 대한 신실한 증인이십니다.
그분의 신실한 증거와 사역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영혼은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 주셔야, 그분이 증인이 되셔야 그 말씀이 성도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계속해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즉 부활의 처음 열매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여기서‘먼저 나신 자’라는 말은 연대적인 의미보다는 주권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그 역할을 감당하는 큰 아들의 역할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 . ”(시 89:27).
부활하심을 통해서 예수는 첫 아들의 위치를 얻으셨습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유혹한 대로 그 앞에 경배함으로써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셨습니다.
이 해석은 또한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과 어울립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도 예수가 주권자이시고, 산 자들의 세상에서도 열왕의 머리가 예수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성경이 일관성 있게 증거하는 바입니다.
비록 그 당시의 정치적인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로마가 절대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대항할 만한 세력이 땅위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으로 로마가 온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뇨?
외견상 모순이지만 신앙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주라고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그 당시 신앙인들은 예수 그분이 죽은 자 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모든 임금들의 머리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눈으로 보는 대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에 입각해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 역사는 항상 선이 승리하고 옳은 것이 득세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신앙인은 예수가 이 세상의 주인인 동시에 이 세상 너머에서도 예수가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상의 실세들을 우습게보시며 그 집권자들을 무력하게 만드시는 영원한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은혜와 평강을 누립니다.
그때는 황제 숭배하는 것이 점점 그 도가 심화되어 우상숭배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원로원은 황제들이 죽은 후에 그 황제가 정치를 잘 하였다고 판정하면 그 황제에게 신의 칭호를 주었습니다.
시저, 아우구스투스, 글라우디오스, 베스파시안, 그리고 디도 등이 죽은 후에 신의 칭호를 받은 황제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글라우디오스, 베스파시안, 디도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모습을 화폐에 새기고 신이라는 글자를 함께 새겼던 사람들입니다.
요한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의 황제는 도미티안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신’이라는 칭호뿐 아니라 “주와 신”이라는 칭호를 부르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황제숭배는 아시아에서, 특히 에베소 지방에서 유행했습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첫 번째 교회가 위치한 지역이 에베소입니다.
정작 로마에서보다 속국들에서 황제를 신으로 떠받드는 일이 성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이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요한은 사랑하는 교회를 향해 이 귀한 진리의 시금석을 제시합니다.
경고와 위로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에서 유일한 주라는 진리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평강을 일곱 교회를 향해 선포합니다.
되풀이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부딪힐 종말적인 상황에 처한 교회를 위해 경고와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 숭배의 위협은 지나간 어제의 위협만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위협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계시록이 기록되던 시대에 한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때에도 반드시 황제숭배처럼,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넘어서서 경배를 요구하는 시기가 올 때 그것은 역사가 종말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나 저는 머지않아 “예수가 주냐, 인간이 주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것 때문에 삶의 터전을 박탈당했듯이, 여러분도 동일한 문제로 직장을 빼앗기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집단주의 - 중앙 집권적 경향입니다. 이 집단주의적 경향은 모든 조직체의 결정권, 집행권이 조직 내의 소수의 엘리트에게로 이양 내지 집중되는 것입니다. 현대기술의 뒷받침 속에서 소수집단이 전체를 조정하고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전체를 조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 수 있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컴퓨터를 통해 사회가 조정되고 통제될 수 있습니다. 정보가 통제되기 시작하면 한 사람의 일인 독재가 가능한 시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역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강력한 세계정부의 출현이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계정부의 출현은 그 논리적 귀결로 반드시 한 사람의 강력한 통치자를 출현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작가들이 말하는 <포드총재>나 <Big Brother>의 출현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10년 혹은 20년 내에 도래하게 될 상황입니다.
작년에도 새해가 왔고 올해도 새해는 왔으니까, 작년에도 예배를 드렸고 올해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해서 10년, 20년 후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꿈에서 깨어야 합니다.
인류의 문명은 이제 그 마지막 지점을 향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다시 초대교인들에게 주어졌던 동일한 질문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답할 준비가 되어져 있습니까?
“예수가 주냐, 인간이 주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의 환상은 어제에만 한정지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속히 되어질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 강한 통치 앞에 한 개인의 존재는 종이 한 장의 가치도 안 되는 시대에 처할 때에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강은 어디로부터 올 수 있습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그분에게서 위로와 평강이 찾아올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그 급박한 정황 속에 빠져든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한 도움의 활동을 통해서 여러분이 지속적인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며 그로부터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을 도울 방법이 그 때는 차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은혜와 평강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편안할 때 그 위로의 원천이 어디인지를 확인해 두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그때에 바로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숨 막히는 상황에 부딪힐 때, 내가 여러분의 얼굴을 보지만 여러분을 향해 한마디 사랑스런 충고를 던져 주지 못한 채 그냥 스치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은혜와 평강은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이 시대가 어느 때에 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안심하고 살다가 그때에 동으로 서로 날뛰지 말아야 합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 주실 유일한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평강이 그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깃들기를 바랍니다. 아멘